•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3) 통교 회복 직후 조일 교린관계의 실태

가. 제2·3회 회답겸쇄환사의 파견과 대마도의 국서 위조

 조선은 선조 40년의 통교 재개 이후 광해군 9년과 인조 2년(1624)에도 피로인 송환을 위한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일본과 주고 받은 외교문서는 무려 11통이나 되었는데, 조선은 일본측의 외교문서에 대해 막부장군이 먼저 國書를 발급하되 반드시 ‘日本國王’호를 사용할 것 등, 일정한 서식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조선 후기 양국 간의 통교는 대마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간접 통교체제였기 때문에, 조선측 외교사절의 일본 파견을 위한 교섭도 막부의 명을 받은 대마도가 대행하였다. 조선 전기 계해약조 이래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국의 교섭 창구 역할을 해 온 대마도는 나름대로 교섭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양국의 외교적 마찰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대마도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마도의 이러한 인식 때문에 3번에 걸친 회답겸쇄환사 파견시 오고간 11통의 국서는 대부분 대마도에 의해 위조되고 있었다.

 선조 40년(1607) 제 1회 회답겸쇄환사가 가지고 간 조선측 국서는 대마도에서 삭제한 글자가 24자나 되며, 새로 써 넣은 글자는 18자나 되었다.612)孫承喆,<朝鮮後期 脫中華의 交隣體制>(≪講座 韓日關係史≫, 玄音社, 1994), 365쪽. 개작의 대상이 된 것들은 조선이 일본측에 제시한 조건과 관련이 있었다.613)≪宣祖實錄≫권 200, 선조 39년 6월 계해. 선조 40년의 국서는 회답겸쇄환사라는 사행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연히 답서의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駿河(츠루가, 현재 靜岡縣)의 덕천가강으로부터 대마도주(宗義智, 소오 요시토시)에게 조선의 사행으로 하여금 에도에 있는 장군(덕천수충)에게 가서 예를 행하게 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사행 일원의 반대가 있었으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답서를 來書로 고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답신을 보낸다는 의미의 奉復이 먼저 글을 올린다는 뜻의 奉書로 바뀌었다. 장군의 외교칭호도 조선측이 제시한 ‘日本國王’이 아니라 ‘日本國源秀忠’으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물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別幅의 내용도 변경하여 인삼 50근을 200근으로 고쳤다. 조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마도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일본에 왕래하는 각종 일본인에 대한 통제를 조선으로부터 위임받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으로부터 銅印(도서)을 받아 書契나 文引을 작성함은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도서 및 서계도 허위 작성해 왔다.614)田代和生·米谷均,<宗家舊藏「圖書」と木印>(≪朝鮮學報≫156, 1995), 93∼95쪽. 대마도는 조선의 3사와 상담한 끝에 서계 및 別幅의 내용을 새로 조정하였으며, 개작된 국서에 찍을 德有隣이라는 조선 국왕의 도장도 대마도에서 위조하였다. 위작된 국서는 조선측 사행이 에도에 입성한 후 장군을 알현하기 직전에 바꾸어졌다.

 이렇게 해서 선조 40년의 회답겸쇄환사가 7월에 귀국하여 선조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는 뜻밖에도 막부장군의 답서가 제출되게 되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일본측에 개서를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온 사절에 대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선조의 용서로 가벼운 처벌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국서 개작문제는 아직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으며, 그 후 제2·3회 회답겸쇄환사의 파견시에도 국서 위조가 계속해서 10여 차례나 더 행해졌다. 조선은 국교 재개 교섭 이후 일관해서 장군의 칭호를 일본국왕으로 해 줄 것을 원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명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에 일본을 편입시킴으로써 전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동양 3국의 평화 내지는 공존을 모색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615)孫承喆, 앞의 책, 193∼195쪽. 일본은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했으며, 더구나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천황을 일본국왕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므로 막부장군을 함부로 일본국왕으로 기재할 수 없었다.

 조선측이 문제삼은 서식 및 외교칭호의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 통교체제 및 일본 내부 사정과도 관련되는 부분으로, 조선과 막부 당사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는 결국 조일 양국의 교섭창구로서 양국의 사정을 잘 알고 조선 전기 이래 교섭기술을 축적해 왔던 대마도에 의해 국서 위조라는 방법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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