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2) 통교체제의 개편

가. 통신사행

 막부는 국서개작사건 이후 인조 14년 2월 대마도주 宗義成(소오 요시나리)을 통해 조선에 일본의 태평 축하를 위한 사절 파견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 여부를 놓고 논의를 거듭했으나, 결국은 남변의 안전과 대마도주 종씨를 통한 교섭루트의 안정을 위해 사절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인조 14년은 조선에 대한 후금의 정치적·군사적 압박이 심해지던 시기였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과의 관계도 형제관계에서 사대관계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불응할 경우 군사적으로 침략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청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을 수락하였다.

 인조 14년 병자 통신사의 초빙 교섭은 대마도가 맡았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서식 개정을 바탕으로 교섭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명의 연호 대신 干支 앞에 龍集 등을 쓰던 것을 天皇의 연호로 변경한 것과 조선측 국서에 사용하는 장군 호칭을 大君으로 해 줄 것 등이었다. 조선은 처음에 일본의 의도에 의혹을 품었으나, 일본 연호나 대군 호의 사용은 국서개작사건 이후 대조선통교체제의 정비에 따른 막부의 내부 사정에 의한 것으로, 용어 자체에 상대국에 대한 우월을 나타내는 의미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용어 변경은 명의 책봉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일본이 취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라고 인식하였다.620)孫承喆, 위의 책, 215쪽. 그리하여 인조 14년 4월에는 洪喜男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통신사 강정절목을 정하고 용어 개정에 합의를 하였다. 8월에는 정사 任絖을 비롯한 478명의 외교사행이 전쟁 이후 처음으로 通信使라는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당시 차후의 외교사행 파견에 대해 조일 양국 간에 어떤 약조나 규정이 정해진 것은 없었다. 단지 회답겸쇄환사라는 전후 처리를 위한 사행과는 달리, 상호 양국관계의 우호를 위해 朝鮮國王과 日本國大君이라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통신사의 파견이 가능하다는 전례가 만들어진 셈이다.621)荒野泰典은 국서개작사건 이후 형성된 막부의 대조선외교체제를 ‘大君外交體制’라 한다(≪近世日本と東アジア≫, 東京大, 1988, 191∼222쪽).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막부장군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신사 초청에 따른 경비는 관동 및 서남 일본 영주(大名)의 경제력을 동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일반 민중들에게는 화려한 외국 사절단의 행렬을 보여 주고, 민중들은 이를 확인하면서 중앙 정권으로서의 막부의 권위가 정착되어 갔다. 막부가 통신사를 통해서 거두어들이는 정치적 효과는 큰 것이었기 때문에 막부 초기에는 통신사 초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의 제3대 장군 德川家光(토쿠가와 이에미츠)은 이러한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과, 명청교체기 조선이 안고 있는 청에 대한 위기감을 이용하여 丙子 통신사가 파견된 지 7년 만인 인조 21년(1643)에 또다시 그 아들(德川家綱;토쿠가와 이에츠나)의 탄생 축하를 위한 명목으로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장군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 파견된 전례는 없으나, 명의 책봉체제 붕괴 이후 청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보국안민과 일본과의 관계 안정을 위해서는 파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회답겸쇄환사 파견 이후 통신사행의 파견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양국 모두 명청교체라는 국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안으로는 내정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통교관계의 안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유일한 通信의 나라로 여겨 효종 6년(1655)부터는 막부장군의 습직이 있을 때마다 조선에 사신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전례를 존중하여 그 때마다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며, 순조 11년(1811)의 辛未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모두 12번이나 파견하였다. 조선은 조선 전기 사행로가 왜군의 침략로가 되었던 것을 염려하여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에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으로 파견되었다.

 통신사행은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외교사행으로 예조참의급 정사를 비롯하여 400∼500여 명의 규모로 파견되었으며, 체재 기간은 6∼12개월 정도였다.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가는 통신사 행렬의 규모는 통신사행을 비롯하여 이를 수행하는 대마번사, 그리고 접대를 맡은 지방의 藩士까지 합하면 2,000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체재 기간 동안 통신사 일행은 에도를 방문하여 막부장군을 직접 만나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또 접대를 받았다. 그리고 각지의 일본인들과 주자학·문학·의학·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이들의 접대를 위해 지출하는 일본측 총경비는 대략 銀 100만 兩, 동원 인원 33만 명, 말 7,600두에 이르렀다.

 통신사행의 파견은 명청교체라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 속에서 조일 양국이 정부 차원에서 신뢰를 확인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때문에 19세기 중엽 그 운용이 다소 왜곡되기는 했어도 파견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횟수 연 대 사절 명칭 인원 정사 사행 기록 기 타
1 선조 40년(1607)
慶長 12
(정미)
회답겸쇄환
수호
467명 여우길   국교회복
경 섬 해사록
정호관  
2 광해군 9년(1617)
元和 3
(정사)
회답겸쇄환
大坂평정축하
428
(78)
오윤겸 동사상일록 伏見행례
박 재  
이경직 부상록
3 인조 2년(1624)
寬永 1
(갑자)
회답겸쇄환
家光습직축하
300 정 립    
강홍중 동사록
신계영  
4 인조 14년(1636)
寬永 13
(병자)
태평축하   임 광 병자일본일기 통신사 호칭
일본국대군호
日光山 유람
김세렴 해사록
황 려 동사록
(권 식)  
5 인조 21년(1643)
寬永 20
(계미)
德川家綱
탄생축하
477 윤순지   東照社 제사
조 경 동사록
신 유 해사록
(박안기)  
  계미동사일기 (미상)
6 효종 6년(1655)
明曆 1
(을미)
德川家綱
습직축하
485
(100)
 
조 형 부상일기 東照宮 배례
大猷院 제사
유 창  
남용익 부상록
(이명빈)  
7 숙종 8년(1682)
天和 2
(임술)
德川綱吉
습직축하
473
(112)
윤지완    
이언강  
박경준  
(성 완)  
  동사일록(김지남)
동사록 (홍우재)
8 숙종 37년(1711)
正德 1
(신묘)
德川家宣
습직축하
500
(129)
조태억 동사록 新井白石의
외교의례
개혁
임수간  
이방언  
(이 현)  
  동사록 (김현문)
9 숙종 45년(1719)
亨保 4
(기해)
德川吉宗
습직축하
475
(109)
홍치중 해사일록  
황 준  
이명언  
(신유한) 해사록
  부상기행(정후교)
부상록 (김옹)
10 영조 24년(1748)
寬延 1
(무진)
德川家重
습직축하
475
(83)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봉사일본시견문록
(박경행)  
  수사일록(홍경해)
일본일기 (미상)
11 영조 40년(1764)
寶曆 1
(갑신)
德川家治
습직축하
477
(106)
조 엄 해사일기 崔天淙
피살사건
이인배  
김상익  
(남 옥)  
  계미사행일기(미상)
일본록 (성대중)
12 순조 11년(1811)
文化 8
(신미)
德川家齊
습직축하
328
 
김이교   대마도
역지통신
이면구  
(이현상)  
  동사록(유상필)
도유록(김청산)

<표 1>통신사행

(숫자)는 대판 체류
* (인명)은 제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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