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3) 겸대제 실시와 외교 사행의 정비

가. 겸대제

 1630년대에는 소위 兼帶制라 하여 통교체제의 정비와 아울러 무역적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광해군 원년(1609)의 기유약조는 조선과 일본 간의 통교·무역에 관한 틀을 설정하였을 뿐, 세칙은 제시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접촉시 발생하는 폐단이나 현안에 대해서는 조선과 대마도가 교섭하여 그때 그때마다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마도는 광해군 3년 조선에 처음으로 세견선을 파견한 이래 20여 년 동안, 세견선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사자를 파견해 왔다. 양국 간에 가장 먼저 현안문제로 대두된 것은 바로 이러한 대마도 사자의 접대에 들어가는 조선측의 경제적 부담 증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측이 제안한 것이 겸대제로, 기유약조의 범위 내에서 사송선의 파견 횟수를 줄이고 교역 방법을 변경하자는 것이었다.

 겸대제의 교섭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증정교린지≫에 따르면 인조 13년(1635) 역관 홍희남이 馬上才를 보여 주기 위해 에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대마도주를 설득하여 타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본에서 오는 도항 使船에 대한 접대 형식의 개선책을 제시한 것으로, 조선에 도항할 수 있는 대마도 세견선의 숫자를 줄였다. 종래는 외교문서(서계)를 지참한 정관 및 그 일행이 승선한 20척의 세견선이 조선에 도착하면, 조선국왕에게 진상이라는 조공적 의례를 치른 후에 각 사선마다 무역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겸대제에서는 제1특송선사가 제2·제3특송선사의 외교문서를 함께 가지고 오도록 함으로써 제2·3특송사의 파견은 생략하도록 한 것이었다. 세견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제1선에서 제4선까지만 따로 접대하고, 나머지 13척(제5∼17선)에 대한 서계는 제4선사가 함께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623)≪增正交隣志≫권 1, 겸대. 그 결과 세견선 20척 가운데서 접대를 받을 수 있게 된 사자는 제1특송선사를 비롯하여 제1·제2·제3·제4선 송사의 5선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15척의 사선에 대한 접대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교역방법도 달라졌다. 겸대제에서는 각 사선에 배당된 진상·회사물과 공무역 물품은 의식을 치를 때 물목(別幅)만 교환하고, 실제 교역품은 訓導나 別差가 왜관의 대관에게 1년 단위로 결재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求請物이나 잡물도 쌀로 환산해서 지급하기로 하였다.624)위와 같음. 즉 종전에는 사선이 오갈 때마다 무역할 물건을 실어 날랐는데, 무역 결재가 1년 단위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외상거래도 가능하게 되어 경제적 거래 행위의 성격이 그만큼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625)鄭成一,≪조선후기 對日貿易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에 관한 연구≫(全南大 博士學位論文, 1991), 65쪽.

 겸대제 실시로 조선에 도항하는 사송선은 서계와 별폭만 지참할 뿐, 무역의 임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무역에 관한 부분은 대관이 취급하게 되었다. 무역 절차가 간소해짐은 물론, 외교와 무역의 업무가 분리됨으로써, 외교와 무역을 구분하기 어려웠던 전근대적 요소는 조금 퇴색하게 되었다.

 겸대제는 인조 15년 5월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일관계가 파탄에 이를때까지 양국 간의 무역은 기본적으로 이 겸대제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교역방법의 변화로 인해 외교사행의 파견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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