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4) 왜관 중심의 통교·무역과 조일 교섭체계의 형성

(4) 왜관 중심의 통교·무역과 조일 교섭체계의 형성

 조선의 예조(참판·참의·좌랑)와 대마번이 외교창구가 됨에 따라 일선에서의 교섭체계도 차츰 자리잡혀 갔다. 우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인들의 상경을 금지함에 따라 일본 사자나 상인들의 숙소였던 한양의 東平館도 폐쇄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설치된 부산포 왜관이 일본인들과의 유일한 통교·무역의 장이 되었으며, 東萊府가 대일교섭 창구의 최일선이 되었다.

 동래부의 대일교섭 사무를 위해서는 중앙의 사역원에서 통역관(倭學譯官)이 동래부 및 부산첨사영에 파견되어 왜관의 일본인과 일상적으로 접촉하였다. 그리고 일본측 사행을 접대할 경우에는 사자의 경중에 따라 京鄕에서 接慰官을 따로 정해 동래부에 파견하여 일본측의 사안을 듣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小通事라 불리우는 倭學生徒들이 왜관 내의 통사청에 근무하면서 각종 실무에 참가하였다. 이 가운데 대일교섭에서 실질적으로 비중이 있었던 것은 일본어를 구사했던 왜학역관으로, 訓導와 別差는 왜관에 수시로 출입하면서 예조나 동래부사가 일본에 보내는 공적인 외교문서 및 지시에서부터 사적인 서한까지를 왜관측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대마번주의 서계나 왜관에 파견된 사자의 서한도 조선측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이 단순히 전달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측의 외교문서나 교섭 사안을 처음으로 접할 때 이를 동래부사에게 전할 것인가 또는 퇴각할 것인가에 대한 일차적인 판단이 요구되기도 하였으며, 조선 정부의 외교문서나 동래부사의 서한, 또는 의사를 왜관측에 전달할 때에는 그들의 외교적인 능력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일 간의 무역에도 간여하였다. 조선 상인과 대마도 상인 간에 이루어지는 공무역시에는 왜관의 大官에게 훈도와 별차 명의로 무역대금을 결재해 주었다.

 왜관이 대조선교섭의 최일선 창구가 됨에 따라, 왜관에도 館守를 비롯하여, 裁判·年例送使·대소 사자(差倭)·代官·東向寺僧·通詞 등 대마도의 役人들과 상인들이 각자의 일을 마칠 때까지 상주 또는 단기간 체류하였다. 대마번에서는 인조 15년(1637)부터 관수를 총책임자로 하여 왜관을 총감독·관리하는 한편, 각종 사자들의 조선과의 교섭에 편의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동래부와 왜관이 최일선의 교섭창구가 되었지만 동래부사가 관수나 사자를 직접 대면하여 교섭을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절차로 인해 조선 후기 260년 동안 동래부사와 왜관의 관수는 동래부가 대마도 사자를 위하여 베푸는 연회석상이 아니면 직접 대면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동래부사는 훈도와 별차가 가지고 온 일본측 외교문서나 교섭사안을 접수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여, 啓聞의 형식으로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동래부에서 작성한 狀啓는 경상감사를 거쳐 예조와 비변사를 통해 국왕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러한 교섭 절차를 轉達이라 한다.

 동래부라는 특수성 때문에 대일교섭 사무를 맡고 있는 동래부사는 변경에 위치한 다른 어느 지방관보다도 책임이 무거웠으며, 중앙 정부의 대일정책에 어느 정도 기여하느냐에 따라 승진하기도 하고 또 가차없이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다.626)James B. Lewis,<壬辰丁酉倭亂以降江華島條約以前の朝鮮からみた對馬>(≪地方史硏究≫232, 41-4, 1991), 37∼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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