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3) 17세기 후반 이후 조일 통교양상의 변화
  • (1) 1711년 신묘년 통신사에 대한 의례 변경과 그 의미

(1) 1711년 신묘년 통신사에 대한 의례 변경과 그 의미

 17세기 후반에는 왜란 직후 피로인의 송환과 같은 조일 간의 외교 현안은 줄어들었다. 1640년대 이래 일본에서도 막부장군의 권위가 점차 확고해짐에 따라, 통신사에 대한 관심도 퇴색해 가게 되었다. 통신사는 전례를 존중하여 의례적으로 보내는 관행으로 여겨지게 되고 부수적인 기능이었던 문화교류에 오히려 중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숙종 37년 신묘년 조선이 막부의 제 6대장군 德川家宣(토쿠가와 이에노부)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을 때, 일본은 뜻밖에 외교의례를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일본측의 외교의례 변경은 장군직 습직 직후인 1709년 6월부터 新井白石(아라이 하쿠세키)에 의해 추진되었다. 장군의 외교 칭호를 大君에서 日本國王으로 부활시킨 것을 비롯하여, 장군직 계승권자(若君)에 대한 예물 정지, 禮曹로부터 막부 老中에게 보내는 書契와 幣帛 정지, 막부 사자가 통신사의 客館을 방문하는 것의 금지 및 방문한다 하더라도 통신사 일행은 階下 迎送할 것, 國諱 사용의 금지, 조선 國書의 正使 전달 및 4拜禮 요구 등이었다. 이는 유교 경전에 바탕을 둔 것으로 통교 재개 직후 임기응변적으로 마련된 외교의례를 수정하여 표면상 대등 외교(敵禮)·간소함을 추구하고는 있었다. 위의 요구는 빙례 내용 자체에 조선을 멸시하는 부분은 없었으므로 조선은 조선에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도 하였다.627)閔德基,≪前近代東アジアのなかの韓日關係≫(早稻田大學出版部, 1994), 322∼345쪽.

 그러나 위의 항목들은 조선과 사전에 어떤 협의도 없이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통신사가 조선을 떠나기 전에 대마번의 재판이 口頭로 동래부사에 알려 왔다.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것은 장군의 외교칭호를 大君에서 日本國王으로 고쳐 달라는 復號문제로, 新井白石은 일본에서는 대군이 천황을 의미하는 것이며, 조선에서는 왕자의 칭호이기 때문에 대등외교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일본의 일방적인 외교의례 변경에 대해 영의정 徐宗泰를 비롯한 조정의 의견은 인조 14년(1636) 병자통신사 이후 사용해 왔던 대군호를 상호 이해없이 바꾸는 태도는 조선을 지휘하는 자세로서 엄중하게 배척해야 한다고 하였다.628)≪備邊司謄錄≫제62책, 숙종 37년 6월 3일. 그러나 숙종은 일본국왕이란 室町(무로마치)막부와 조선이 통교할 때 사용한 적이 있으며, 옛 칭호를 다시 부활시키는 復號에 해당하므로 굳이 문제삼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처음에는 반대가 중론이었지만 국왕의 호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 국내의 제후에게 장군의 권위를 과장하려는 데 있으므로, 이를 거절할 경우 일본과의 사이가 악화될 것이라는 국방상의 이유와 帝王의 道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였다.629)위와 같음. 이러한 판단하에 조선측에서는 국서를 다시 작성하여 부산에서 출발을 대기하고 있는 통신사 일행에게 급히 전달하였다.630)≪肅宗實錄≫권 50, 숙종 37년 5월 을묘.

 빙례 개혁을 주도한 신정백석은 甲府藩의 번주에서 일약 6대 장군이 된 덕천가선의 막부안에서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제도정비에 착수하는 한편,631)新井白石은 ‘武家諸法度’라는 국내의 영주 통제법을 고쳐 장군의 지배력을 강화 함으로써 元祿시대 이래의 文治정치 및 장군의 전제화를 실현하려 하였다. 통신사 의례의 개혁을 통해 기존에 장군이 가지고 있던 권력에다 고대 천황의 권위를 더 부여하여 장군의 帝王化를 꾀하려 하였다.632)閔德基, 앞의 책, 331쪽.

 통신사 일행은 대마번의 교섭으로 결국 막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趙泰億을 비롯한 3使 일행은 귀국 후 조선의 國體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삭탈 관작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신정백석이 제안한 막부장군 중심의 빙례 개혁은 조선측의 반발은 물론, 일본 자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동시대 인물로 대마번의 유학자였던 雨森芳洲(아메노모리 호슈)와 中井竹山(나카이 치쿠잔, 1789∼1800) 등 소위 명분론자들은 復號論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신정백석은 大君은 유교 경전에서 天子를 이르는 말이므로 폐지해야 하며, 王은 漢代 이래 천자를 칭하는 칭호가 아니므로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분론자들은 국왕=천황=천자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통념과, 왕도 유교 경전에서는 천자를 의미하고, 대군도 漢 이후에는 천자를 칭한 적이 없다는 예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였다.

 신정백석의 외교의례 변경이 일본 국내외에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앞으로 통신사 초빙시 숙종 37년(1711)과 같은 형식의 의례를 다시 치룰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우삼방주는 통신사 의례의 변경이 자칫 잘못하면 외교적 마찰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통신사 정지론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의 국체를 손상시키는 빙례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에도에서 치룰 경우, 조선측의 반발로 막부장군의 권위에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숙종 45년, 제8대 장군 德川吉宗(토쿠가와 요시무네)의 습직시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다시 숙종 8년의 구례대로 빙례를 치르게 되었다. 구례로 복원되기는 했지만 그 후 통신사 파견에 대한 회의적인 인식은 일본 국내외에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영조 40년(1764) 通信副使의 서기였던 元重擧가 통신사행의 수행인원이 너무 많아 민폐가 많으며, 하속배들이 행패를 부려 사행의 위신을 손상하는 일이 많은 점, 商譯들의 권한과 대마도와의 유착 관계, 그리고 사행시의 막대한 교역 물품으로 재정 손실이 많은 점을 들어 통신사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633)河宇鳳,<元重擧의 日本認識>(≪李基白敎授七旬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1258∼1261쪽.

 신정백석은 1711년의 聘禮 개혁이 국내외의 반대에 부딪히자, 곧 조선 멸시에 바탕을 둔 대마도 易地論을 내놓았다.634)閔德基, 앞의 책, 359∼360쪽. 19세기 일본에서는 대조선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막부의 老中 등이 이러한 통신사 회의론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외교의례의 왜곡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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