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3) 17세기 후반 이후 조일 통교양상의 변화
  • (2) 17세기 후반 조일 양국민의 접촉과 대일정책

가. 왜관을 둘러싼 접촉의 다양화

 겸대제 실시 이후 대마번에서는 각종 大·小差倭를 왜관에 파견하여 조선 국왕의 경조사 및 외교 현안을 타결하였다. 물론 이들의 도항시에는 상인들도 따라와서 교역에 참여했는데 왜관에서는 한달에 6번 開市(사무역)가 있었으며, 이 밖에도 별개시가 열렸다. 17세기 후반에는 조일 간의 무역이 가장 활발하여 대마번이 대조선무역(사무역)으로 가장 많은 흑자를 보던 시기이기도 하다.635)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대마도가 대조선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무역 이윤은 연평균 1,723貫 244몸메 (元方役)이었다(田代和生,≪近世日朝通交貿易史硏究≫, 創文社, 1981, 260쪽).

 사행의 빈번한 왕래와 교역의 활발함으로 인해 기유약조 이래 유일한 통교·무역의 장이 되었던 부산의 왜관은 이와 관련된 대마도인으로 연중 북적대었다. 왜관 안에는 일정기간의 수행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외교사행을 비롯하여, 2∼3년씩 장기 체류하는 대마번의 役人과 상인까지 포함하여 대체로 1년에 400∼500명을 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류하고 있었다. 이는 대마번 인구의 1.5%에 해당하였으며, 대마도 성인 남성의 5%에 달하였다.636)田代和生, 위의 책, 176∼177쪽. 왜관은 유일하게 외국인이 집단으로 거류하던 곳으로 商館이면서 거류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그 결과 왜관의 대마도인들과 주변의 조선인들 사이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전보다 많아지면서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왜관의 경관 및 교섭체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조선은 광해군 원년(1609) 동래부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하여 일본과의 통교·무역을 위한 유일한 장소로 삼았다.637)삼포왜란 이후의 부산포 왜관은 임진왜란으로 폐쇄되었다. 왜란 후 국교재개 교섭시에 일본 사신의 숙소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옛 왜관이 없어졌기 때문에 절영도에 임시로 왜관을 설치하여 6년간 사용하였다. 1609년 기유약조 체결 후에는 두모포에 새로운 왜관(현 부산시 구관 일대)을 설치하여 1678년까지 72년간 사용하였다. 두모포 왜관은 약 1만 평 규모로 수심이 얕고 남풍을 정면으로 받았기 때문에 선창으로 부적합하였다. 이에 1678년에는 부산포의 草梁으로 왜관을 이전하였는데 10만 평 규모로 1872년 명치정부에 의해 접수될 때까지 거의 200년 동안 외교 및 무역 업무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네덜란드나 중국 상인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왜관을 고립된 지역에 설치하지는 않았다.638)일본은 네덜란드나 중국 상인들이 거주하고 무역을 할 장소로서, 1641년에는 長崎(나가사키)의 出島(데지마)라는 섬에 네덜란드 商館을, 1689년에는 신치(新地)에 唐館이라는 中國商館을 설치하여 격리 수용함으로써 일본인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을 막았다. 이유는 밀무역 방지와 기독교 금압, 일본 여성과의 풍기 문란 등을 막기 위함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왜관에 동래부나 부산첨사영의 譯官을 들여보내 외교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무역에 있어서도 조선으로부터 상행위를 허락받은 상인만이 대마도인들과 거래를 하도록 하였다. 왜관 거류 대마도인들의 왜관 문밖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으며, 왜관이 비록 조선인 민가 가운데 자리잡았다고 하더라고 왜관 주변의 조선인들과 대마도인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은 원천적으로는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관의 대마도인들과 왜관 주변의 조선인들은 실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으며, 접촉도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마도인들은 근무중 사망한 선조들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1년에 몇 번은 왜관 문밖을 나설 수가 있었다. 묘소 왕래시에는 도중에 있는 조선 민가에 들러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왜관 주변에는 서투르나마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들도 생겨났다. 중앙의 위정자들은 이러한 접촉 과정에서 조선의 정보가 새어 나간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 왜관의 대마도인들은 왜관 문밖의 朝市에서 조선 상인으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먹는 야채와 어물 및 쌀을 구입하였는데, 이 또한 조선인들과 접촉하기 좋은 기회였다.

 한편 앞 절에서도 지적했듯이, 조일 교섭은 동래부사와 왜관 관수가 직접 교섭하는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기는 양국민의 마찰도 접촉의 기회가 되었다. 대마도는 교섭 사안의 해결이 늦어지거나 왜관 체재에 필요한 물건(五日粮 및 炭柴)들이 조선으로부터 신속히 지급되지 않을 경우, 관수를 비롯하여 재판 및 기타 역인들이 조선인 관리를 직접 만나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왜관 거류 대마도인을 집단으로 이끌고 나와 동래부나 부산첨사영에 가서 항의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은 이러한 집단행동을 欄出(闌出)이라 하였으며, 동래부의 군졸 및 관리들과 곧잘 몸싸움을 하였다. 이러한 집단 항의로 인한 마찰이나 소동은 조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교섭기술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인조 4년(1626) 동래부사 柳大華 때에 1특송사 연향시 만송원 송사가 무리를 끌고 가서 公貿木을 지급해 달라고 공갈 협박한 것을 비롯하여, 순조 24년(1824)까지 왜관 거류 대마도인의 난출 행위는 대략 32회 정도 있었다.639)≪邊例集要≫권 13, 欄出. 난출을 통한 접촉은 자칫 잘못하면 조일 양국의 마찰로 불거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꺼려하는 접촉중의 하나였다.

 이 밖에 왜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마도 남성과 조선 여성 사이의 交奸도 큰 문제였다. 조선 전기에는 대마도 남성들이 개항장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림을 할 수 있었으며, 조선인들과 잡거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를 우려하여 대마도인의 가족 대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관에는 대마도 남성들만이 단신으로 파견되어 장기 체류하였다. 대마도 남성들이 때때로 조선 여인을 왜관으로 유인하여 간음한 교간 사건은 현종 2년(1661)을 비롯하여 철종 10년(1859)까지 모두 10회 정도가 기록에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이 숫자를 훨씬 웃돌았을 것으로 여겨진다.640)≪倭人作拏謄錄≫(서울大 규장각);≪增正交隣志≫권 3 館宇;≪交隣志≫禁條;≪邊例集要≫권 14 雜犯;≪分類紀事大綱≫(<交奸一件>, 국사편찬위원회·일본국립국회도서관) 참조.

 그리고 왜관 이외의 연해지역에서는 태풍이나 해류 등의 해상사고를 당한 조선인이 본의 아니게 일본에 표착함으로써, 또는 일본인들이 조선에 표착해 옴으로써 연해의 양국인이 접촉하는 사례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조선인의 일본 표착은 1년에 평균 3회 정도 발생하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 270년간 약 967회에 걸쳐 1만 명에 가까운 漂民이 일본으로부터 송환되었다. 또 반대로 조선에 표착한 일본인은 114회에 걸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조선측 표민 가운데는 전라도 및 경상도 어민이 숫적으로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인과의 밀무역을 위해서 원양 항해를 나섰다가, 또는 일본에서의 후한 대접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표류하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641)池內 敏,≪近世朝鮮人漂着年表≫(1599∼1872), 1996.
李 薰,<조선후기 日本人의 朝鮮 漂着과 送還>(≪韓日關係史硏究≫3, 1995), 90쪽.
조선 정부는 표민 가운데 고의적으로 표류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심증은 있었으나, 이를 확인하기란 어려웠다.

 이렇게 왜관 주변 및 연해 지역에서의 여러 가지 접촉에서는 국가 기밀이 누설될 수도 있었으며,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으나 통제가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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