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1) 개항 전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대마번의 조일 통교 대행

(1) 개항 전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대마번의 조일 통교 대행

 일본은 명치정부 수립 직후 외국과의 친교를 선포하고 외교권을 장악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왕정 일신을 계기로 모든 외국과의 교제를 京都 조정이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대조선문제는 막부 때와 마찬가지로 대마번의 家役으로 삼고 대마번주를 外務事務局輔에 임명함으로써,664)≪朝鮮外交事務書≫(成進文化社, 1971) 권 1, 명치 원년 무진 3월 23일, 신정부가 대마번주 宗義達에게 내린 太政官의 達(지시), 69∼70쪽. 대마번과 정부(外國官)의 공조체제를 내세웠다. 이는 잠정적인 조치였으나 대마번의 입장에서 본다면, 막부 말기 이래 대마번이 의도하고 있던 새로운 영지의 확보는 커녕, 외교개혁으로 책임만 늘고 대가가 없을 수도 있었다. 이를 우려한 대마번은 1868년 윤4월 구막부군과 정부군의 전쟁이 한창일 무렵 가신 大島友之允(오시마 도모노죠)으로 하여금 명치정부에 청원서를 제출케 하여,665)≪朝鮮外交事務書≫1, 79·83∼90쪽. 대조선 통교·무역을 포기하는 대가로 구막부시대에 대조선통교·무역에서 취해왔던 기득권을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였다. 이로 인해 명치정부는 조선과 직접 통교·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대마도에 대한 보상문제를 어떤 형식으로든 처리하지 않고는 안될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정부 초기 외국관은 대조선외교에 대한 교섭 기술이 축적된 상태도 아니었으며, 재정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대마번에 대한 보상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한일 국교의 형식과 국체에 관계되는 사항은 국내 평정 이후 지시할 것임을 정하였다.666)≪朝鮮外交事務書≫1, 179∼180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치정부는 대마번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였다. 대마번의 대조선교섭은 명치정부로부터 기득권을 최대한 보상받으려는 그들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리는 순간부터 교착으로 이어졌다.

 대마번은 종래의 교섭 절차에 따라, 裁判(川本九郞左衛門)을 부산에 보내 신정부 성립을 알리는 先問書契를 보내는 한편, 곧 이를 정식으로 알리는 大修大差使(樋口鐵四郞, 히구치 데츠시로)의 파견이 있을 것임을 알려 왔다.667)≪朝鮮外交事務書≫1, 211∼213쪽.

 종래 선문서계는 ‘皇’·‘勅’과 같은 용어를 비롯하여 위협적인 언어가 구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이것의 접수를 거부했으며, 이는 근대적 외교관계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조선외교의 완고함 등으로 설명되어져 왔다.668)田保橋潔, 앞의 책, 149∼182쪽. 물론 이것은 일본측이 제시한 견해였으며, 한국 학자들도 그렇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위의 서계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는 것 이상의 문제를 담고 있었다. 대마번주의 외교칭호를 일방적으로 변경했으며, 문서의 날인은 조선에서 받아간 圖書 대신 명치정부의 新印을 사용했고,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私交’로 표현하여 ‘以私害公’할 필요가 없다는 등, 종래의 외교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이었다. 대마번과의 교섭에 임한 동래부의 훈도 安東晙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보복조치로 갑작스레 무역을 단절(撤供撤市)하지는 않았다. 고종 5년(1868) 12월 대마번에서 대수대차사가 파견되었을 때도, 동래부에서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 오히려 대마번을 회유하는 한편, 전례에 어긋난 선문서계의 개찬 및 대차사 서계의 퇴각을 요구하였다.669)≪日省錄≫고종 6년 12월 13일.

 대마번은 조선의 改撰 요구를 무시한 채 조선의 거절 답신을 요구하였는데, 명치정부에 대해서는 서계 전달의 어려움을 강조하여 보상을 받아내고,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 조정의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특혜를 받아내려는 계산이었다.670)玄明喆, 앞의 글(1996), 261∼263쪽.

 조선이 서계 개찬을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1869년 5월 13일 외국관이 대조선외교를 접수해야 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였다.671)≪朝鮮外交事務書≫1, 201∼203쪽. 대마번은 보상이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외국관이 대조선통교를 접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에 대해 반발하는 한편, 교섭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조선의 고루하고 완고함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과의 교섭은 대조선 통교기술을 축적해 온 대마도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672)≪朝鮮外交事務書≫1, 205∼249쪽.

 일본측 서계의 접수를 둘러싼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1869년 6월 명치정부가 版籍奉還을 허가한 것을 계기로 대마번주가 嚴原(이즈하라)藩의 지사가 되고, 7월에는 외국관이 外務省으로 개편되었다. 신정부로서 자신을 갖게 된 명치정부는 마침내 대마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섭을 부정하고 외무성 관리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1869년 9월 太政官은 대마번에 조선과의 교제는 일체 외무성 소관이므로 대마번의 宗氏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673)≪日本外交文書≫1(韓國篇), 147쪽;≪朝鮮外交事務書≫1, 255∼261쪽.
물론 이 때(1869. 9. 18) 메이지정부는 대마번을 무마하기 위하여 35,850石을 지급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대마번의 반발이 있었으나, 명치정부가 처음으로 파견한 외무성 관리 森山茂(모리야마 시게루)·佐田白茅(사다 하쿠보) 일행이 1869년 11월부터 1870년 3월까지 대마도 및 부산에 직접 파견되어 대마도 처리에 대한 전망 등을 조사하였다.674)≪朝鮮外交事務書≫1, 438∼447쪽. 이들 외무성 관리는 조선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외무성에 보고했는데, 좌전백모는 외무경(澤宣嘉)에게 30개 대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다.675)≪日本外交文書≫1(韓國篇), 239쪽. 외무성 관리가 귀국한 후 1870년 5월에는 주일 독일공사 브란트가 부산항 시찰을 위해 부산 해역에 나타났다. 동래부사 정현덕·부산첨사 조의현은 독일 군함에 타고 있던 일본인이 대마번 통역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이는 조선 정부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정에서는 곧 대책회의를 열어, 대마도에 엄중한 항의서를 보냈으며,676)≪承政院日記≫고종 7년 5월 12일. 위정척사가 강화되는 가운데 ‘倭洋一体’라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외무성 관리 좌전백모 등이 청에서의 天津사건을 계기로 다시 조선을 위협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명치정부는 征韓을 위해 군대·군함·군자의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였다.677)≪朝鮮外交事務書≫1, 587∼592쪽. 일본 내에는 전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으며, 외무성 관리로부터는 대마번의 처리 및 왜관 접수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인 의견이 제시되었다.678)≪日本外交文書≫1(韓國篇), 249∼250쪽(外務權大丞 柳原前光의 ‘朝鮮論稿’).

 그러나 외무성은 왜관 통역 浦瀨(우라세)의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조선측이 전쟁보다는 합리적인 외교를 원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외무성 관리 吉田弘毅를 파견하여 조선과 교섭할 것을 결정하였다.679)≪朝鮮外交事務書≫1, 593∼595쪽. 외무성 관리 일행은 조선에 도착 후 훈도와의 면회를 요청했으나, 훈도는 대마번의 절충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대마번이 명치정부의 조선 침입론을 강조하고 절충역으로서 대마번의 존재를 조선에 인식시키려는 책략의 결과였다고 추측된다.680)玄明喆, 앞의 글(1996), 261∼262쪽.

 일본정부의 대조선정책은 1871년 辛未洋擾을 계기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외무성 관리 吉岡弘毅에게 내린 지침에는 조선과 미국과의 충돌에 일본이 말려들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개국되리라고 예상하고, 그 때 일본이 불리함을 초래하지 않도록 조·미 마찰을 방조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이 단계에 오면 일본은 조선보다는 미국 등의 서방을 우호관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조선과 서양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을 중재하는 역할이 아니라, 서양 열강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의 외교 경험을 축적해 가면서 조선과의 관계도 서구 외교 원리를 이용하여 풀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아직까지 대마번이 대조선 외교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구막부시대 이래 교린관계하에서의 일상적인 교류는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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