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1) 조선과 서세동점

1) 조선과 서세동점

 유럽과 동양의 직접적 관계는 15세기 말 가마(Vasco da Gama, 1468∼1524)의 인도 항로 개척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598년 5월 인도의 서해안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여 ‘그리스도교도와 후추’를 찾고자 했다. 그 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의 고아(Goa)를 거점으로 하여 사라센 상인들을 배제하고 동남아시아의 후추에 대한 독점적 무역을 시작했다. 그들은 1517년 중국 廣州에 도착한 이후 중국 및 일본과의 밀무역에 종사했고, 1556년 마카오(澳門)에 거주권을 얻어서,695)Parry, ibid., p.161. 마카오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양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재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중상주의 단계에 놓여 있었던 그들의 무역활동이 인도나 중국사회의 변화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 내지는 상인들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도 동양에 도착했다. 당시 동양 포교의 선두 주자는 예수회(Societas Jesu)였다. 예수회 선교사인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가 1549년 일본 鹿兒島에 도착해서 활동하다가, 1552년 중국 廣東 上川島에 상륙한 이후 그리스도교의 동양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직후 사망했지만, 뻬레즈(F. Perez)·떽세이라(Emmanuel Texeira)·삔또(Andrea Pinto)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1563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그리스도교가 선교되기 시작했다.696)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s de Chine 1552∼1778, Chang-hai ; Imprimerie de la Mission Catholique, 1932, pp.1∼10. 그 후 1583년에는 마떼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도착하여 저술활동 등을 통해서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했다. 리치의 뒤를 이어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지식층에 접근해 갔고, 淸 조정에 仕宦함으로써 유럽문화를 청에 전파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청과 歐羅巴 두 문화를 조화시킨 淸歐文化를 이루어 갔다. 이 상황에 힘입어 중국에서는 조선이 청구문화 내지는 西學·西敎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중국에 입국했던 선교사들은 조선 포교의 가능성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관한 지식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조선의 실상을 유럽에 알려 주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한편 스페인의 경우 마젤란(Ferdinando Magellan, 1480?∼1521)의 함대가 세계일주 항해를 완수한 것은 1522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태평양함대가 필리핀의 루존(Luzon)을 점령한 것은 1571년이었다.697)Macgregor, ‘Europe and East’,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ol.Ⅱ, London : Cambridge Univ. Press, 1965, p.621. 그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루존에 정착한 福建 상인들과 함께 중국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 스페인 계통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에 입국하여 그리스도교를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비에르의 뒤를 이어서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를 선교했고, 1580년에는 신도수가 10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집권하자 1587년에는 금교령이 내려진 바 있다. 그 후 禁敎와 布敎가 번갈아 시행되었다가 1614년에는 德川家康(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서 전면적인 금교령이 강행되었다.698)Crasset, Histoire de l'Eglise du Japon, tome premier, Paris ; François Montalant, 1715, p.27 et passim.. 그 후 스페인 상인들은 동아시아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밀려나게 되었고, 스페인 계통의 선교사들도 일본에서의 선교를 금지당했다. 그러나 16세기 초엽 이들은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관심이 유럽사회에 전달되어감에 따라서 조선의 존재가 알려질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대신해서 유럽의 신흥세력인 네덜란드와 영국·프랑스 등이 아시아에 등장하는 새로운 사태가 전개되었다. 영국은 1600년에 東印度會社를 설립하여 인도 각처에서 상업상의 거점을 확보했다. 네덜란드는 1602년에, 그리고 프랑스는 1664년에 각기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통상과 해군력을 강화시켜 나갔다.699)李鉉淙,<朝鮮과 西勢東漸>(≪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20쪽. 이러한 과정에서 17세기 이후 인도양과 東中國海를 거쳐 북진해 올라오던 네덜란드·프랑스·영국의 세력들은 한반도를 향해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네덜란드의 船人들이 조선에 표착하게 되었고, 18세기 이래로 영국과 프랑스 등의 함선들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여 조선의 해안을 측량했고, 간혹 불법적으로 상륙하여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정부는 극동에서 군사적·정치적 이권을 얻기 위해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특별 함대를 중국에 파견했다. 프랑스는 1844년 중국과 黃埔條約을 체결한 이후 극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조선을 향해서 북진해 올라오는 세력과 함께 조선은 17세기 이래로 남진해 오던 러시아 세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는 16세기 후반부터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의 광대한 지역를 병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32년에는 레나강변에 야쿠츠크(Yakutsk)城을 수축하고 東進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1643년에 야쿠츠크 주둔관 골로원은 뽀아꼬브를 파견하여 중국 흑룡강 지구를 침략했다. 1651년에는 하바로프(E. Khavarov)가 흑룡강 중류의 北岸 야크사를 점령하고 보루를 수축했다. 이들은 중국에 대한 약탈을 감행했으므로 청 조정에서는 1654년과 1658년에 이들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 조선의 원정군도 참여했다. 그 후 1689년 청과 러시아는 니부추에서 국경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고,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150여 년 동안 양국 간의 안정이 유지되었다.700)김구춘,≪짜리 로씨아의 대외침략과 팽창≫(延邊:延邊人民出版社, 1992), 56∼60쪽 참조.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의 봉건농노제가 공고해짐에 따라 뾰트르 1세의 대외침략과 팽창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동쪽으로 중국과 일본을 침략하여 동해를 통제하고 태평양에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가 파견한 꼬즈렙스끼 원정대는 1713년 꾸릴열도에 이르렀다. 그 후 안나 여왕 때 베링이 조직한 제3탐험대는 뽀스빤버그의 인솔 밑에 1738년부터 1742년 사이에 세 차례에 깜차카반도에서 꾸릴열도를 거쳐 일본 연해로 들어가 계속 남하하여 일본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1739년 6월 러시아의 함선이 처음으로 동해에 나타나게 되었다.701)김구춘, 위의 책, 46∼48쪽 참조. 러시아 함선의 동해안 출현으로 조선 봉건 정부는 이양선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켜 나가게 되었다.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西勢東漸의 물결은 여기에 그치지는 아니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구미제국의 동양 침략은 점차 노골화되어 갔다. 영국은 아편전쟁(1840∼1842) 이후 南京條約을 통해서 홍콩을 할양받았다. 1844년 중국은 미국 및 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맺었다. 1850년에는 영국과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 침공군을 파견했고, 영불 연합군은 천진을 거쳐서 北京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황제의 別宮인 圓明園을 파괴 약탈했으며, 1860년에는 北京條約을 체결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가 중국과 동등한 주권을 대표하면서 북경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 북경조약에 러시아와 미국도 참여하게 됨에 따라서 중국과 그 이웃에 있던 조선은 이들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702)高柄翊,<19世紀 後半의 東아시아 政勢>(≪한미수교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 한국위원회, 1982), 6∼7쪽.

 미국이 조선 연해에 자주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중엽부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 초엽 이래 동아시아와 통상교역을 확대하는 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34년에는 로버츠(Roberts)를 극동에 파견하여 통상증진 방안을 모색케 했을 때, 그는 “일본과 통상의 길을 트게 되면 장차 조선과도 교역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남겼다. 1845년 2월 프래트(Pratt) 의원은 하원에서 일본과 조선에 통상 교역의 길을 트자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은 극동 여러 나라와 정식으로 수교관계는 없었지만 1820년대 초부터 일본 북해도 근해에서 포경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미국의 포경선들은 동해에도 출현했고, 조선에 표착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동아시아 내지 태평양에 대한 군사적 哨戒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822년에는 미국의 전통적 ‘포함외교정책’(gun-boat diplomacy)을 실천하고 있던 지중해함대의 요원들을 기초로 하여 ‘아메리카 태평양함대’가 창설되었다.703)金源模,≪近代韓美交涉史≫( 弘盛社, 1979), 18쪽. 이후 그들은 아시아에 대해서도 포함외교정책을 통해서 자국의 통상을 보호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854년에는 페리(Perry)에 의해서 일본이 開港되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시워드(W. H. Seward) 국무장관의 팽창정책 아래 해외시장의 개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704)金源模, 위의 책, 115쪽. 미국이 이와 같이 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해 나감과 관련하여 조선과 미국의 상호 만남은 점차 빈번해져 가고 있었다.

 조선은 17세기 북진해 오던 라틴계 유럽의 세력과 간접적인 접촉을 가졌고,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에는 프랑스 및 영국과 만났다. 그 후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동진해 오던 유럽세력, 남진을 거듭하는 러시아 세력, 그리고 서진해 오던 미국의 세력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이 서세동점의 물결이 밀려드는 과정에서 17세기 조선이 표착인을 통해서 직접 조우하게 되었던 서양은 우선 동인도회사를 배경으로 한 네덜란드였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19세기에 조선은 그들의 상인과 해군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이에 앞서서 淸歐文化의 수용을 통해 조선에서 형성된 서학 내지는 천주교 신앙은 서세동점의 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 이후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인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던 ‘서양’은 조선의 전통 가치에 離背되던 천주교 신앙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 19세기 후반 개항에 이르기까지 서세동점의 와중에서 조선은 서양에 대한 긍정적 인식보다는 부정적 판단을 하게 되었고, 鎖國 自守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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