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2) 조선 선교의 시도

2) 조선 선교의 시도

 조선과 서양의 관계는 유럽인 선교사들에 의한 그리스도교 선교의 시도를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17세기를 전후하여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동양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유럽 선교사들의 노력은 조선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직접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조선 선교를 위한 시도는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켜 주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세워진 이후 중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의 조선교회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 갔다. 1831년 朝鮮代牧區가 설정되어,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를 담당함으로써 조선인과 서양 선교사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보다 앞서 동양에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에도 이를 전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우선 1576년 정월 마카오 교구에 내린 교황의 大勅書(bula)에서는 교구의 관할 구역을 ‘중국·일본과 인접 지역’으로 규정하여 막연하게나마 조선이 그 관할 지역 안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659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南京代牧區에 부속시키고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임했다. 즉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o Ⅺ)는 1679년 중국출신 도미니꼬회 선교사인 그레고리오 로뻬즈(Gregorio Lopez) 신부를 ‘남경과 조선 및 인근 省’의 代牧으로 임명했다.705)≪壬辰亂史 國外資料≫(서울大 동아문화연구소, 1972), 62쪽.
Breve Notizia della Corea e del suo Christianismo nel Secolo ⅩⅥ e ⅩⅦ, cap. Ⅱ, p.188. “vicaria apostolico di Nankino, della Corea e d'altra provincie confinanti.”
그리고 1690년 교황청이 남경대목구로부터 북경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북경대목구의 관할로 넘어갔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처럼 일찍부터 조선 선교를 지향하면서 그 관할권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706)Manuel Teixeira, A Missão da Coreia, Macau : Tipografia Marsul, 1982, pp. 22∼23.

 그런데 조선 선교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일본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비렐라르(Gaspar Vilelar)에게서였다. 그는 1571년 10월 6일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기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서 가는 길을 방해받아 입국하지 못했음을 전하고 있었다.707)朴哲,≪예수회 신부 세스뻬데스≫(西江大, 1987), 42쪽.
≪耶蘇會士 日本通信≫(村上博士譯, 渡邊博士註) 下, 217∼218쪽.
山口正之,<耶蘇會 宣敎師の入鮮計畫>(≪靑丘學叢≫ 3, 1931), 138쪽, ‘1571년 10월 6일자 편지’ 참조.
그의 조선 입국이 불가능했던 까닭은 당시 戰國時代에 처해 있던 일본의 국내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고자 한 시도는 세스뻬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그는 小西行長(코니시 유키나가)의 개인적인 초청에 의해서 1593년 12월 27일에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했고, 熊川에 있던 고니시의 진영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일본군 가운데 천주교 신자였던 2,000여 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하여 聖事를 집전했다. 그가 조선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고 조선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加藤淸正(가토오 기요마사)의 방해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면서,708)朴哲, 위의 책, 42·50·92쪽. 그는 귀환 도중 對馬島 島主의 집에 피랍되어 머물러 있던 조선인 소년 한 명에게 빈센떼(Vincente)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빈센떼는 일본의 신학교를 마치고 傳敎師가 되었으며,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서 1614년 북경에 가서 조선 입국의 길을 모색하다가 1620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709)Luis de Guzmán, Historia de las Misiones de la Compãñía Jesús en la India, en la China y Japón desde 1540 hasta 1600, Bilbao, 1891, pp.596∼597.
朴哲, 위의 책, 91쪽.
그리고 이 때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피랍되었던 조선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에 영세 입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의 그리스도교 형성에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710)메디나,≪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朴哲 譯, 西江大, 1989) 참조.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한편, 이 책의 제2부에는 1566년 이후부터 169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작성된 한국천주교사 前史에 관한 서양자료들이 발췌 번역되어 있다. 이 자료는 그 前史의 이해를 위해서 일정하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목표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어 갔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과 주변 국가의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교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는 1599년 2월 6일 南京에서 코리아(Coria)에 관해서 짧게 언급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바 있었다.711)Matteo Ricci, Fonti Ricciane Ⅱ, pp.38∼39.
矢澤利彦,<マッテオ·リッチと文祿慶長の役>(≪日本歷史≫ 70, 1954), 14∼19쪽.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선교는 17세기 초엽에 시도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비렐라나 마테오 리치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 이외에 도미니꼬會 선교사들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도미니꼬회 선교사로서 스페인의 까스띨(Castil) 지방 출신인 후안(Juan)은 1601년 필리핀에 도착하여 말레이(Malay)語를 익히다가 조선 포교의 최적임자로 선발되어, 동지 두 사람과 같이 먼길을 항해하여 1618년 조선에 도착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국이 거부되어 다른 두 사람은 그대로 필리핀으로 회항하고, 후안은 단신으로 일본에 상륙했다가 곧 체포되어 히젠(肥前) 오오무라(大村)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619년에 그 곳에서 옥사했다는 기록도 전한다.712)E. Papinot, Dictionaire d'Histoire et Geographie du Japon, Yokohama, 1906. 山口正之, 앞의 글, 140쪽 참조. 여기에서는 그들이 조선에 도착했지만 관리들의 거부로 상륙과 선교가 불가능하자, 2인의 신부는 마카오로 귀환하고 후안 신부는 일본에 머물다가 도쿠가와의 그리스도교 박해 과정에서 1619년에 오오무라에서 순교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메디나, 앞의 책, 61∼65쪽에서는 조선인 피랍자 또마스와 함께 산또 도밍고 신부가 조선에의 입국을 시도하면서 일본에 머물다가 1619년 오오무라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서양선교사들이 조선에 대한 선교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금지되어 가던 17세기 전반기에 있어서, 중국에 입국했던 예수회 계통의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시도해 보고자 했다. 이러한 첫 시도는 明末 徐光啓(1562∼1633)와 삼비아시(François Sambiasi, 畢方濟, 1682∼1649)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서광계는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자신이 조선에 파견되는 請兵使臣이 될 경우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고 조선에 들어가 개교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청병 자체가 좌절되면서 전교 계획도 무산되었다.713)張貞蘭,<昭顯世子 硏究에 있어서의 몇 가지 問題>(≪敎會史硏究≫ 9, 1994), 191쪽. 이러한 서광계의 계획은 대략 1619년경에 수립되었던 일이고, 이 계획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롱고바르디(Longobardi, 龍華民, 1559∼1654)였다고 한다.714)메디나, 앞의 책, 67쪽.

 그 후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가운데 조선 선교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추진했던 인물은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조선의 昭顯世子를 만났고, 조선에 대한 선교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소현세자는 1637년부터 청의 인질이 되어 심양에 머물다가 청의 入關 이후 順治 황제를 따라서 北京에 입경했다. 그는 1644년 9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약 70여일 간 북경에 체류하면서 샬과 교류하였다. 샬은 소현세자가 가지고 있던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대한 관심과 호의 그리고 샬 자신의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과 천주교 선교에 대한 열의를 그의 회고록에서 서술해 주었다.715)山口正之,<昭顯世子と湯若望>(≪靑丘學叢≫ 5, 1931), 101∼117쪽.
張貞蘭, 앞의 글, 192∼195쪽.

 샬의 전교 노력은 프란치스코회의 산따마리아(Antonio Caballero de Santa Maria) 신부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즉 1650년과 1652년 두 차례에 걸쳐서 산타 마리아 신부는 샬의 권고에 따라서 북경으로부터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고 샬은 1651년 10월 20일자로 上海에 있는 브랑까띠(F. Brancati)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산따 마리아 신부가 조선에 대한 전교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716)張貞蘭, 위의 글, 191∼198쪽. 샬은 산따 마리아 신부에게 필요한 모든 공식 서류를 갖추어 주고 조선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그에게 알려 주며 그의 조선입국을 주선했지만, 이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샬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한 입지적 조건이 비교적 유리한 산동반도를 통해 해로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세기 당시는 조선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서 입국하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던 반면에 조선은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관한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즉 일본의 그리스도교가 幕府로부터 탄압받고 있던 사실은 인조 16년(1638)과 18년에 조선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21년·22년·26년 및 효종 원년(1650년)에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일본인 천주교도의 捉送을 요구해 왔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서 조선은 1644년 전라도 진도에 표착한 荒唐船을 포착하여 왜관에 송치한 바 있는데, 선인 61인 중 5인이 천주교인이었다 하여 對馬島主가 간곡한 謝書를 보낸 바 있었다. 그 후에도 대마도주는 그리스도교를 경계하는 공문을 현종 7년(1668년)에 조선의 예조참판에게 보낸 바가 있었다.717)≪顯宗實錄≫권 12, 현종 7년 10월 경오.
≪同文考略≫ 권 15.
≪交隣漂風≫현종 7년 12월.
≪顯宗改修實錄≫권 16, 현종 8년 2월 신미.
≪仁祖實錄≫권 36, 인조 16년 3월 병자·권 41, 인조 18년 9월 정유·권 45, 인조 22년 5월 무신·권 45, 인조 23년 3월 신미·권 49, 인조 26년 5월 경술.
≪孝宗實錄≫권 3, 효종 원년 2월 임술.
金良善,<仁·孝 兩朝 蘭人의 漂到와 韓中日 三國의 外交關係>(≪鄕土서울≫ 30, 1967), 60∼63쪽.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조선은 17세기 전반기 일본을 통해서 ‘耶蘇宗門’의 위험성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리스도교 문제를 현실적 위험으로 파악하지는 않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세운 바도 없었다.

 청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모색하고 있었다. 즉 1684년에는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였던 피아밍고(Antoine Thomas Fiamingo)가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좌절된 사례도 있다.718)Antoine Thomas Fiamingo SJ, Traités sur Quelques Points Importants de la Mission de la Chine, Paris, 1701.
Breve Notizia della Corea e del suo Christianismo nel Secolo ⅩⅥ e ⅩⅦ, cap. Ⅱ, 1972.
≪壬辰亂史 國外資料≫(서울大 동아문화연구소), 51쪽.
레지스(Regis) 신부를 도와서 중국 지도를 작성했던 예수회 선교사인 프리델(Xavier Fridell, 費隱, 1673∼1743)은 1712년경에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조선지도를 작성했다.719)Pfister, ibid., p.608. 또한 중국지도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던 자르뚜(Pierre Jartoux, 杜德美, 1668∼1720) 신부나 고빌(Antoine Gaubil, 宋君榮, 1689∼1759) 신부도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720)崔奭祐,<韓佛條約 締結 以前의 韓佛關係>(≪韓佛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6), 5쪽.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조선 교회는 정조 8년(1784) 李承薰을 비롯한 조선인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로 창설되었다. 정조 14년 이후 북경교구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조선교회의 성립을 보고 받은 로마 교황청에서는 정조 16년 4월 조선을 구베아의 ‘개인적 보호와 지도’에 맡기게 되었다.721)崔奭祐,< 李承薰 關係 書翰 資料>(≪敎會史硏究≫ 8, 1992), 166쪽. 그리고 순조 31(1831)년에는 朝鮮代牧區(Vicariatus Apostolicus de Corea)를 설정하고 빠리외방전교회(la Société des Missions­Étrangères de Paris)에 조선에 대한 선교를 위임했다.722)崔奭祐,≪韓國敎會史의 探究≫ Ⅱ(韓國敎會史硏究所, 1991), 220쪽. 프랑스 선교사들은 순조 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지리상의 발견은 그리스도교 선교의 확대를 가능하게 했고 16세기 중엽 이래 유럽의 선교사들은 일본과 중국에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지에 인접해 있는 조선의 선교에도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바 있다. 그리고 로마 교황청에서도 마카오 교구나 남경교구 또는 북경교구를 설정할 때 조선에 대한 선교를 전망하여 조선을 그 교구의 관할 지역 안에 포함시킨 바 있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 가운데 조선에 대한 관심은 선교사를 통해서 표출되고 있었다. 조선과 서양과의 초기 관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점은 서양의 탐험가나 상인들에 의해서 활발한 접촉이 시작되었던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분명히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16세기 후반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시도하던 선교사들의 노력을 매개로 하여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