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3) 서양인과의 접촉

3) 서양인과의 접촉

 조선 후기 17세기를 전후하여 서양인들의 동양진출 과정에서 중국과 나카사키를 오가던 서양 선박들이 난파하여 서양 선원 등이 조선에 표착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표착한 서양인들과 조선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서 조선인들은 서양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19세기의 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목적으로 한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로써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서양인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했다.

 조선에 상륙했던 서양인에 관한 최초의 언급으로는 선조 15년(1582) 馬里伊가 제주도에 표착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곧 明으로 송환되었던 기록이 있다. 당시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동양의 해상에서 활동하던 시기이므로 그의 국적은 포르투갈로 추정된다. 물론 이보다 앞서서 포르투갈인들의 동방 항해기에는 조선 연안에 표착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기도 하지만, 국내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서양의 표착인으로서는 마리이를 들 수 있다.723)洪以燮,<서울에 왔던 歐美人>(≪鄕土서울≫1, 1957), 120쪽.

 또한 상술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이 진행중이던 선조 26년 말 세스뻬데스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바 있었지만, 그는 조선인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세스뻬데스의 경우와는 달리 17세기에 접어들어서 서양인들의 조선 표착이 수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17세기의 표착인 가운데 그 첫번째 사례로서는 선조 37년 남해안에 표착한 후안 멘데스(Juan Mendes)를 주목할 수 있다. 스페인 출신인 그는 캄보디아에서 일본의 長崎(나가사키)로 가기 위해서 일본 함선에 승선했다가 풍랑으로 인해 조선 연해에까지 밀려왔다. 그 함선은 조선 수군에게 나포되었고, 그는 黑人 從者 2인 및 明人들과 함께 명으로 송환되었다. 그들의 송환에 관한 문제를 주제로 하여 조선은 明 및 일본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으며, 당시 조선사회에서도 그들에 관한 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724)朴泰根,<돌아오지 않은 장군의 배>(≪역사춘추≫, 역사춘추사, 1989) 참조.

 한편 동아시아 무역에 있어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에는 네덜란드 선인들이 표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표착한 서양인과 조선의 본격적 조우는 朴淵(朴延)을 통해서 이루어졌다.725)李仁榮,<南蠻人朴淵攷>(≪京城帝國大學 史學會報≫ 7, 京城帝國大學, 1935), 35∼43쪽.
Gari Ledyard, The Compatriot Jan Janse Weltevree, The Dutch Come to Korea, Seoul : Taewon, 1971, pp.25∼37.
후술하게 될≪하멜漂流記≫에 의하면 박연의 본명은 얀 얀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1595∼?)였다. 네덜란드 북부 리프(Rijp) 지방 출신으로서 32세였던 그는 16인의 네덜란드인 선원과 함께 중국 아모이 인근에서 정크船을 타고 타이완으로 항해하던 중726)Gari Ledyard, ibid., pp.26·37. 逆風을 만나서 인조 5년(1627) 경상도 慶州 부근 바다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벨테브레는 디레크 히아이베르쓰(Direk Gijsbertz) 및 얀 피에테르츠(Jan Pieterz)와 함께 淡水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短艇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가 경주의 주민들에게 발견되었다. 경주의 주민들은 그들을 동래 왜관으로 보내어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나가사키로 보내려 했지만, 왜관에서는 그들이 일본 漂人이 아니라고 하여 접수를 거부했다.727)≪接待倭人事例≫ 현종 8년 정월 10일.
金良善, 앞의 글, 56쪽.

 이에 그들은 인조 6년 서울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에 군사로 편입되었다. 박연은 降倭와 漂漢人으로 구성된 부대의 將이 되었다. 그들 3인은 병자호란(1636) 때에 참전했다가 박연만이 살아남고 나머지 2인은 전사했다.728)金良善, 위의 글, 35쪽. 그는 조선인 처와 함께 살며 1남 1녀를 두었고 조선에서 終身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자국의 기후·풍습·법률·기상학 등에 관한 지식을 말한 바 있었다.729)鄭載崙,≪閑居漫錄≫ 권 2.
金良善, 위의 글, 36쪽.
또한 그는 “兵書에 밝아서 火砲를 제조하는 데에 상당히 정교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그 기능을 발휘하여 紅夷砲의 제도를 전했다”라고 되어 있다.730)尹行恁,≪碩齋稿≫ 권 9.
金良善, 위의 글, 37쪽.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에도 問情했던 사람이 바로 박연이었다. 그는 26년 이상에 걸친 조선 생활을 통해서 조선에 서양의 풍속을 전하고 서양의 화포 제조술을 소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를 통해서 조선인들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일보 진전되어 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연이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던 하멜(Hendrik Hamel, 1632∼?) 일행을 問情한 것은 효종 5년(1654)이었지만, 이들 일행이 제주도 남해안 和順浦에 표착한 것은 효종 4년이었다. 하멜은 효종 4년 7월 말 스페르베르號(The Sperwer)에 승선하여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서 그 해 8월 15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같이 승선해 있던 64명의 선인들 가운데 28인은 상륙을 시도하던 중 생명을 잃었고, 36인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효종 5년 서울로 소환되어 2년간 억류 생활을 하다가 효종 7년에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현종 4년(1663)에는 생존자 22명이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그들 가운데 여수에 수용되어 있던 8명이 현종 7년 9월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탈출할 당시 생존자는 모두 16명이었는데, 탈출에 성공한 하멜 일행은 현종 9년 암스텔담에 귀환했고, 조선에 남아 있던 나머지 8명도 일본의 요청에 따라서 현종 9년 나가사키로 송환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731)하멜,≪하멜漂流記≫ (李丙燾 譯註, 一潮閣, 1954), 11∼16쪽.

 이들은 조선에서 14년간에 걸쳐서 억류생활을 하면서 초기에는 李浣의 휘하에 있던 박연의 지휘 아래 훈련도감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 소환된 직후 당시인들의 호기심으로 인해서 상당한 후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전라도로 이송되어 군역을 지거나 그 밖의 각종 잡역에 시달리면서 감금이나 태형을 당하기도 했고, 구걸로 연명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들의 생활을 볼 때, 그들은 주로 전라도의 하층민들과 함께 생활했던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서양의 존재를 17세기 조선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조선인들이 서양의 문명을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다. 成海應(1760∼1839)은 그들이 曆法과 醫方에 정밀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표착 당시 선밖 안에 있던 대략 50여 종의 물건 가운데 千里鏡·琉璃鏡·모래시계 및 중국의 것과는 다른 각종 관측기구 등과 銅錫白金을 쓴 일상용품 등에 관해서 설명하고, 선박의 크기와 견고성을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732)成海應,<鄂羅斯>(≪硏經齋全集≫ 外集 5 筆記類, 旿晟社), 269∼270쪽. 이러한 기록을 살펴볼 때 17세기 조선사회에서는 그들을 통해서 서양 문명의 한 측면에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하멜과 함께 조선을 탈출했던 마태우스 이보켄(Mattheuse Ibocken)과 베네딕투스 클레르끄(Benedictus Clercq)도 조선의 지형과 풍습 및 조선어 어휘에 관한 증언을 남겨 주었다.733)金昌洙 譯,<朝鮮王國見聞記>(≪東方見聞錄·하멜漂流記≫, 乙酉文化社, 1983), 382∼395쪽.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된 이후 러시아의 사절들은 북경을 방문했고 그 곳에서 그들은 조선인을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인이 조선인을 북경에서 만난 기록으로는 순조 21년(1821) 당시 북경에 주재하던 러시아영사 랑게(Lange)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랑게는 1720년 러시아를 방문했던 러시아 전권대사 이즈마일로프(Izmailov) 대사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에 북경에 체류시켰고, 그는 17개월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러시아 정부의 훈령에 따라 조선의 정치·외교·무역에 관한 상세한 정보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러시아 정부는 자국인이 분석한 조선에 관한 본격적인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734)朴泰根,<러시아의 동방경략과 수교이전의 한러교섭>(≪韓露關係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20∼22쪽.

 하멜 일행이 표류한 이후 한동안 서양인의 표착관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순조 원년년에는 이국인 5인이 제주도에 표착했고, 관례에 따라서 이들을 북경으로 송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북경에서도 그 국적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원래 표착했던 제주도로 다시 還逐되었는데 이들은 늘 말하기를 자신의 나라가 ‘莫可畏’라고 했다 한다.735)洪以燮,<朝鮮後期海洋史>(≪洪以燮全集≫ I, 延世大 出版部, 1994), 459쪽. 이러한 기록에 입각해 볼 때 그들이 마카오에 근거를 두고 있던 포르투갈 계통의 사람들로 추정된다.736)洪以燮,<鄭東愈의 晝永編에 보이는 異國語에 就하여>(≪洪以燮全集≫ V, 延世大 出版部, 1994), 202∼212쪽. 그러나 이들에 관한 자세한 후문은 전하지 않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미국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표착했다. 즉, 철종 6년(1855) 6월에는 강원도 通川 앞바다에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즈號(The Two Brothers)에 탔던 선인 4인이 표착하여 2개월간 조선에 머물다가 청으로 송환되었던 일이 있다.737)金源模,<美國의 對韓接近 試圖>(≪한미수교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 한국위원회, 1982), 20∼21쪽. 또한 고종 3년(1866) 5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號(The Surprise)가 중국 芝罘를 출발하여 琉球로 항해하다가 난파되어 평안도 鐵山에 표착했다. 그 선원 8명이 구조되어 청으로 송환되었다.738)金源模, 위의 글, 105쪽. 이와 같이 조선에 표착한 선인들은 종전의 관례에 따라서 청으로 송환되었지만, 19세기 조선은 異樣船의 출몰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인과 서양인의 만남에 있어서 획기적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정조 8년(1784) 18세기 말엽에 조선에 천주교가 세워진 이후 상당히 강화되었다. 조선교회의 탄생에 관한 본격적 반응은 북경의 천주교 교구장이었던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나왔다.739)Alexander de Gouvea, De Statu Christianismi in Regnum Coreae Mirabiliter Ingressi.
<李承薰 關係 외국어 書翰 資料>(≪敎會史硏究≫ 8, 1992), 205∼244쪽.
그는 조선 교회의 탄생과 초기의 박해에 관해서 감격적인 글을 라틴어로 써서 1790년에 중국 사천 교구장으로 있던 마르탱 주교에게 보낸 바 있었다. 이 서한은 1798년에 영국에 전달되었고, 1800년에 프랑스어로, 1801년에는 이탈리아어로, 1808년에 포루투갈어로 번역되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혀졌다.740)崔奭祐, 앞의 글(1992), 167쪽. 이러한 과정에서 천주교를 매개로 해서 조선의 존재는 유럽사회에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803년 마리아노 로뻬스 삐멘뗄(Mariano Lopez Pimentel)은≪동아시아 신도들의 곤경≫을 저술하여 멕시코에서 간행했다. 삐멘뗄은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조선에서 천주교 신도들이 겪고 있던 각종의 곤경을 서술하면서, 이 책의 1/3 정도에서 신생 조선교회의 사정에 관해서 논했다.741)Mariano Lopez Pimentel, Tribulaciones de los Fieles en la Parte Oriental de la Asia, Mexico;Mariano Joseph de Zúñiga y Ontiveros, 1803, pp.2∼14. 이 책에서는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주요 자료로 활용하여, 먼저 조선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전파되어 신자수가 4천여 명에 이르고 있음을 특기했다. 그리고 尹持忠·權尙然의 순교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을 서술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 입국 초기에 있었던 지황·최인길·윤유일 등의 순교 사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박해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책에서는 조선교회의 순탄한 발전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742)趙珖 註釋,<東아시아 信徒들의 困境>(≪辛酉迫害硏究論文集≫, 韓國殉敎者顯攘委員會, 1997). 이 책이 간행된 때는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지 19년 이후의 일이며, 멕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누에바 에스빠냐의 중심도시였던 때였다. 이 책의 간행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존재, 나아가서는 조선의 존재가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본격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이 책의 간행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에서 일어나 사건이 불과 ‘19년’ 후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책으로 간행될 정도로 조선은 19세기 초엽에 이르러 세계에서 주목되는 존재로 변해 갔다.

 그리고 조선 교회는 19세기 3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우연히 조선에 표착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의도성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리고 비록 천주교 신도라는 제한된 인원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인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에 종사한 프랑스 빠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서한 및 보고서 등을 통해서 조선에 관한 사정을 본국 교회에 알려 주었다. 프랑스 선교사로서 조선에 입국을 시도했던 사람은 천주교 조선 代牧區의 초대 代牧으로 임명되었던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ère, 1792∼1835) 주교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內蒙古 지방에서 병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서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이 1836년 초에 조선에 입국했다. 그리고 헌종 2년(1836) 말에 샤스땅(Jacques Honoré Chastan, 1803∼1839) 신부가 입국한 데 이어서 헌종 3년에는 앵베르(Laurant Marie Joseph Imbert, 1796∼1839) 주교가 입국했다. 이들은 천주교의 선교에 종사하다가 헌종 5년 정부 당국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헌종 11년 이후에도 계속 입국했고, 헌종 2년 이래 고종 3년(1866)에 이르기까지 모두 20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선교했다. 이들 가운데 5인은 조선에서 병사했고, 3인은 고종 3년 박해의 과정에서 조선을 탈출했다. 그리고 12인의 선교사들이 헌종 5년의 박해와 고종 3년의 박해 과정에서 순교했다.743)Dallet,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Paris : Victor Palmé, tome Ⅱ, p.85 seq.
洪以燮, 앞의 글(1957), 129쪽.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의 일반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비밀리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인 신도들과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서양 문화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조선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17세기 전후 중국에 진출했던 서양인 선교사들과는 달리 천주교 신앙을 전수하는 데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날 중국에 진출했던 선교사들은 中華人으로부터 蠻夷의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시 중국 황실에서는 帝王之學으로 되어 있던 천문 역법에 관한 서양의 연구결과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서학사상과 함께 서양과학을 중국에 전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은 중국사회에서 지배층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진출할 당시에 조선 정부는 이미 천주교에 대한 禁令을 엄히 하고 있었고, 사변적 학문풍토가 강했던 조선의 사상계에 서양의 천문역법이 가질 수 있었던 비중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유럽 신학계의 선교방법론에 대한 경향도 직접 선교 중심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진출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서양 과학기술의 전달보다는 천주교 신앙의 전파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들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도 과학기술이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사상운동 내지는 사회운동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한편 이들의 활동은 당시 조선 국내에서 급격히 진행되던 사회변동과 점증해 가던 이양선의 출몰 등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집권층으로부터 대단한 경계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사회에서의 천주교 신앙과 선교사의 존재는 당시 지배층에게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요컨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선에 표착하였거나 잠입한 서양인을 통해서 조선은 서양과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추진시켜 가고 있었다. 조선 후기 서양인의 표착관계 기록으로는 16세기 말엽 마리이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세스뻬데스를 비롯한 일부 서양인들이 조선에 상륙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벨테브레나 하멜 등 네덜란드 선인들의 표착을 통해서 조선은 서양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서양 내지는 서양인이라는 이질적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잠입활동을 통해서 서양인의 존재가 조선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전반기 사회에도 서양인들이 조선 연근해를 점차 빈번히 항해하는 과정에서 표착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들 표착민은 관례에 따라 淸廷으로 송환되었지만 표착민의 잦은 출현은 조선과 서양의 관계가 상호 더욱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조선사회에 본격적으로 정착했거나, 지배층의 취향에 맞는 문화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서양인 내지 서양문화의 진면목을 이해하기보다는 표착선원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들의 저급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같은 서양인을 통해서는 그들의 반사회성 내지는 불법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의 지배층들은 서양에 대한 편견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의 개항이나 서양 문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저지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 점이 조선 후기 서양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조선이 파악하게 되었던 서양의 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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