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5) 서양인의 조선 인식

5) 서양인의 조선 인식

 777)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확인시켜 주는 여러 책자들은 주로 ‘명지대-LG연암문고’ 소장본들을 이용했다. 이에 謝意를 표한다.조선 후기 서양과 조선과의 관계는 상호 인식을 통해서도 검증될 수 있다. 이 상호인식은 직접적 접촉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접촉이 없이도 상대방에 대한 지식 내지는 정보의 확보를 통해서 그 인식은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대방을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이나 지식의 출처와 관련하여 인식의 특성에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서양 여러 나라의 인식은 직접 접촉을 통해서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밖에도 조선에 관한 많은 관찰기록이나 보고서 등의 출간을 통해서, 그리고 조선 자체에 관한 傳聞 증언의 수집을 통해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17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인식에서는 대략 세 갈래의 특징이 드러난다. 우선 첫번째로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서 즉 중국이나 일본 교회사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에 관한 지식 내지는 조선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주로 17세기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식 가운데 두번째의 경우는 각종의 표류기나 항해기, 탐사기록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중국 지리를 연구하던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진행된 조선에 대한 인식의 특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에 이어서 지도의 제작과정에서 표출된 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서양인 가운데 조선의 존재를 의식한 사람들은 포르투갈인 항해자들이었다. 그들이 고레스(Gores)라 부른 호칭은 琉球에 표착하여 살고 있던 조선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비정되고 있다.778)洪以燮,<Gores 試考>(≪洪以燮全集≫V, 延世大 出版部, 1994), 187∼201쪽. 그러나 조선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16세기 그리스도교 선교에 종사하던 선교사들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목표로 해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동아시아의 정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대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모두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인 선교사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첫번째 목적이었던 선교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당시의 현실적 정세 및 국가간의 전쟁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되었다. 즉 유럽의 선교사들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국가간의 전쟁과 그리스도교의 선교라는 두 가지 조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유럽인 선교사 가운데 조선에 관해서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비렐라(Gaspar Vilelar)였다. 일본에서 선교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1571년 친우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高麗’(Coray)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조선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교문제에 일정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조선의 지리적 위치로는 滿洲에 들어가는 길목임을 밝혀 주었고, 조선인을 백인종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전했다.779)村上博士 譯(渡邊博士 註), 앞의 책, 94쪽.
山口正之, 앞의 글(1931a), 137쪽, 1571년 2월 4일자 편지 참조.
또한 그는 조선인이 맹수의 수렵과 기마에 능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조선에 대한 자신의 선교열을 밝히기도 했다.780)村上博士 譯(渡邊博士 註), 위의 책, 217∼218쪽.
山口正之, 위의 글, 138쪽, 1571년 10월 6일자 편지 참조.
이상에서 서술된 내용은 매우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자료는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에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빌렐라의 조선에 대한 지식은 비록 부정확하고 미약했다 하더라도, 당시 일본에 나와 있던 예수회 계통 선교사들이 조선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에는 일정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조선에 대한 관심과 선교열이 있었기 때문에 1593년 임진왜란이 진행중이던 때 조선에 입국한 바 있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 신부도 조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에 대한 지리적 지식이 확보된 이후 여러 선교사들은 전란이나 왕조교체 등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여러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언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언급은 마테오 리치의 경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중국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주변국가의 정세에 대해서도 자신의 저술 속에서 언급하고 있었다. 즉 그는 1599년 2월 6일 남경에 도착하여 들은 임진왜란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의 關白이 사망한 후 일본군이 퇴각하게 되었고, 퇴각하던 일본군들도 큰 손해를 입었고, 이로써 코리아(Coria)에서의 잔인한 전쟁이 끝나서 중국이 전쟁비용의 부담을 덜게 되어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서술했다.781)Matteo Ricci, Fonti Ricciane Ⅱ, pp. 38∼39.
矢澤利彦,<マッテオ·リッチと文祿慶長の役>(≪日本歷史≫ 70, 1954), 14∼19쪽.
이 자료에서는 조선 선교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표시되지 아니했다.

 그리고 1598년 이태리어로 번역되어 로마에서 출판된 루이지 프로아의 ≪까바꼰도노의 죽음≫에서는 조선(Corai)과 일본의 전쟁 즉 임진왜란 과정에서의 조선과 중국·일본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782)Luigi Frois, Raggu della Morte di Quabacondono, Roma, 1598, pp. 4∼12. 한편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마르띠니(Martini)도 조선(Coraia)과 일본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조선인 피랍자들에 대해서 1605년도의 기록을 통해서 설명해 주었다.783)Martini, De Rebus Iaponicis, Indicis, et Peruanis Epistolae Recentiores, Antverviae, 1605, p.166·177.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중국과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남겼고, 17세기에 접어들어서 이러한 기록들은 유럽에서 연속하여 간행되었다. 17세기에 간행된 자료로는 1654년 마르띠노 마르띠니오(Martino Martinio)가 쾰른에서 간행한 ≪만주족 전쟁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1620년 이후부터 1630년에 이르는 동안 조선(Corea)과 후금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784)Martino Martinio, De Bello Tartarico Historia, Coloniae, Iodocum Kalcovium, 1654, pp.14∼25. 한편 1670년 빠리에서는 빨라폭스(Palafox)가 쓴 ≪滿洲族의 中國侵攻史≫가 간행되었다. 이 책에서는 중국에 있어서 明淸 교체에 관해서 서술하고 제3장에서 조선과 후금의 전쟁 즉 병자호란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조선의 참패상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은 세자가 인질이 되고 청의 조공국이 되었음을 말해 주었다.785)Palafox, Histoire de la Conqueste de la Chine par Tartares, Paris ; Antoine Bertier, 1670, pp.58∼61. 또한 1715년 크라쎄(Crasset)가 빠리에서 간행한 ≪일본교회사≫에서는 ‘朝鮮島(Isle de Corey)와 일본의 전쟁’ 즉 임진왜란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小西行長을 비롯한 일본인 그리스도교 신도의 동향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786)Crasset, Histoire de l'Eglise du Japon, tome premier, Paris ; François Montalant, 1715, pp.77∼83·624 et passim.

 이상에서와 같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조선에 관한 언급은 조선에 관한 지리적 위치를 유럽인들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사실과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초기에 참패한 바가 있다는 점들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 자료의 저자들은 17세기 전후 조선이 처해 있던 국제적 정세와 조선의 정치에 관해서 유럽의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에 관한 본격적 지식들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서술의 범위를 넘어서 조선의 풍습과 정치제도 등에 관한 언급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서술은 주로 항해기나 표류기 등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들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관한 서술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석 재정관이었던 요한 니위호프(Joan Nieuhof)가 집필하여 1665년에 암스텔담의 야곱 판 뫼르스 출판사에서 간행한 ≪中國記≫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중국에 2년 동안 체류한 경험과 관찰 기록에 근거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의 지리와 지형, 관습 및 산업에 대해서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서 8도로 나뉘어 있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음을 말하고 중국과는 달리 결혼 후 아녀자의 외부 출입도 용이하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조선의 우상숭배와 정령숭배를 이야기하였고, 특산품인 인삼과 금광에 대해서 관심을 표시했다. 그는 조선에는 모든 물자가 풍부하므로 외부와의 교역을 제한하고 있고, 만주족과 북방 제민족 간의 세력 다툼에 있어서 매우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기록했다.787)Joan Nieuhof, Deskription de China, Amsterdam;Jakob pan Mổrsen, 1665, p.178.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관한 본격적인 정보를 전해 준 것은 하멜(Hendrik Hamel)이었다. 그는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하여 1666년 조선을 탈출하여 고국에 귀환한 직후인 1668년 ≪네덜란드船 제주도 난파기≫와 ≪朝鮮國記≫를 암스텔담과 로테르담에서 동시에 간행했다. 이 책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조선왕국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유럽인들에게 길잡이의 역할을 해 주었다. 흔히 ≪하멜표류기≫로 불리는 ≪네델란드船 제주도 난파기≫는 난파된 이후 생존자들이 겪었던 여러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朝鮮國記≫에서는 조선의 지리적 위치와 인종적 특징 및 정치제도를 먼저 서술해 주고 있다. 이어서 조선의 군사제도와 조선인의 엄격한 정의 관념 등을 논하고, 사법제도와 형벌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조선의 종교와 주거생활 및 생활관습을 말하며, 언어와 문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은둔국 조선에 관한 가장 풍부한 자료를 유럽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출판된 직후 암스텔담에서 2판을 찍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었다. 그리고 1670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 간행되었고, 18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프랑스에서 세 번에 걸쳐서 새롭게 출판되었다. 이 책의 독일어 역본이 간행된 때는 1672년이었다. 영어본은 1704년에 간행되었고 그 후에도 이 책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번역본이 연이어 간행되었다.788)Gari Ledyard, the Dutch Come to Korea, Seoul ; Taewon, pp.17∼24. 이와 같이 17∼8세기 이 책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 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1678년에 이르러 조선의 존재는 러시아에도 알려졌다. 루마니아 지방 출신으로 청국에 파견되었던 러시아 대사 스빠파리(N. M. Spafarij)는 러시아로 귀환한 이후 ≪시베리아와 중국≫이라는 책자를 지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조선의 지리와 정치체제·풍속·물산 등을 기록한 바 있었다.789)朴泰根, 앞의 글(1984), 10쪽. 조선에 관한 정보는 이와 같이 17세기 상당히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18세기 말엽까지도 유럽사회에 있어서 조선에 관한 지식은 완전 보편화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1788년 빠리에서 간행된 ≪세계지리≫의 아시아 편에서 ‘조선’(Corée)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간단히 언급되고 지나가거나, ‘중국 만주의 島嶼’편에서 중국의 조공국가로서 조선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790)Géographique Universell, Paris ; Leclerc, 1788, tome Ⅱ, p.35 및 tome Ⅳ, p.120. 그리고 이 책자는 조선을 섬으로 인식하고 있던 데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종전의 낡은 자료에 근거를 두고 조선을 서술했다는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19세기 전후 영국의 항해가들의 새로운 탐사활동을 통해서 극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멜표류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각종의 항해기를 간행했다. 조선 연근해에 대한 영국인들의 항해기로는 1804년 런던에서 간행된 부로튼의 항해기를 들 수 있다.791)William Robert Brougton,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 2 Vols. London, 1804. 그는 1797년 10월 조선 연해를 항해한 바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 연해의 탐사 결과를 도판이나 경도·위도 등의 측정 자료를 기초로 하여 서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제주도에 관한 관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항해를 기초로 하여 그는 책을 저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1807년 프랑스 ‘海軍 및 植民地省’에서 번역하여 빠리에서 프랑스어로 간행되었다.792)Broughton, Voyage de Découvertes dans la Partie Septentrionale de l'Océan Pacifique, Paris ; Dentu, 1807, pp.219∼271. 이 책의 원본이 간행된 직후에 프랑스에서도 번역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유럽인들이 조선을 비롯한 북태평양 일대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에 관한 유럽인들의 지식은 1816년 영국의 멕스웰(Murry Maxwell)과 배실 홀(Basil Hall) 선장이 이끄는 알세스트號(The Alceste)와 리라號(The Lyra)의 항해를 통해서 더욱 풍부해졌다. 그들은 유럽의 선박으로서는 처음으로 황해에 대한 본격적 탐사 항해를 감행했다. 이 항해를 마친 이후 두 책의 항해기가 출간되었다. 그 첫번째 책은 1817년에 간행된 영국의 알세스트號의 船醫였던 멜리오드(M'Leod)가 집필했다.793)John M'Leod, 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 in Yellow Sea along the Coast of Corea, London ; John Murry, 1817, pp.38∼54. 그리고 두번째 책은 배실 홀이 1818년에 간행했다.794)Basil Hall,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Loo-Choo Island, London, John Murry, 1818, pp.1∼57. 이 책에서는 조선(Corea)의 경도와 위도를 정확히 측정하고 있으며, 조선의 풍습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 조선의 漢字音 등에 대해서 서술해 주었다. 특히 배실 홀은 조선인의 성품이 비사교적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 관리와의 면담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조선인의 의상을 매우 이상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조선인의 유모어 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지리적·문화적 특성에 대하여 통찰력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며, 조선 민중들의 역동성을 기록하기도 했다. 알세스트의 항해에 뒤를 이어서 1833년에는 영국 상선 로드 에머스트號(The Lord Amherst)가 조선연안을 탐사했다. 이 때 이 배에 동승했던 구츨라프 목사도 항해기를 남겼다.795)Charles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 Corea and Loo-Choo Island, London, 1834. 그도 이 항해기를 통해서 조선의 정치제도나 풍속 등에 관해서 서술해 주었다.

 이와 같은 항해기나 표류기 등은 직접적인 견문기록에 속한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견문을 통해서 조선에 관한 지식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중국에서 씌여진 조선에 관한 책자를 정리하여 조선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시도가 18세기 중국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어 나갔다. 그들은 중국 조정의 명에 의해서 천문지리를 연구하거나 중국의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레지스(Régis, 雷孝思, 1663∼1738) 신부와 뒤알드(de Halde) 신부의 기록이 중요하다. 레지스는 ≪조선에 관한 기록-조선에 관한 지리적 고찰≫을 남겼다.796)Regis, Memoire sur la Corée : observations géographiques sur le royaume de Corée. 이 책은 영국왕실에서 주관하여 간행한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자료총서인 ≪항해·기행기 신총서≫ 안에 英譯되어서 1767년에 간행되었다.797)A New General Collection of Voyage and Travels, Vol, Ⅳ, London ; Thomas Astley, 1767, pp.319∼329. 레지스는 1698년 중국에 입국한 이후 ≪皇朝輿地總圖≫를 제작한 바 있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지리학적 관심의 연장에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밝히려 했다. 그리고 17세기 조선의 풍습과 특산물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조선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선행의 소개서와는 달리 비교적 정확히 기록하고자 했다. 그는 압록강과 두만강 등 주요 하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전국의 지방행정제도가 8道와 府郡縣으로 나뉘었음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잘 생겼으며 온화한 종족이라고 보았다. 결혼시에 지참금이 없다는 점과 3년상에 관해서 서술해 주고 있다.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적 관습을 설명하기도 했으며, 유교가 중심적 사상임을 밝혀 주었다. 조선의 특산물로는 중국의 어떤 종이보다도 질기고 비싼 조선의 종이와 인삼 등을 들고 있다. 물론 그는 중국 正史에 기록된 3세기 당시 조선의 풍습을 17세기에 관한 서술과 혼재시켜 놓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지스의 기록은 당시 유럽인에 알려진 조선에 관한 지식으로서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서 하멜이 남긴 표류기와는 달리 레지스는 각종의 한문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서술해 줌으로써 하멜이 서술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새롭게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레지스의 기록은 뒤알드(de Halde)에 의해서 더욱 널리 소개되어 갔다. 뒤알드는 1735년 빠리에서 ≪중국사 개설≫을 간행했다. 뒤알드는 여기에서 중국과 더불어 조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레지스의 보고를 인용하여 조선의 지형과 국경지대 그리고 농경지와 특산물 등 지리적 특성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풍속 및 사회제도 등에 대해서도 설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조선 민족의 기원 및 중국과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해 주었다. 역사의 서술은 중국 정사에 나오는 조선에 관한 기록들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箕子의 東來와 위만조선, 한사군을 거쳐 고구려로의 발전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관구검의 침입, 隋唐과의 전쟁, 고려가 전개한 여진족·몽고족과의 전쟁을 서술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당대의 기록은 숙종 때 장희빈의 축출 과정까지를 정리해 주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 때문에 이 책은 18세기의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가장 권위있는 책이었다. 뒤알드의 이 책도 1761년에 영국에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798)Du Halde, Geographical Observation on the Kingdom of Corea, History of China, London ; Watt, 1761, pp.381∼428.

 1772년 프랑스 빠리에서는 들라뽀르뜨(Delaporte)가 ≪탐험가 프랑소와≫를 간행했다.799)Delaporte, le Voyageur François, Paris ; Gellot, pp.266∼298. 그는 이 책에서 조선의 정치·군사제도와 조선의 불교 등 종교, 조선의 喪祭禮 및 儒學과 가족제도, 지리적 특성과 특산물 등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히 소개해 주었다. 그는 당시까지 유럽에 소개되었던 동양 관계의 문헌 가운데 조선(Corée)에 관한 기사를 망라하여 이 책을 지었다. 그가 조선에 관해서 서술한 내용은 그 질이나 양적 측면에 있어서 레지스나 뒤알드의 연구를 능가한 것이었다. 그의 연구를 통해서 프랑스에서의 조선에 관한 지식은 한 단계 더 비약할 수 있었다. 그의 조선에 관한 연구는 레지·뒤알드의 연구를 달레의 연구에 이어 주는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프랑스인들에 의한 조선 연구는 19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즉 1818년 빠리에서는 왕실 도서관의 책임자인 그로지에(Grosier) 신부가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중국론≫을 저술해서 간행했다.800)Grosier, De la Chine, Paris ; Pillet, 1818, pp.340∼353. 이 책은 중국 15개 지방, 만주족, 그리고 중국의 조공국들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곳에 조선의 문화와 관습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우선 조선의 명칭, 영토 및 국경지역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는 조선인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맥과 한이 중심세력이었고, 고(구)려가 이를 통일했다고 보았으며, 주몽신화를 소개했다. 조선인들은 잘 생겼으며 춤과 노래·음악을 좋아하며, 북부 사람은 남부보다 더 크고 씩씩해서 훌륭한 전사가 된다고 했다. 과학에 뛰어나고 학자들은 모자에 두 개의 깃을 꽂아 일반인과 구별하며, 학문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책을 팔고자 하는 상인들은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하고 가격흥정에 앞서 향을 피운다고 했다. 그는 조선의 특산품으로 옷감보다도 질긴 한지를 주목했으며, 중국은 이 한지를 매년 매우 많이 수입한다고 서술했다.

 그는 우리의 관습을 묘사하면서, 집은 중국과 비교하여 전부 단층이고 화려하지 않다고 했으며, 도시에는 중국식 성벽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조선인들은 관습·글쓰기·의복·종교의례·윤회사상 등을 대부분 중국에서 배워갔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중국과 비교하여 여자들은 자유로이 남자들 모임에도 나갈 수 있으며, 혼인에서도 당사자가 배우자를 직접 선택한다고 전했다.801)혼인에 있어 여성들이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北史 高句麗傳의 내용이지 당대의 관습은 아니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선의 왕은 자신의 신하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왕과 왕비는 모두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책에서 서술된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 책은 조선의 문화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19세기 전반기의 유럽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19세기 후반기 유럽인들의 조선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달레(Charles Dallet, 1829∼1878)의 ≪조선교회사≫가 1874년 빠리에서 간행되었다.802)Dallet, Histoire l'Eglise de Corée, Paris : Victor Palmé, 1874(安應烈·崔奭祐 譯註, 한국교회사연구소, 上·中·下, 1979). 그는 조선에 나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보내온 각종의 자료에 근거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의 앞부분에 당시 유럽인들의 조선에 대한 지식을 모두 결집시켜 놓은 조선에 관한 입문편을 배치해 놓았다. 이 입문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매우 정확하고 자세한 지식을 수록해 주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러므로 그의 이 책은 당시 조선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 수준을 가늠케 하는 것이며, 서구인들이 조선에 대한 지식을 대폭 강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책이었다. 이 책은 간행된 직후 메르데르발트(Pompe van Meerdervalt)가 네덜란드語로 번역했다.803)Dallet, 위의 책(上), 23쪽 및 각주 1) 참조. 그리고 19세기 후반기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많이 출간된 서양어로 씌여진 조선에 관한 각종의 문헌들은 거의 대부분 이 달레의 교회사에 수록된 조선에 관한 입문편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의 개항 직전에 이룩된 달레의 ≪조선교회사≫의 간행은 19세기 70년대 이전 조선에 관한 모든 지식의 결정판이었으며, 차후에 간행된 여러 책자들을 통해서 그 내용이 재생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 책은 19세기 말엽까지도 유럽의 조선 연구자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양인들은 항해와 통상의 범위를 동아시아에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조선에 대한 서양인의 관심은 그리스도교 선교와 관련하여 선교 대상지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출현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의 서양인들은 17세기를 전후하여 전개된 전쟁 및 왕조의 교체와 같은 동아시아史의 전개와 관련하여 조선의 국제 관계를 주목했다. 서양인들은 먼저 조선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지식을 확보해 나갔으며, 이에 이어서 조선에 표착했던 사람이나 탐사항해 후 견문기를 남긴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관한 지식을 확대해 나갔다. 18세기를 전후해서는 중국에 나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중국의 문헌과 그들 자신의 지리적 탐사의 결과들을 종합하여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제도 및 중국과의 관계 등에 관한 자료를 유럽인들에게 제시해 주었다. 18세기의 거의 전기간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대한 서양인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그 관심의 폭이 점차 경제적 차원 및 정치·군사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갔다. 서양인이 가지고 있었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조선인이 서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관심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조선의 근현대 문화가 서양에 압도되는 과정과 원인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