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 서양과의 관계
  • 7) 조선인의 서양 인식

7) 조선인의 서양 인식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양인 내지는 서양 문물과의 접촉이 전단계에 비해서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과 서양인 내지는 서양문화와 접하여 그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824)潘允洪, 앞의 글, 86쪽. 즉 첫째로는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통해서 서양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졌고, 둘째로는 赴燕使臣의 傳聞을 통해서, 그리고 세번째로는 서양인의 표착이나 이양선의 출몰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네번째로는 천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잠입 활동을 통해서 조선인들은 서양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로를 통해서 조선 후기인들은 서양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면서, 미지의 세계였던 서양에 대한 인식을 축적해 나갔다. 물론 당시인들은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西器受容論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천주교의 성행과 함께 서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입각하여 척사위정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모두 배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에 대응하여 해방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므로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의 서양인식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모두 검토해야 할 것이다.

 먼저 서적의 수용을 통한 서양인식의 강화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天學初函≫에 수록된 책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한문 西學書들이 간행되고 있었다. 이 서학서들은 17세기 이래로 조선에 전래되어 士流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서와 서양의 천주교 사상을 전하는 책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서학서 가운데 과학기술서도 적지 아니하게 조선에 수용되었고 조선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825)朴星來,<마테오 리치와 한국의 西洋科學 수용>(≪東亞硏究≫ 3, 西江大, 1983). 그들은 서양인들이 제작한 지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고, ‘歐羅巴’ 여러 나라와 신대륙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리지식의 확대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천주교 서적들이었다. 1801년 당시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서적은 대략 120여 종에 이르고 있었다.826)裵賢淑,<17·8 世紀에 傳來된 天主敎書籍>(≪敎會史硏究≫ 3, 1981), 3쪽.
趙珖,≪朝鮮後期 天主敎史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9), 91쪽.
그리고 이 서적들은 전통조선의 사회와 사상에 있어서는 매우 이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赴燕使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전문을 통해서도 서양에 관한 지식은 조선에 전달되었고, 이를 통해서 서양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 갔다. 부연사행 가운데에서는 중국에서 서양인을 직접 만난 사람도 있으며,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의 서학서적을 조선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李光庭·鄭斗源·李頤命·洪大容·李承薰 등은 북경에서 서양인 선교사와 교섭했던 赴燕使의 일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광정은 선조 36년(1603)에 赴燕하여<歐羅巴國輿地圖>를 전래하여 조선에 유럽에 관한 구체적 인식을 심어 주게 되었다. 또한 정두원은 인조 8년(1630) 북경으로 가는 도중 중국 산동반도 登州에서 로드리게스(Johanes Rodriguez, 陸若漢, 1559∼1633)를 만나서 天文圖·萬國輿圖 및 千里鏡·自鳴鐘·紅夷砲 등과 같은 서양의 기기와 ≪職方外記≫를 비롯한 서학서적을 도입했었다. 인조 22년 昭顯世子가 북경에서 샬을 만났던 것도 조선인의 서양 이해에 있어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경종 즉위년(1720) 북경을 찾았던 이이명은 북경 南堂에 있던 쾨글러(Ignatius Kögler)나 요셉 사우레즈(Joshep Saurez) 등과 만나서 서양의 천문 역법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영조 42년(1766) 赴燕했던 홍대용도 청의 흠천감이었던 할러쉬타인(A. Ha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A. Gogeisl, 鮑友管)을 만나서 학문적 대화를 나누었다. 정조 7년(1783)에 북경을 갔던 이승훈은 北堂에서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바 있었다.827)李元淳,<西洋文物 漢譯西學書의 傳來>(≪한국사≫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49쪽 이하.

 한편 18세기 이래 조선인은 북경에서 러시아인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 만남을 통해서 조선인들은 러시아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북경의 會同館(玉河館)은 조선과 러시아의 전용 숙소였다. 경종 즉위년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李宜顯 일행은 북경에 도착한 다음 ‘大鼻㺚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전권대사로 북경을 방문하고 있던 이즈마일로프(Izmailov) 일행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경종 원년 3월에 서울을 출발한 사은사 趙泰采 일행은 이즈마일로프 이후 북경에 체류하고 있던 랑게(Lange) 영사를 북경에서 목격한 바 있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서울을 출발한 동지사 李健命의 수행원들도 회동관에 머물고 있던 랑게를 만나기도 했다. 영조 11년 進香使行의 書狀官 李潤身은 玉河館 인근에 머물고 있던 ‘大鼻㺚子’ 즉 러시아인과 만나서 교환한 사실을 적으면서 러시아가 중국 동북쪽 60일 일정에 있으며, 땅이 중국보다 크며 城池와 君臣의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영조 17년 정월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洛豊君 일행의 경우에도 러시아 전교회가 중국에 파견한 제3차 전도단(1736∼1745)을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홍대용은 영조 41년 연행시에 러시아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에서 러시아인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났다. 순조 26년(1826) 동지사 洪義俊을 수행했던 洪錫謨는 북경의 러시아관을 방문하여 제11대 전도단장 파벨 까멘시이(Pavel Kamensij) 등과 필담을 통해서 러시아의 지리와 풍속에 대한 견문을 얻었다. 1828년과 1829년에는 조선 사신들의 수행원이 러시아館을 방문하고 그들의 天主堂에 들린 후 느낀 당혹감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赴燕使行을 통해 서양인과의 만남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대체적으로 청의 조정에서 仕宦하고 있던 프랑스 등 서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 대부분은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부정적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828)朴泰根, 앞의 글(1984), 24∼33쪽.

 조선인들은 서양인 표착자들과 이양선의 선원들을 통해서도 서양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갔다. 우선 조선인들은 이양선의 웅장한 규모와 질풍과 같은 속도에 감탄했고, 그 배에 비치된 각종의 무기나 관측기구를 비롯한 서양의 기물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서술했다. 그러나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져 가던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해방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었고,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해방론이 강하게 전개되었다.829)車基眞,<尹宗儀의 斥邪論과 海防論 인식에 대한 연구>(≪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사, 1990), 21쪽.
孫炯富,<19세기초·중엽의 海防論과 朴珪壽>(≪全南史學≫ 7, 1993), 395쪽.
특히 阿片戰爭 이후 1848년을 전후해서는 중국에서의 아편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에 아편의 유입을 금지하기 위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830)閔斗基,<十九世紀後半 朝鮮王朝의 對外危機意識>(≪東方學志≫, 延世大, 1986), 265쪽. 그리고 조선에 대한 서양의 침략을 경계하는 논의와 더불어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831)노대환,<19세기 전반 西洋認識의 변화와 西器受容論>(≪韓國史硏究≫95, 1997), 137쪽.

 또한 조선 후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조선을 인식하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전통적 성리학 중심의 문화에 대한 도전을 감행했고, 조선인들의 세계관을 변동시켜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전통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夷狄禽獸의 學’이거나 ‘異端邪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탄압의 강도에 비례해서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신봉하던 피지배 民人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들은 여기에서 평등의 이념을 발견하고 실천해 나갔으며, 기존의 가치관에 대신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832)崔奭祐,<天主敎의 受容>(≪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88쪽.
李元淳,≪韓國天主敎史硏究≫(韓國敎會史硏究所, 1986).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이처럼 상호 대립적 판단을 서로가 고수하고 있는 한, 서양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당시인들에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금령으로 말미암아 비밀리에 선교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서양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일부의 조선인들은 가질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사회에 이르러 조선은 서양 제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했다. 조선이 서양과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지리상의 발견과 그리스도교의 선교라는 세계사적 조건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기도 했다. 서양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하여 조선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 갔다. 그리고 서양인 항해자나 지도 제작자들도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초기에는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점차 조선을 독자적 대상으로 하여 관심의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양선의 출현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양인들은 조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접근을 시도해 갔다.

 한편 조선인들은 수동적 입장에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이 진행되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赴燕使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서양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서양에 대한 지식을 상당히 축적해 나갈 수 있었고, 조선 후기사회에서는 西器受容論이나 서학실천론의 방향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척사위정론이나 해방론 등의 강화를 통해서 압도당했고, 서양의 접근에 대해서 철저히 경계하는 입장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조선 후기 서양과의 관계는 이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전개되었으며, 이 특성으로 인해서 서양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불가능했고, 서양 문물의 선별적 수용마저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사람들에 있어서 서양과의 접촉은 새롭고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은 개항을 단행해야 했고, 개항 이후의 사회는 서양과 본격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趙 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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