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1. 인구의 증가와 분포
  • 2) 인구의 분포

2) 인구의 분포

 그러면 이같은 규모의 인구는 어디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었고, 또 그 추이는 어떠했던가? 우선 각 지역별 분포양태를 살피기 위하여 지금까지 불규칙하게 산견되는 각 道別 인구수들을 가능한 한 9∼12년 간격으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표 3>과 같이 나타난다.

연 도 인구수 한성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出 典
인조 26
(1648)
1,531①
100%
96
6.27
81
5.29
174
11.37
432
28.22
425
27.76
54
3.53
55
3.59
146
9.54
69
4.51
증보문헌비고
(실록,탁지지)
효종 8 (1657) 2,290
100%
81
3.54
133
5.81
287
12.53
522
22.80
763
33.32
72
3.14
138
6.04
185
8.09
110
4.80
증보문헌비고
현종 10 (1669) 5,019②
100%
194
3.87
546
10.89
595
11.86
973
19.39
1,174
23.39
186
3.71
361
7.19
720
14.35
269
5.36
숙종 4 (1678) 5,247③
100%
167
3.19
554
10.56
714
13.61
1,000
19.06
1,005
19.16
271
5.16
455
8.67
707
13.47
374
7.12
숙종 43 (1717) 6,840④
100%
238
3.48
561
8.20
974
14.26
1,110
16.22
1,629
23.81
282
4.13
458
6.69
1,078
15.77
510
7.45
증보문헌비고
(실록)
영조 2 (1726) 7,032⑤
100%
189
2.69
560
7.96
911
12.96
1,105
15.71
2,243
31.90
290
4.12
469
6.67
735
10.45
531
7.55
영조 29 (1753) 7,299⑥
100%
174
2.39
642
8.80
931
12.76
1,193
16.34
1,662
22.77
391
5.35
540
7.40
1,268
17.38
498
6.82
증보문헌비고
정조 1
(1777)
7,239
100%
198
2.74
607
8.39
871
12.03
1,190
16.44
1,569
21.67
341
4.71
550
7.60
1,274
17.60
639
8.83
정조 13 (1789) 7,404
100%
189
2.55
642
8.67
868
11.73
1,221
16.49
1,591
21.49
332
4.49
568
7.67
1,296
17.51
696
9.40
호구총수
= 실록
순조 7
(1807)
7,561
100%
205
2.71
675
8.92
893
11.81
1,251
16.55
1,607
21.25
336
4.45
583
7.71
1,306
17.27
706
9.34
증보문헌비고
헌종 3 (1837) 6,709
100%
204
3.04
658
9.80
846
12.61
1,093
16.29
1,501
22.37
318
4.75
547
8.15
853
12.71
690
10.28
철종 3
(1852)
6,919⑦
100%
204
2.95
673
9.72
881
12.73
1,068
15.43
1,536
22.19
325
4.70
673
9.72
869
12.56
692
10.00
고종 1
(1864)
6,829
100%
203
2.97
674
9.88
879
12.87
1,083
15.86
1,521
22.28
332
4.86
568
8.32
873
12.78
696
10.19
광무 8
(1904)
5,929
100%
192
3.24
673
11.35
775
13.07
931
15.70
1,111
18.74
302
5.09
382
6.44
813
13.71
750
12.65
광무 11
(1907)
9,782
100%
199
2.04
869
8.88
1,142
11.67
1,448
14.80
2,333
23.85
628
6.42
901
9.21
1,289
13.18
973
9.95
한국호구표
융희 4
(1910)
12,919
100%
234
1.81
1,104
8.55
1,407
10.89
2,448
18.95
2,896
22.42
775
6.00
963
7.45
1,832
14.18
1,261
9.76

<표 3>조선 후기 인구의 지역별 분포 (단위:1,000명)

비고:
 ①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1,793,701명.
 ②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5,218,744명.
 ③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5,872,217명.
 ④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6,788,789명.
 ⑤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6,995,004명.
 ⑥ 京兆掌故御覽獻民口數:7,288,361명.
 ⑦ 합계는 6,810,206명으로 되어 있으나 실합계수는 6,918,838명이다.
 ⑧ 李憲昶,<「民籍統計表」의 檢討>(≪古文書硏究≫9·10, 1996).

 <표 3>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三南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전 인구의 51% 정도가, 三北지방(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 32% 정도가, 한성부와 中部지방(경기도·강원도)에 17% 정도가 각각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호구의 파악이 극히 미진했던 인조 26년∼효종 8년(1648∼1657)에는 삼남지방에 68%, 삼북지방에 18%, 중부지방에 14% 정도가 각각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호구 파악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달했던 현종 10년∼숙종 4년(1669∼1678)에는 삼남지방이 53% 정도로 하강되는 반면에 삼북지방이 28% 정도로, 중부지방이 19% 정도로 상승되어, 이후의 18·19세기 양상, 즉 51·32·17%의 비율에0007) 18·19세기의 인구 분포 비율을 약 30년 간격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비율은 삼남-삼북-중부지방의 순서임).
숙종 43년(1717):54.3-29.9-15.8
영조 29년(1753):51.9-31.6-16.6
정조 원년(1777):50.1-34.0-15.8
순조 7년(1807):49.7-34.3-16.2
헌종 3년(1837):50.3-32.3-17.4
고종 원년(1864):51.1-31.2-17.6
광무 4년(1900):46.9-32.5-20.7
평 균:50.6-32.3-17.2
접근하고 있다. 인구의 80% 정도가 집계된 것으로 여겨지는 1910년도의 분포 비율이 52.3·31.4·16.4%를 이루는 것을 보면, 18·19세기의 이러한 분포양태는 거의 실제에 가까웠던 양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인구분포 양상은 무엇보다도 경작지의 분포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가 아직은 농업 위주의 토지경제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표 4>와 같다.

 이에 따르면, 대체로는 각 도의 전결수 백분비와 인구수 백분비가 비례하고 있어서 경작지가 많은 지역에 인구가 많이 거주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남지역과 황해도는 시종 경작지에 비해 인구수가 적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경기·강원·평안·함경도는 시종 경작지에 비해 인구수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에는 전결수의 증가로 그 대비의 격차가 점차 감소되고 있으나, 여타 지역에서는 그 격차가 점차 증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작지의 다과와 인구의 다과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농법의 차이나 농업 이외의 생업의 발달 등이 고려될 수도 있겠고, 한편으로는 量田이나 호구조사의 지역적 차이에서 말미암은 격차를 생각하여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경작지나 그 증대에 비해 인구수와 그 증대가 월등하였던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 더욱 그러한 것이다. 평안·함경도는 황해도와 함께<표 5>에서 보듯이 17세기에는 물론, 18세기에도 남다른 인구 증가를 이루어 위와 같은 18·19세기의 인구분포 양상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를 해명할 만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한 가지 참고가 되리라 본다. 즉 순조 14년(1814)에 평안도 관찰사가 民戶逃散의 세 가지 폐단을 지적하면서 평안도의 前式年(순조 10년)의 戶數는 302,844호 이고 남정수는 664,654명인데, 今式年(순조 13년)에는 호수가 192,867호이고 남정수는 402,972명으로 감축되었다고 국왕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0008) 方東仁, 앞의 글, 300쪽. 곧 호·구의 虛錄을 실사한 결과, 호수에서는 전식년보다 무려 36.3%가, 남정수에서는 39.4%가 각기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호구의 허록은 유독 평안도에만 국한되었던 폐해가 아니었지만, 순조 7년까지 계속 증가만 하던 평안도의 인구수가 헌종 3년(1837)에 무려 35%나 감소한0009)≪靑丘全圖≫軍國總目表에 나타나는 순조 28년도(1828) 평안도의 인구수는 781,200명으로 집계된다. 순조 7년도보다 40%가 감소한 수치이다. 것도(<표 3>·<표 5>참조) 순조 11년(1811)의 洪景來亂과 그 직후의 이같은 救弊조치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평안도는 이 결과로 전결수 대 인구수의 격차가 2.4배(숙종 46년·정조 10년)에서 1.5배(순조 28년)로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인조 24(1646) 숙종 46(1720) 정조 10(1786) 순조 3(1803) 순조 28(1828)
전 결 인 구 전 결 인 구 전 결 인 구 전 결 인 구 전 결 인 구
한성   6.3   3.5   2.7   2.7    
경기 3.2 5.3 7.3 8.2 7.7 8.7 6.8 8.9 6.3 8.2
충청 18.2 11.4 18.3 14.3 17.8 11.8 15.1 11.8 17.9 14.2
전라 29.2 28.2 27.1 16.2 24.3 16.6 25.6 16.6 23.7 14.9
경상 27.7 27.8 24.2 23.8 23.4 21.6 24.8 21.3 23.5 23.7
강원 1.2 3.5 2.9 4.1 2.8 4.4 1.4 4.5 2.9 5.6
황해 6.5 3.6 9.3 6.7 9.0 7.7 8.7 7.7 9.2 8.7
평안 7.0 9.5 6.5 15.8 7.4 17.5 9.9 17.3 8.3 12.8
함경 7.1 4.5 4.4 7.5 7.6 9.1 7.7 9.3 8.2 11.7
총수 685,300①
100%
1,531,365②
100%
1,391,700③
100%
6,840,000④
100%
1,436,400⑤
100%
7,356,783⑥
100%
845,900⑦
100%
7,561,000⑧
100%
1,435,400⑨
100%
6,099,700⑨
100%

<표 4>조선 후기 각 도별 전결수 및 인구수의 백분비

비고:
 ① 柳馨遠,≪磻溪隨錄≫田制攷說. 인조 24년도 時起結數.
 ② 인조 26년 인구수.
 ③ 丁若鏞,≪經世遺表≫田制考. 숙종 46년도 元帳付.
 ④ 숙종 43년 인구수.
 ⑤≪度支志≫總要. 정조 10년도 元帳付. 이에는 총수가 元田畓 1,427,519결, 時起 834,878결로 기재되어 있으나 각 도별 수치의 합계는 1,436,400결(원전답), 739,936결(시기)이다.
 ⑥≪度支志≫總要. 정조 10년도 元戶口. 이에는 총수가 남 3,577,680명, 여 3,762,036명으로 기재되어 있으나(합 7,339,716명), 각 도별 수치의 합계는 위와 같다.
 ⑦ 丁若鏞,≪經世遺表≫田制考. 순조 3년도 時起結數.
 ⑧ 순조 7년 인구수.
 ⑨≪靑丘全圖≫所載 軍國總目表=<備局都錄>(순조 28년) (≪朝鮮學報≫125, 1987). 이에는 총수가 전결 1,456,600결, 인구 6,058,900명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각 도별 수치의 합계는 위와 같다.

연도 한성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황해 평안 함경
1648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678 176 684 502 410 232 237 827 484 542
1717 248 693 522 560 257 383 833 738 739
1753 181 793 724 535 276 391 982 869 722
1789 197 793 615 499 283 375 1,032 888 1,009
1837 213 812 589 486 253 353 995 584 1,000
1864 213 832 615 482 251 358 1,033 598 1,009
1904 200 832 559 445 216 261 695 557 1,087
1910 244 1,363 1,435 809 567 681 1,751 1,255 1,828

<표 5>조선 후기 각 도별 인구증가지수

<표 3>의 인구수에 의거함

 그런데 위의<표 3>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영조 2년(1726)과 영조 29년 사이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의 인구가 26%나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양상이다. 도표로 표시하면<그림 2-1>·<그림 2-2>·<그림 2-3>와 같은 모습이 되겠는데, 평안도의 경우는 순조 7년에서 헌종 3년으로의 변동이 위와 같은 원인, 즉 홍경래란과 그에 뒤이었던 허록의 실사에서 말미암았다고 본다 하더라도, 경상도의 경우에는 20여 년 사이에 60만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영조 2∼29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세 차례(1731∼1737, 1742∼1743, 1749∼1750)의 기근과 전염병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은 영조 2년 직전에도 있었다(1717∼1718, 1723∼1725). 그러나 경상도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영조 2년에 숙종 43년(1717)보다 72%의 인구증가상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숙종 43년∼영조 2년의 증가도 그러하거니와, 영조 2∼29년의 감소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하지만, 우선 경상도와는 반대로 이 기간의 평안도의 인구가 53만 명(40%)이나 급격히 증가한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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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三南지방)
<그림 2-1>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三南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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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中部지방)
<그림 2-2>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中部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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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三北지방)
<그림 2-3>조선 후기 지역별 인구증감 추세(三北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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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위와 같은 인구분포에 따른 각 지역의 인구밀도를 살펴보면, 다음의<표 6>과 같이 나타난다.0010) 方東仁, 앞의 글에 의거함. 각 도의 면적이 후대의 자료(朝鮮總督府,≪朝鮮地誌資料≫, 1918)를 바탕으로 산출한 것이어서 다소의 차이가 상정되고, 또 부정확한 정부 집계 인구수에 따른 것이어서 실제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우선 대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성부를 제외하고 본다면, 시종 전라도를 首位로 하여 삼남지역과 경기도가 전국의 인구밀도를 웃돌고 있었고, 삼북지방과 강원도는 인구증가지수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시종 전국의 인구밀도를 밑돌고 있었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또한 경작지의 다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인데, 그 중에도 경기도가 경작지에 비하여 유난히 높은 밀도를 보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 시기에는 농업 이외의 생업수단이 이 지역에서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지만,0011) 1910년의 통계(≪民籍統計表≫)이기는 하지만, 경기도는 직업별 인구수에 있어서 상업과 공업·日稼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상업에서는 전국 상업인구의 17%를, 공업에서는 22.3%를, 일가에서는 22.7%를 점유하여 首位를 보이고 있다. 李憲昶,<『民籍統計表』의 檢討>(≪古文書硏究≫9·10, 1996) 참조.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본다.

연도\지역 한성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황해 평안 함경 전국
인조 26(1648) 422 7.0 2.0 11.0 24.0 14.4 3.0 3.5 1.4 7.3
현종 10(1669) 858 47.0 7.3 38.6 53.6 40.0 22.4 17.1 5.3 24.0
숙종 43(1717) 822 48.7 10.9 54.9 60.7 53.5 25.5 18.2 10.4 32.8
영조 29(1753) 771 55.3 15.3 60.5 65.7 56.5 33.6 30.1 9.8 34.9
정조 4(1781) 889 52.9 13.4 55.3 66.0 53.4 34.5 30.1 12.3 34.6
순조 16(1816) 921 54.9 13.4 55.9 57.8 48.5 32.8 18.2 14.0 31.5
철종 3(1852) 902 57.9 12.7 57.2 58.8 52.2 41.8 20.7 13.6 32.6

<표 6>조선 후기 각 도별 인구밀도 (㎢당 인구수)

  출전
인구
경 기 강 원 충 청 전 라  
A B C A B C A B C A B C
10만이상 한성   한성                
 
     
9∼10만               1      
 
     
8∼9만     (1)       1   (1)    
 
     
7∼8만     (1)             1
 
1      
6∼7만 1 2 1              
 
       
5∼6만 2 1 (1)    
 
1 1 1 1 1 1      
4∼5만 1 1 (1)    
 
2 2 2 4 1 3      
3∼4만 2 1 (1) 2 2 1 1 1 1 4 5 2 (4)      
2∼3만 4 5 3(1)   1 1 (1) 2 2 2(2) 17 10 12 (2)      
1∼2만 13 12 8(1) 11 12 6 (5) 30 30 22(5) 15 21 10 (5)      
5천∼1만 12 13 14(1) 11 10 7 (3) 16 16 13(1) 14 11 11 (4)      
5천 이하 3 2 3(1) 2 1 1 (1) 1 1 4   4        
38
37
29(9) 26 26 16(10) 54 54 45(9) 56
53

40(15)
     
  출전
인구
경 상 황 해 평 안 함 경
A B C A B C A B C A B C A(%) B(%) C(%)
10만이상             1           1
(0.3)
   
9∼10만                           1
(0.3)
 
8∼9만     (1)       1 1         2
(0.6)
1
(0.3)
3
(0.9)
7∼8만 2 2 1             1 1   4
(1.2)
3
(0.9)
3
(0.9)
6∼7만 2 2   1   1 1   (1) 1 1 (1) 6
(1.8)
5
(1.5)
4
(1.2)
5∼6만 3 1 2(1) 2 1 1 3 1 1 (2) 1 2 2 13
(3.9)
8
(2.4)
12
(3.6)
4∼5만 2 1 2   1   2   1 (2) 3 1 2 14
(4.2)
7
(2.1)
13
(3.9)
3∼4만 8 6 5(4) 3 1 2 5 5 2 (3) 4 4 5 29
(8.7)
25
(7.6)
30
(9.0)
2∼3만 14 13 10(1) 6 8 5(1) 18 5 3 (3) 4 4 3(1) 65
(19.5)
48
(14.5)
51
(15.2)
1∼2만 28 32 28(1) 7 9 9(2) 10 18 10(7) 7 9 6(2) 121
(36.2)
143
(43.2)
127
(38.0)
5천∼1만 10 11 13(1) 4 3 1(1) 1 10 3 (5) 3 3 2 71
(21.3)
77
(23.3)
80
(23.9)
5천 이하 2 3 1         2 1       8
(2.4)
13
(3.9)
12
(3.6)
71 71 2(9) 23 23 19(4) 42 42
21(23)
24
25

20(4)
334
(100)
331
(100)
335
(100)

<표 7>조선 후기 인구규모별 군현수

비고:
 A:≪戶口總數≫정조 13년도(1789).
 B:≪靑丘全圖≫軍國總目表, 순조 28년도(1828).
 C:각 군·현 邑誌(고종 5∼8년;1868∼1871년 편찬)(善生永助,≪朝鮮の人口現象≫, 朝鮮總督府, 1927).
 ① 豊德 無(풍덕군은 순조 23년에 혁파되어 開城府에 소속되었다가 고종 3년에 復置).
 ② 濟州·大靜·旌義 누락.
 ③ 咸悅 누락.
 ④ 慈城·厚昌郡 추가(자성군은 세조 5년에 혁파되었다가 고종 6년에 복구. 후창군은 아래 ⑤ 참조).
 ⑤ 厚州 추가(후주부는 원래 평안도 厚州鎭이었는데 순조 13년에 府로 승격되어 함경도로 이속. 고종 6년에 후주와 茂昌을 합하여 厚昌郡으로 삼아 평안도로 이속).
 ⑥ 厚州 無. 위 ⑤ 참조.
 ※ C의 ( )내의 수치는 호수만 기록된 군·현의 경우인데, 호당 5명으로 산출하여 인구수를 추정하였음.

 다음 각 郡縣別 인구분포 양상을 보면, 앞의<표 7>과 같이 나타난다. 330여 군현 중 60여%가 5천 이상 2만 명 이하의 인구를 지닌 군현들로 나타나고, 30% 내외가 2만 이상 5만 명 이하의 인구를 지닌 군현들로, 8% 정도가 5만 명 이상의 인구를 지닌 군현들로, 2% 정도가 5천 명 이하의 인구를 지닌 군현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당시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인구가 40∼50%에 달했다고 본다면, 60여%의 군현들이 1만∼4만 명의 인구를 지녔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군현들이 삼북지방에서보다 삼남지방에서 더욱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는 것은 지리적 환경과 함께 집약적 농업에서 연유된 양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 실제로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현들을≪戶口總數≫(1789년)에 기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경기도:廣州·楊洲·水原·開城(49,623명). 충청도:忠州·洪州. 전라도:全州·羅州. 경상도:慶州·尙州·晋州·大邱·星州·密陽·安東 황해도:海州·黃州·安岳 평안도:平壤·義州·江界·成川·寧邊·定州·安州(49,582명) 함경도:咸興·吉州·永興

 경기도가 38개 군현 중 4곳(10.5%), 충청도가 54개 군현 중 2곳(3.7%), 전라도가 56개 군현 중 2곳(3.6%), 경상도가 71개 군현 중 7곳(9.9%), 황해도가 23개 군현 중 3곳(13%), 평안도가 42개 군현 중 7곳(16.7%), 함경도가 24개 군현 중 3곳(12.5%)이고, 강원도에는 한 곳도 없다. 이들 10만 명 이상의 大郡이 道內 군현수에 비하여 삼북지방에 많이 존재하고 삼남지방에 적게 존재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이들 28개 군현의 都市部(대체로 邑治 지역)가 각 지역의 주요 도시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0012) 孫禎睦의 연구(≪朝鮮時代都市社會硏究≫, 一志社, 1977)에는 18세기말에 118개의 도시가 각 지역에 산재했던 것(경기 9, 충청 15, 전라 19, 경상 30, 황해 11, 강원 4, 평안 30, 함경 18개)으로 나타나고, 김두섭의 연구(<조선 후기 도시에 대한 인구학적 접근>,≪韓國社會學≫24, 1990)에는 같은 시기에 전국 주요 도시로 57개(경기 3, 충청 6, 전라 10, 경상 12, 황해 5, 평안 16, 함경 4)가 선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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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830년대의 인구분포
<그림 3>1830년대의 인구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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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같은 인구의 분포나 도시의 분포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롭게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背山臨水’의 전통적 취락형태와 농업 위주의 경제생활에서 오래 전부터 그 기반이 마련되어 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앞의<그림 3>에서0013) 方東仁, 앞의 글에 의거함. 보듯이, 大同江水系, 漢江水系, 臨津江水系, 錦江水系, 榮山·蟾津江水系, 洛東江水系 등을 쫓아 그 연안에 인구가 밀집되고 도시가 발달하는 양태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대표적 鄕市로 손꼽히는 15개 場市가0014)≪萬機要覽≫財用編 5, 鄕市. 거의 水運(또는 海運)에 편리한 이들 水系에 위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韓榮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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