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2.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
  • 1) 수전농업의 생산력
  • (3) 시비법의 발달

(3) 시비법의 발달

 고려시대까지는 비료가 발달하지 못하여 토지를 놀림으로써(休耕이나 休閑) 지력을 유지하였는데, 고려말 이후에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여말선초에는 여러 종류의 비료를 바탕으로 농업생산력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시비형태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지만 비료의 양이 풍부하지 못하여 분종의 형태를 취하거나 파종할 때 벼 포기에 행하는 基肥法에 머무르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0028) 시비법은 대체로 종자나 작물의 그루터기에 비료를 주는 糞種이나 糞科에서 경지 전체에 비료를 주는 糞田으로 발전해갔다. 논이나 밭에 비료를 주는 분전의 형태 내에서는 기비법에서 추비법으로 발전해갔다.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사직설≫에 의하면 조도는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논에서 재배하는데, 추수를 하고 난 겨울에는 糞을 넣어주거나 새로운 흙을 넣어주면서 땅을 갈아준다고 하였다. 한편 만도 水耕은 정월에 얼음이 녹으면 조도처럼 거름이나 흙을 넣어주며, 토양이 척박한 곳은 牛馬糞이나 떡갈나무잎을 넣어주는데, 人糞이나 蠶沙도 좋지만 많이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아울러 봄에 가뭄이 드는 경우 만도를 건경하는 방법을 소개하였는데, 볍씨 1말을 잘 썩은 분이나 오줌재(尿灰) 한 섬에 고루 섞어 파종하도록 하였다. 이앙법을 행하는 논은 가뭄이 들더라도 마르지 않는 수전을 택하고 못자리에는 연한 버드나무가지를 썰어서 두껍게 펴 준 다음 발로 밟아 넣고 흙을 햇볕에 쪼여 말린 다음 물을 넣도록 하였다. 모낼 곳에는 갈잎이나 우마분 거름을 펴고 모낼 때에 다시 갈아 앞의 못자리의 방식대로 흙을 잘 다스려 부드럽게 하도록 하고 묘를 옮겨 심었다.0029)≪農事直說≫種稻.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시비의 종류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품종과 파종법에 따라 시비를 주면서 파종하고 경작하였다.

 그러한 현상이 17세기에는 칙간에 큰 독이나 항아리를 묻어 人糞과 人尿를 바탕으로 재(灰) 등을 섞어 거름으로 만들어 논에다 시비하게 함으로써 비료의 양이 풍부하게 되었다.0030) 閔成基, 앞의 책, 7장. 그것은≪농가월령≫과≪農家集成≫의 농서에서 기술되고 있다.≪농가월령≫서문에 작물을 재배하는 데는 耕種의 시기와 토양의 適否를 중시하였고, 나아가 우리 나라 토지가 척박하므로 시비가 중요하다고 언급하였다.0031) 高尙顔,≪農家月令≫序. 그리하여 칙간에 큰 독이나 항아리를 묻고 대소변이나 구정물을 담아 분으로 이용할 것을 권장하였다.0032) 高尙顔,≪農家月令≫雜令.

 ≪농가집성≫에서는 이앙법을 특히 중시하여, 그 사항에 대해 크게 증보하였다. 아울러 이앙의 시비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즉 못자리에 재와 인분을 섞어 뿌릴 것을 권장하였다. 가령 5두의 볍씨를 파종할 경우 오랫동안 못자리로 이용하였던 곳이면, 분과 재를 섞은 비료를 3석 정도 뿌리지만, 처음으로 못자리를 만드는 곳이면 거름재(분과 재를 섞은 비료)를 4석 정도 뿌려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면서 경상좌도에서 그렇게 행한다고 언급하였다. 반면에 경상우도에서는 참깨 대를 썰어 외양간에 넣어 소와 말이 밟게 한 다음 걷어 내서 쌓아두었다가 겨울철을 넘긴 다음 사용한다고 하였다. 또한 모내기 때에 연한 버드나무가지나 참갈나무잎을 작두로 썰어 외양간 오줌이나 사람 오줌에 적시거나, 외양간에 깔아 소나 말이 밟도록 하고, 재나 오줌을 뿌리고 쌓아둔 후에 거적을 덮어 잘 썩히어 사용한다고 하면서, 특히 경상좌도 사람들이 행한다고 하였다.

 18세기 농서인≪산림경제≫에서는 시비를 중시하여「시비」항목을 처음으로 독립하여 기술하였다. 또한 논농사에서는 벼가 자라는 동안에 비료를 주는 追肥法을 권장하고 있었다.0033) 金容燮, 앞의 책(1988), 224쪽. 즉 논에서 벼가 왕성하게 자랄 때 논에 물을 빼고 잡초를 뽑아준 후 糞灰를 뿌려주고 4∼5일 동안 논을 햇볕에 쬐어 흙이 갈라질 때 물을 넣어주라고 하였다.0034) 洪萬選,≪山林經濟≫권 1, 治農 種稻.
柳重臨,≪增補山林經濟≫권 2, 治農 早稻.

 18세기말에 오면 이전 시기보다 비료를 더욱 중시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농업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시비법을 체계화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농촌지식인 禹夏永은 “다른 사람에게 한 사발의 밥은 줄지언정 한 삼태기의 糞은 주지 말라는 농촌의 속담이 있는데, 이제야 농사를 알게 되었다”0035) 禹夏永,≪千一錄≫권 8, 農家摠覽 聚糞灰.고 하면서 농사에서 비료를 중시하였다. 또한 徐有榘는 “농사에서 비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분회 1두이면 곡식 1升을 얻을 수 있으니, 재를 버리면 곧 곡식을 버리는 것이다.”0036) 徐有榘,≪林園經濟志≫本利志 권 4, 營治 糞壤 儲糞雜法.라고 할 정도로 비료를 중시하였다.

 우하영은 더 나아가≪千一錄≫에서 수전 특히 이앙에 필요한 비료를 만드는 방법(作糞法)과 시비법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즉 草糞·尿灰·鷄狗糞·藁草糞·舊壁土·黃土·莎草·眞水荏油滓·木綿子·杼葉·柳枝 등 11종류의 비료 만드는 방법과 시비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0037) 禹夏永,≪千一錄≫권 8, 農家摠覽 聚糞灰. 특히 이전 농서에는 보이지 않던 계구분·구벽토·진수임유재 등이 이앙의 비료로서 언급되었다.0038) 閔成基,<朝鮮時代의 施肥技術>(앞의 책) 참조. 서유구도≪임원경제지≫에서 비료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다. 여러 가지 비료를 제조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비료를 저장하는 방법 및 다양한 비료의 종류를 소개함으로써 비료의 양이 풍부해졌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비료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전보다 비료의 종류가 많아졌다. 아울러 비료의 종류와 양도 매우 증가하여 시비를 많이 할 수 있었으며, 추비가 정착되어 논농사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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