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2.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
  • 2) 한전농업의 생산력
  • (1) 품종의 증가와 새로운 작물의 보급

(1) 품종의 증가와 새로운 작물의 보급

 조선 전기의≪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結의 면적으로 보아 논과 밭의 비율은 3:7 정도로 밭이 많았는데, 논이 비옥하여 토지등급이 높았으므로 실제 면적의 비율은 2:8 정도로 밭의 면적이 많았다.0044) 李鎬澈, 앞의 책, 258∼273쪽. 이와 같이 밭이 많았던 상황에서 농민들은 논뿐만 아니라 밭에서 잡곡의 재배에도 열심이었다. 밭에서는 조·보리·콩 등이 주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밭에서 재배하는 곡물의 종류는 시기에 따라 변화하면서 내려왔다. 중국의 8세기 농서인≪濟民要術≫에는 5곡이 주였는데, 12세기의 농서인≪農桑輯要≫에는 9곡종이어서 밭에서 재배하는 곡물의 종류도 변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밭에서 재배하는 곡물이 변화해왔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농사직설≫에 9곡종이라 하여, 삼(麻)·벼(稻)·기장과 조(黍粟)·피(稷)·콩(大豆)·팥(小豆)·보리(大麥)·밀(小麥)·참깨(胡麻)·메밀(蕎麥) 등의 재배방법을 기술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는 이 곡물을 중심으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잡곡의 품종도 증가하였다. 수전농업이 발달하면서 벼품종이 증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旱田농업이 발달하면서 잡곡의 품종도 증가하였다.

 먼저 기존에 있었던 한전작물의 품종이 증가하였다. 19세기의 농서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비해 품종이 크게 증가하였다. 조는 17종, 보리는 6종, 콩은 6종, 수수는 4종, 팥은 3종, 기장은 2종, 피는 1종, 밀은 1종이 증가하였다.0045)≪衿陽雜錄≫에 조가 15종, 보리는 4종, 콩은 8종, 수수는 3종, 팥은 7종, 기장은 4종, 피는 5종, 밀은 2종이 기록되어 있는데,≪林園經濟志≫에는 위의 품종을 적고 당시에 심던 새 품종을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이 증가한 품종들은 기후와 토양에 알맞으면서도 추위와 가뭄에 강한 우수한 품종들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李圭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나타난다.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작물들이 전래되고 보급되면서 한전의 재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말 이후 煙草가 전래되었고, 이어서 배추·옥수수·호박·토마토·고추 등의 작물이 전래되고 보급되면서 한전농업에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구황작물로서 고구마와 감자까지 전래됨으로써 한전농업의 재배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연초는 16세기말경에 전래되면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0046) 하멜,≪하멜漂流記≫朝鮮國記(李丙燾譯註, 一潮閣, 1993), 92쪽. 그에 따라 연초의 재배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초에는 비옥한 토지에도 연초를 재배하게 되었고, 재배면적도 크게 확대되었다. 18세기말에는 전라도의 鎭安과 長水, 평안도의 三登과 成川 등 주요 재배산지가 각지에 형성될 정도로 확대되었다.0047) 李永鶴,≪韓國近代 煙草業에 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0).

 면화는 16세기 이래 면포가 의류로서 소비되고, 아울러 화폐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재배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면화를 전업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0048) 申 洬,≪農家集成≫.

 고구마(甘藷)와 감자의 전래도 조선 후기의 농업상에 큰 변화를 유발하였다.0049) 고구마에 관한 논문으로는 다음의 글이 있다.
孫晉泰,<甘藷傳播考>(≪震檀學報≫13, 1941).
篠田統,<‘種藷譜’と朝鮮の甘藷>(≪朝鮮學報≫44, 1967).
특히 흉년에는 구황작물로서 크게 활용되면서 고구마와 감자가 중시되었다. 고구마는 영조 39년(1763)에 통신사 趙曮이 대마도에서 종자를 부산진으로 보냈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씨앗을 가져다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재배하여 성공함으로써 퍼지게 되었다.0050)≪海槎日記≫영조 40년 6월 18일. 柳重臨은 고구마가 전래되자마자 매우 중요하게 여겨≪증보산림경제≫에서 고구마를 심을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왜인들은 먼 나라 사람에게 (고구마로) 음식을 준다. 그것을 보니 (왜인들은 고구마를) 아침·저녁의 식량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귀한 물건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찌 적극적으로 종자를 구하여 전국에 널리 심지 않으려 하는가. 오직 청인과 왜인들만 그 맛과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柳重臨,≪增補山林經濟≫권 2, 治農 甘藷種植法).

 朴齊家도≪北學議≫에서 “고구마는 흉년을 구하는 데 으뜸이다. 마땅히 屯田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살곶이(箭串)나 밤섬(栗島)에 심게 하면 많이 심을 수 있다”0051) 朴齊家,≪北學議≫進北學議 種藷.라고 고구마의 재배를 권장하였다. 그 후 고구마의 식량으로서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져서 고구마의 재배방법과 저장방법 및 요리방법 등을 적은 농서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0052)≪海東農書≫(1799),≪金氏甘藷譜≫(1813),≪種藷方≫(1813),≪圓薯方≫(1832),≪種藷譜≫(1834) 등의 농서에 고구마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李盛雨,≪韓國食經大典≫, 鄕文社, 1981, 424∼450쪽). 정부에서도 고구마의 식량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정조 22년(1798)에 고구마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마의 재배는 점차 확대되었다.0053)≪正祖實錄≫권 41, 정조 18년 12월 무인 및 권 50, 정조 22년 11월 기축.

 감자는 1820년대에 청으로부터 도입되었다. 茂山郡守 李亨在가 감자를 구해서 전파하였다고 하며, 감자는 전래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러 지역에서 재배될 정도로 보급이 고구마보다 빨랐다. 헌종 13년(1847)에 경기도 陽州와 강원도 原州 및 鐵原 등지에서 구황작물로서 재배되었으며, 심지어 함경도 鏡城에서는 50∼60호의 농가가 감자만을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해갈 정도로 감자의 재배가 확대되었다.0054)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北藷辨證說.

 고추도 조선 후기에 전래되어 재배뿐만 아니라 생활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배추는 이전부터 재배해왔던 종자가 있었지만,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포기가 큰 배추가 전래되면서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김치가 무우를 소금에 절인 것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품종이 좋은 배추와 고추가 전래되면서 소금에 절인 배추를 고추에 버무린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옥수수가 처음 농서에 등장하는 것은 유중림의≪증보산림경제≫이다. “옥수수는 5가지 색깔이 있으며, 봄에 비옥한 땅에 심고 서로 거리를 1尺으로 하며 1科를 심는다. 쪄서 먹을 수 있으며, 죽을 만들어서 먹으면 더욱 좋으며 율무보다 낫다”0055) 柳重臨,≪增補山林經濟≫권 2, 玉薥黍.라고 기록하였다. 옥수수는 17세기 이후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여겨지며, 전래된 이후에 완만히 보급되면서 재배되었다. 그 외에도 호박과 토마토 등의 채소가 전래되었고, 그것은 농업경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원래부터 재배되었던 한전작물의 품종이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초·고구마·감자 등의 작물과 옥수수·호박·토마토 등의 새로운 작물이 전래되면서 한전작물의 재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