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2.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
  • 3) 농구와 수리시설
  • (2) 수리시설의 확대

(2) 수리시설의 확대

 조선 후기에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친 후 황폐한 농촌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국가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극심한 한재로 인한 경제생활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보완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현종 3년(1662) 정부는 堤堰司를 설치하고<賑恤廳堤堰事目>을 발표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지방관이 제언을 감독하도록 함으로써 수리시설을 정비해갔다. 즉 제언 안의 토지를 宮房이 折收하거나 土豪가 冒耕하는 것을 방지하고, 빈민들에게 곡식을 주면서 제언을 수축하도록 하는 빈민구휼책 및 수리시설 축조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각 도 都事에게 제언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아울러 郎廳·暗行御史 등을 각 지역에 파견하여 제언을 조사하고 감독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제언을 통한 수리정책은 정조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정조는 암행어사에게 제언이 있는 지역을 함부로 훼손하여 경작하는 곳은 없는지, 혹은 제언이 잘 유지되는가를 살피라는 분부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는 즉위한 지 2년(1778) 만에<堤堰節目>을 마련하고 나아가 22년에는 ‘求農書綸音’을 발표하여 농업진흥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제언절목>은 왕실이나 세력가들이 제언 안에서 함부로 경작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다. 또한 ‘구농서윤음’에 응하여 당시 농촌지식인들이 조정에 올린 글에는 저수지를 축조하는 기술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말 19세기초가 되면<표 1>에서 보듯이 저수지가 많이 축조되어 3천 5백 개 이상에 달함으로써 건국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지 역 ①15세기 후반 ② 16세기초 ③ 17세기 후반 ④ 19세기초 ⑤ 고종 32년(1895)
경 상 도
전 라 도
충 청 도
721
-
-
800여
900여
500여
1,522
913
503
1,765(99)
936(24)
535(17)
1748(8)
-
-

<표 1>조선시대 삼남지방의 제언수

출전:①≪慶尙道續撰地理志≫②≪中宗實錄≫권 46, 중종 18년 정월 경술 ③≪增補文獻備考≫146, 田賦考 6 ④≪萬機要覽≫財用編 5, 堤堰 ⑤≪慶尙道內各邑堤堰防洑庫數成冊≫(1895).

 특히 경상도의 경우는 17세기 후반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고0077) 최원규,<朝鮮後期 水利기구와 經營문제>(≪國史館論叢≫39, 國史編纂委員會, 1992).
宋讚燮,<17·1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水原의 서호, 金堤의 벽골제, 洪州의 합덕제, 延安의 남대지 등과 같은 큰 저수지가 건설되거나 보수되면서 농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언보다 작은 규모로 洑(川防)가 존재하였다. 15·16세기에는 정부의 정책적 배려하에 주로 중소규모의 보를 건설하면서 관개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양란 이후의 토지의 황폐화를 복구하고, 아울러 이앙법의 적극적인 보급에 따라 수리시설을 대폭적으로 증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현종 때에는 제언과 함께 보의 수축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때 발표된<진휼청제언사목>에서는 구체적인 시행방법을 제시하여 적당한 후보지를 선정하고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고 재료를 구입하며 수리를 담당할 전문가를 양성하거나 인재를 구하여 일을 맡기는 등의 절차를 기술하였다. 보의 건설이 확대됨에 따라 큰 하천이나 강에서 보를 쌓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에는 큰 하천도 개발하여 보를 축조하고 관개함으로써 관개의 이익을 크게 확대시켰다.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큰 하천이나 강에 보를 쌓는 경험이 축적되고, 정부의 지원 아래 큰 보를 축조하는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천방의 관개사업이 제언보다 유리하였고, 관개면적도 확대되어 갔다. 특히 정조대에는<제언절목>의 반포와 ‘구농서윤음’의 발표에 의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어 보의 수축이 최고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보는 평야의 개간사업의 진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는데, 19세기에 이르면 대하천을 이용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지역적으로 보면 영남의 동쪽 산군 평야에서 보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호남 등 서해안 지대는 영남지역과 달리 대규모의 複合洑가 발전하였다.0078) 최원규, 위의 글, 226∼239·261쪽.

 한편 보는 국가 혹은 향촌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설립하기도 하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개인이 보를 축조하여 수세를 받는다든지 혹은 자신의 토지에 관개함으로써 부를 축적해갔고, 아울러 그것을 통하여 지주제를 확대해갔다. 그리하여 18세기말 19세기초에는 보의 전성기를 이루어 大洑의 수만 2천여 개가 넘었다.≪萬機要覽≫의 財用編에 의하면 보(대보)의 숫자가 경상도가 1,339개, 충청도가 497개, 전라도가 164개, 평안도가 109개, 황해도가 71개, 강원도가 61개, 함경도가 24개로서 모두 2,265개에 이르렀다.0079) 작은 洑의 수까지 합하면 2만 개 이상이 될 것이다(최원규, 위의 글, 232∼233쪽).

 19세기 무렵에는 보가 제언보다 우위를 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숫자만이 아니라 몽리면적이나 몽리 안정도 등 모든 측면에서 그러하였다고 여겨진다.

 水車는 조선 후기에도 중앙정계에서 꾸준히 관심사로 제기되었고, 특히 숙종·영조·정조는 수차를 도입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나아가 서양식 수차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 시기의 지배층은 수리기술에 대한 지식체계를 집적하여 水利學이라는 분야를 성립시킬 만큼 수리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0080) 문중양,<조선후기의 水車>(≪韓國文化≫15, 서울大,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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