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2.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품작물의 재배
  • 3) 농구와 수리시설
  • (3) 상품작물의 재배

가. 곡물

 조선 후기에 농민층 분해현상의 진전에 따라 농민은 더 이상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농촌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당시 번성하고 있었던 수공업·광업 촌락에 가서 품을 팔거나, 도시로 가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민들은 쌀·보리·콩 등의 곡식을 주로 이용하였다. 그 중 가장 중히 여기면서도 널리 소비한 것은 쌀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쌀을 소비하는 풍조가 번성하여 쌀 소비가 증가하였다. “백성의 풍속이 쌀을 귀하게 여기고 조(粟)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지극히 빈궁하고 가난한 무리들까지도 반드시 쌀밥을 먹으려고 하며 탈곡한 조를 먹지 않는다”0081)≪承政院日記≫1798책, 정조 22년 10월 15일 順興府使 姜忱疏.라고 할 정도로 쌀 소비가 만연하였다.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동 해서 관서 관북
장시수 92 
(34)
157 
(59)
187 
(55)
269 
(72)
51 
(26)
109 
(23)
145 
(42)
42 
(14)
1,052
(325)


보리
34 
6 
6 
21 
14 
6 
55 
24 
18 
70 
65 
55 
11 
- 
- 
23 
22 
22 
42 
39 
39 
4 
5 
11 
260
175
157

<표 2>19세기초 쌀·콩·보리가 거래된 장시수

출전: 徐有榘,≪林園經濟志≫倪圭志 권 4, 貨殖 八域場市.
( )는 장시 가운데 거래물품이 기록된 장시수임.

 <표 2>에서 보듯이 쌀은 19세기초에 장시의 거래물품이 기록된 325개의 장시 중에 260개의 장시에서 거래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매매되고 있었다. 쌀을 구입하여 소비하는 계층이 많이 증가하면 할수록 쌀의 상품화는 증가하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개성·대구 등 도시 인구의 증가는 쌀의 상품화를 촉진시켰다. 도시 인구의 증가는 쌀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쌀의 유통을 촉진하였다.

 예를 들면, 서울의 인구는 17세기초에 10만 명 정도였다가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2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20만 명의 인구가 1년에 필요한 식량은 100만 석이었다. 그 중 서울의 토호들이 거두어들이는 소작료가 20만 석이고, 국가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액수가 20만 석이었으며, 나머지 60만 석이 상품으로 유통되어서 구입하는 액수라고 하였다.0082)≪承政院日記≫1540책, 정조 7년 9월 9일. 이 사실을 통하여 당시 쌀의 유통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나아가 쌀의 상품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보다는 못하지만 평양·개성·대구 등의 도시에서도 쌀의 매매가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0083) 李世永,<18·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韓國史論≫9, 서울大, 1983), 230∼243쪽.

 이와 같이 쌀의 상품화현상은 매우 활발하였다. 쌀의 소비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되자 농민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밭을 논으로 바꾸어갔다. 당시에는 그것을 ‘反畓’이라 불렀다.0084) 徐有榘,≪擬上經界策≫下. 이재에 밝은 농민은 밭보다는 논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라 여겼고, 벼를 재배하여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 하였다. 특히 지역적으로는 여주와 이천지방에서 早稻(올벼)를 재배하고 일찍 수확하여 쌀을 판매함으로써 농민들이 돈을 벌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이후에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쌀의 상품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간 계층은 지주층과 부농층뿐만 아니라 영세농이나 빈농층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영세농과 빈농층은 조세 납부나 생활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가을에 쌀값이 쌀 때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면에 부농층과 지주층은 쌀을 저장하여 놓았다가 봄에 쌀값이 비쌀 때 판매하여 돈을 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0085) 李世永, 앞의 글.

 상인층은 쌀의 상품화현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역적·시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서울지역에서 쌀의 매매를 담당했던 계층은 경강상인이었다. 경강상인들은 쌀의 매매로 큰 이윤을 남겨 돈을 벌었고, 심지어 쌀을 매점하여 독점가격으로 이윤을 챙김으로써 쌀의 주요 고객인 도시빈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그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기도 하였다. 순조 33년(1833)의「쌀소동」의 경우는 이러한 예 중의 하나였다.

 그 밖에 보리·콩 등의 곡물이 많이 소비되었고, 그에 따라 거래도 활발하였다. 그리하여<표 2>에서 보듯이 보리는 물품이 기록된 325개의 장시 중에 157개의 장시에서 거래되었고, 콩은 325개의 장시 중에 175개의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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