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3. 광작과 지주제
  • 1) 농촌사회 분해와 광작농의 대두
  • (2) 광작론과 반광작론

(2) 광작론과 반광작론

 광작의 의의에 대해서는 그것을 극력 반대하는 입장과 적극 지지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앙법과 관련해서도 그러한 논의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농업경영에 대한 제반 논의를 집약화의 방향 속에 소농민경영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광작화의 방향에서 수렴해 가느냐의 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앙법이 한발에 약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농업기술사적인 측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사회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하는 농업정책사적인 문제까지 관련되어 논의될 것이었다. 즉 국가경제 차원에서 소농보호를 표방한 反廣作論 입장과 私經濟 차원에서 광작의 긍정적인 측면을 주목한 廣作論의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작은 이 시기 지주제와 관련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선 지주의 토지를 자작농이나 작인농민이 광작했다는 점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작에 관한 논의는 지주제 자체가 아니라 지주제를 전제로 해서 나타나는 차경만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반 지배층의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주제가 아니라, 지주의 토지를 자작농이나 작인농민이 지나치게 광점함으로써 빈농층이 몰락한다는 점에 있었다.

 우선 광작을 반대하는 반광작론의 근거를 주목해보자.

 이앙법은 농민층의 대다수가 선호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가지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발에 약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 이래 금지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농민보호 대책으로서 원칙상 이앙법을 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반광작론의 입장에 선 대표적인 농학자로는 禹夏永을 들 수 있다. 향촌 유생인 그는 정조에게 시무책을 건의하면서≪千一錄≫을 후세에 전하게 되었는데, 18세기 후반의 다른 농학자와는 달리 광작경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農事直說≫단계의 精農的인 집약화를 기본사상으로 하여 노동력의 집약적인 투입에 의한 토지생산성의 고도화를 추구했던 그에게 광작은 생산력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비쳤다.0157) 宮嶋博史, 앞의 글. 그가 광작을 반대한 것은 광작농이 경작지를 독점한다는 점과 광작할 경우 비료를 충분히 주지 못하여 토지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편 소농경영에 있어 광작의 방향이 아니라 집약화의 방법을 생각했던 농민층이 있을 수 있다. 이앙법을 통해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광작하려 했지만 반대로 소농민의 경우 그들의 노동력만으로 광작경영을 행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이들은 농업 노동력과 자본을 확보할 수 없을 때는 광작보다는 집약화의 방향을 취할 가능성이 있었고 더욱이 차경지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더욱더 집약화의 방향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이후 시비법이 발달하고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자 절감된 노동력을 광작보다 밭 작물에 투입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러한 예이다.0158) 金建泰, 앞의 글.

 이같은 광작 비판의 입장은 경작지의 분배를 균등히 해야 한다는「均竝作論」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分耕論의 형태로서 차경지의 균등한 분배나 경작지 제한을 주장했다.0159) 宋贊植, 앞의 글. 李圭景은 토지소유권과는 상관없이 경작지만은 귀천없이 戶口의 다과와 壯弱에 따라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해야 한다고 均耕論을 주장했다. 정조 20년(1796) 靖陵直長 愼師浚은 작인의 지대를 2/10∼3/10으로 제한하고 경작지는 兩班士夫는 5결, 良人常漢은 3결로 제한하자고 하는 限耕論을 주장했다. 李光漢의 貸田論0160) 李潤甲, 앞의 글.은 이규경의 균경론과 비슷하다.

 반광작론의 공통점은 광작경영과 그로 인한 소농민의 몰락을 우려하면서 그것을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 점이다. 이같은 논의는 곧≪農家集成≫이래 정부지배층의 소농보호 차원에서 제기된 농업개혁론과 맥을 같이한다. 이들은 토지의 균분·제한을 주장하는 均田論·限田論의 모순 인식태도와 달리 지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가운데 나타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균병작론을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국가의 광작금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광작화의 방향은 역사적 대세로서 확대되어 갔다. 이앙법은 한발에 약하지만 높은 생산성 때문에 수리시설이나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고, 숙종연간에는 <권농절목>을 제정하여 ‘奉天高燥’한 畓에서만 이앙을 못하게 하고, 물을 댈 수 있는 곳에서는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영조연간 이후 이앙법 금지령은 사실상 폐지되었다.0161) 金容燮, 앞의 글(1964a).

 광작경영은 粗放的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소농민경영의 경우는 집약경영을 통해 단위 면적당 토지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지만, 광작농의 경우는 조방경영을 통한 생산성 제고를 노리고 있었다. 광작의 조방적 성격은 물론 농업기술이 뒷받침될 때 더욱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광작경영의 생산성은 농업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할 뿐 아니라, 고용노동이 확보되어야만 보장될 수 있었다. 노비노동의 비효율적 측면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집중적인 농업노동력이 필요한 당시 농촌에서는 고용노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7세기말 농업환경의 개선을 위해 傭役法을 주장했던 柳馨遠은 누구나 자유롭게 고공이 될 수 있도록 명분을 세워 ‘奴主之分’과 다른 ‘雇工之分’을 세운다면 고공이 많아질 것이라고 이미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비제도를 바꾸어 ‘傭役之法’을 세운다면 기꺼이 고공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和雇는 신분제사회 내의 고용-피고용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고용관계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0162) 崔潤晤, 앞의 글(1990).

 이같은 고용노동은 18세기 이후 광작이 일반화되면서 결합될 수 있었다. 농번기에 일용노동력이 필수적인 상황은 영조 37년(1727) 朴文秀가 올린 啓聞 가운데 잘 나타난다.0163) 崔潤晤, 앞의 글(1992).

一日之役은 모름지기 10인으로 하는데 鋤手에게는 貰糧米 3升과 雇價 5分錢을 지급한다. 3차례의 鋤耘과 1차례의 刈穫, 1차례의 打場에 들어가는 노동력이 근 50인에 이른다(≪備邊司謄錄≫82책, 정조 3년 10월 22일).

 이같은 농업노동의 계절적 성격 때문에 18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일종의 청부노동형태인 雇只노동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겨울과 춘궁기를 넘기는 빈민의 노동력 궁박판매형태로서 농작업의 일부 또는 전체를 계약에 의해 경작해주는 방식이다. 부농층의 경우 농번기에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고지노동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고지노동이 발달한 곳은 주로 평야지대였다. 辛敦復의≪厚生錄≫·≪山林經濟〔補說〕≫에 의하면, 18세기 이후 특히 전라도의 金堤·扶安·沃溝·井邑·高敞·全州·益山 등의 지역을 비롯해, 경기도의 振威·水原·平澤·稷山, 황해도 載寧 등지에서 고지노동이 발달하고 있었다.0164) 허종호, 앞의 책.
金容燮,<≪山林經濟≫의 [補說]과 그 農業經營論>(≪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그 예로 직산·평택지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겨울에는 1緡(兩)으로 10인을 買傭할 수 있었고, 여름에는 12∼13인을 고용할 수 있었기에 三石畓 三石田 경작에 상용노동력 1남 2녀와 매용노동력 80인이면 족하다고 했다. 1석락 水田이라면 이앙에 20인, 鋤耘에 20인이면 되었다(辛敦復,≪山林經濟[補說]≫권 1, 治農 傭作之法).

 지역에 따라 고지노동의 발달 정도는 차이가 있었지만, 당시 유통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대도시 부근에서는 더욱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상업적 농업에 편승한 광작층의 노동고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노동력의 효과적이고 집중적인 투입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고용노동은 광작을 하는 농업경영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광작경영의 관건은 노동력 고용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작을 통한 조방경영의 생산성은 이른바 노동력의 효율적인 투입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경영 방식이었다. 그것은 광작농민이 선호하는 것으로서 소농안정을 정책적으로 추구했던 국가지배층의 집약화 방향과는 궤를 달리하는 농법이었다.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집약화를 통한 안정적인 토지생산성 확보를 바랬지만, 사경제 차원에서는 이 시기 농법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을 배경으로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을 통한 노동생산성 확보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