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3. 광작과 지주제
  • 2) 지주제의 변동
  • (2) 지주제의 변동과 그 대책

가. 지주제의 변동

 17세기 이후 18·19세기에 이르는 지주제의 변동은 곧 이 시기 농업변동 과정에서 봉건적 생산관계가 해체하고 새로운 경영형태가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지주제의 변동이란 구래의 봉건적 토지소유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근대적 토지소유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0189) 地主制에 관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李景植,<朝鮮後期 農業·地主制 硏究의 動向과 國史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39, 1986).
李榮昊,<조선시기 토지소유관계 연구현황>(≪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下, 近代史硏究會編, 한울, 1987).
李世永,<조선후기 토지소유형태와 농업경영 연구현황>(위의 책).
崔潤晤,<농업개혁과 근대적 토지소유>(≪한국역사입문≫③, 풀빛, 1996).
동시에 경영형태 역시 구래의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竝作半收를 탈피하는 가운데 새로운 경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때의 지주제는 물론 지금까지의 소유와 경영형태가 완전히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만 남는 방식이 아니라, 구래의 생산관계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외 중세 말기 농업변동의 결과물로서 형성된 새로운 지주경영방식이 혼합된 것이다.

 일각에는 구래의 봉건적 생산관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다른 일각에서는 선진적 형태의 농업경영이 발생하여 완만하게나마 봉건적 생산관계를 대체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지주제의 구조와 특질은 단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부농경영과 결합된 복잡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지주경영의 특징은 작인에 대한 강제력이 비교적 완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고, 그것은 자유로운 토지매매와 신분제 변동을 계기로 조성되고 있었다는 점이 이전의 지주제와 구분된다. 그와 같은 토지소유의 전개형태를 검토하기 위해 不在地主와 在地地主의 토지집적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같은 범주의 지주적 토지소유는 각기 새로운 경영방식을 모색함으로써 사회변화에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재지주의 경영방식에서 나타날 수 있는 소작지 확대방식과, 재지지주의 자작지 확대방식을 중심으로 지주경영의 변동 양상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가) 부재지주경영의 변동

 부재지주의 존재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을 찾기 힘들지만 지주경영의 관행적·보편적인 형태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1905년의 기록인≪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書≫에서 그 대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0190) 崔潤晤,<18·19세기 서울 不在地主의 土地集積과 農業經營>(≪金容燮敎授停年退職紀念 韓國史學論叢≫, 1997) 참조.

농가에 관해서 그 소유지의 다과를 조사하건대 농민들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촌 내는 모두 소작인이고 지주는 京城 또는 도 내에 거주하는 자가 많다(≪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書≫, 慶尙道·全羅道, 1905, 335쪽).

 이어서 경지의 대부분은 官吏豪族의 소유에 속하고 지방농민은 자작지를 소유하는 자도 비교적 적으며 자작 겸 소작 혹은 순소작인이 가장 많은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 지주 가운데 수백 정보 내지 수천 정보를 가진 대지주들 가운데 특히 큰 자는 대부분 경성이나 기타 대도회에 거주하고 나머지 대지주 중 상당한 경우는 각지에 흩어져 살더라도 지방에서는 주로 읍소재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다.0191)≪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書≫(慶尙道·全羅道)(1905), 335쪽. 보통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거대한 재산을 만지면 대부분 경성에 거주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도·충청남도의 경우 경성인 지주가 많다고 보고되고 있다.0192)≪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書≫(京畿道·忠淸道·江原道)(1905), 258∼265쪽.

 부재지주 가운데 주목되는 형태가 서울에 사는 부재지주이다. 서울은 옛부터 귀족이나 權門의 중심지이기에 부재지주가 많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수입의 원천인 소유지로부터 천 리 가량 떨어져 살고 있었다.0193) 印貞埴,≪朝鮮農村雜記≫(1943). 관료출신들은 서울에 잔류하는 경향이 많았고 나아가 지방의 토지를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지방의 부유층 역시 재지기반을 배경으로 서울로 가거나, 인근 지방 도읍지로 이주하여 부재지주 경영을 하는 경향이 많았다고 한다.0194) 朝鮮總督府 取調局,≪小作農民에 관한 調査≫(1912).

 서울에 사는 부재지주의 특징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토지를 경영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곡창지대인 남조선지방의 지주에게서 많이 발달했다고 한다.0195) 위와 같음. 18세기 중엽≪擇里志≫충청도조에 있는 경성거주 부재지주 부분 역시 그러한 경영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청도는 물산이 영·호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서울에 가까운 위치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으며, 경성 世家들 가운데 이 도에다 田宅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거로 만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0196) 李重煥,≪擇里志≫八道總論 忠淸道.

 부재지주의 일반적인 토지소유와 경영형태의 특징에 대해서는 量案 분석과정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0197) 金容燮,<量案의 硏究>(앞의 책, 1995), 104쪽. 즉 이 시기 농민들은 面界를 넘나들면서 農地를 소유하기도 하고 경작하기도 하고 있었다.≪大邱租岩面量案≫에는 많은 起主가 기재되어 있지만, 이들을 그 곳의 戶籍臺帳과 대조해보면 面 내에 살고있는 기주는 1/3에 불과하고, 나머지 2/3는 주변 면이나 그 밖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대지주가의 경우 면계·郡界 더 나아가서는 道界를 넘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양안에서 이들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양상은≪古阜郡聲浦面量案≫의 분석에서도 지적되고 있다.0198) 金容燮,<『古阜郡聲浦面量案』의 分析>(≪東方學志≫76, 1992;위의 책). 이러한 양상은 지주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농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인접한 접경지역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정약용은 그러한 민전의 분산적 형태에 대해 “대개 한 사람의 토지는 수 개 마을에 흩어져 있어 여러 작인이 경작한다”0199) 丁若鏞,≪牧民心書≫권 5, 戶典 稅法.고 하였다.

 이같은 부재지주의 토지지배 양상은 결코 면이나 군현단위의 양안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지지배의 분산적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17세기 南人으로서 영의정까지 지냈던 權大運 7남매의 分財記가 있다.0200) 崔淳姬,<權大運 諸同生 和會成文>(≪文化財≫13, 1980). 여기에 따르면 분재된 토지의 소재지는 경기·충청·강원 3도, 8군에 걸쳐 있었다. 그 면적은 경기·충청·강원도에 걸친 畓 483두락과 강원도 양구의 70負 2束, 그리고 田의 경우 경기도 교하·부평·강화·양천의 11日耕과 강원도 양구와 경기도 부평·가평의 2결 51부 4속이다. 특징적인 것은 소속된 노비의 거주지와 토지소재지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분산된 토지를 소속된 노비가 직접 경작하지 않았다면 작인을 통한 지주경영이 틀림없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부재지주의 토지지배방식이 거주지 주변의 토지지배방식이 아니라 거주지와 무관하게 매매·개간 등을 통한 대토지 집적과 농업경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 유통경제 발달에 따른 전국적인 유통망의 존재이다. 특히 지주들은 水路를 통해 한 해의 수확물을 서울로 운반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방법이 비록 배가 침몰할 위험성이 있더라도 이익은 다른 것에 비할 바 없이 컸기 때문이다.0201) 徐有榘는≪林園經濟志≫倪圭志 권 2, 貨殖 貿遷 治生須貿遷에서 “貿遷하는 道는 배가 이익이 가장 크고 수레와 말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富商大賈의 경우 남으로는 倭와 통하고, 북으로는 중국과 교역을 행하게 되면서 각지의 물산이 풍부하게 서로 교역되었다. 그 중 서울은 물산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으로서, 開城이나 東萊·密陽·義州·安州·平壤 등과 함께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어 있었고, 왜·중국과 연결하는 국제무역은 국내에 비해 2배의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0202) 위와 같음.

 이러한 원격지 유통경제를 배경으로 한 경영형태는 구래의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방식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서울에서 사는「京居地主」의 농업경영형태야말로 이 시기 농업경영의 구조와 특질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경거지주」가 지주적 토지소유의 전형으로서 특히 18·19세기에 들어 급격히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배경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농업경영방식은 중간 관리인인 舍音(마름) 등을 통한 간접적인 관리방식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재지주경영의 성패는 관리인의 작인 통제와 그들의 경영에 대한 관심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경영에 소홀할 가능성이 많았고, 비록 유통경제가 발달한 곳을 배경으로 이익이 많이 남는다 하더라도 경영상의 위기를 초래하기 십상이었다.0203) 崔潤晤, 앞의 글(1997).

 <勸農節目>에 있는 부재지주의 마름에 대한 관리방식 가운데 특히 작인 선택에 대한 조항이 많고 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한 해의 농사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마름이 함부로 작인을 移作시키고 있는 사례가 빈번한 데 대해 경계하면서 작인이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면 이작시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0204)≪勸農節目≫(1887).

 宮房田도 대표적인 부재지주경영의 하나였다. 궁방전은 折受·買得 또는 民結免稅地로 구성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잔존형태로서 왕실이나 궁방의 권력을 배경으로 그들이 대토지소유자로 존재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궁방전의 토지집적방식은 17세기 이후 급격히 확대되는데 그 주대상은 量案上의 無主陳荒地나 量案外 加耕地 등 국가 수세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토지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궁방전은 절수 외에도 개간·매득 방식에 의해 확대되어 갔고 나아가서는 민결에 대한 면세지까지 면세·면역의 특권이 부여되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0205) 金容燮,<司宮庄土에서의 時作農民의 經濟와 그 成長-載寧餘勿坪庄土를 中心으로->(≪亞細亞硏究≫19, 1965; 앞의 책, 1995).
朴廣成,<宮房田의 硏究>(≪仁川敎大論文集≫5, 1970).
朴準成,<17·18세기 宮房田의 확대와 所有形態의 변화>(≪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李榮薰,≪朝鮮後期 社會經濟史≫(한길사, 1988).
都珍淳,<19세기 宮庄土에서의 中畓主와 抗租>(≪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李政炯,<17·18세기 궁방의 민전 침탈>(≪釜大史學≫20, 1996).
궁방전은 그 형성과정을 통해 볼 때 1종 有土와 2종 유토 그리고 無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종 유토는 토지소유권이 궁방에 있으며 궁방-작인 구조로 경영되었으며, 2종 유토는 민유지이지만 절수·투탁에 의해 형성되면서 개간 주체인 농민들의 사실상의 소유권이 궁방에 양도된 경우였기 때문에 그러한 권리가 반영되어 궁방-중답주-작인으로 구조화되었다. 그리고 무토의 경우는 민유지로서 3∼4년(정조대 이후 10년)마다 번갈아 가면서 조세를 궁방에 납부하던 토지였다. 이러한 궁방전은 18세기말 19세기초에 이르면 전 경지면적의 3%인 4만여 결에 이르게 되었다.

 이같이 궁방전의 토지집적과정이 농민의 토지에 대한 권리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방의 부재지주경영은 민전에서 보이는 것과 또 다른 특징을 가졌다. 우선 절수 및 매득과정에서 민전이나 둔전을 침탈하는 사례가 많았고 그에 따라 농민과의 소유권 쟁송이 끊이지 않았다. 농민층이 갖고 있는 권리와 궁방의 권리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재지주로서의 왕실·궁방은 장토농민을 관리하는 데 있어 중간 관리인을 두고 있었다. 중간 관리 계통은 宮差-監官-마름으로 연결되거나, 導掌-감관-마름으로 연결되는 두 계통이 있다. 마름은 장토관리의 최하 담당자로서 감관과 함께 장토를 관리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그 위에 궁차나 도장이 조세 징수차 파견되면 조세를 수합하여 상납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장토를 관리하는 방식에는 궁차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있고, 도장과 같은 청부인을 통해 운영권을 위임하는 경우가 있었다.0206) 金容燮,<司宮庄土의 管理-導掌制를 中心으로->(≪史學硏究≫18, 1964). 이같은 도장의 역할은 해당 지역의 양반이나 평민·천민이 임명되었으며 도장권은 특권으로 인식되어 매매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궁방의 부재지주경영이 중간 관리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 가운데 궁방으로부터 대여받은 것을 다시 대여하는 二重時作이 성립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형태는 주로 中畓主 또는 中賭地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궁방전 조성과정에서 결합된 제권리의 타협안으로서 나타난 결과였다. 특히 有土 내 永作宮屯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장토를 중심으로 궁방과 농민과의 권리가 중첩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量外無主 閑曠地를 개간하고 이후에도 ‘築堰築垌 起墾作畓’하는 농민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에서 연유했다. 이같은 토지에서는 1종 유토처럼 1/2을 수취할 수도 없었고, 2종 유토처럼 1결당 23두를 수취할 수도 없었기에 1결당 租 200두로서 소출의 1/4 정도를 수취하고 있었다.

 민전이나 궁방전에서의 부재지주경영은 구래의 병작제적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 내부에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중답주가 성립하거나 혹은 賭地權이 매매되는 등 새로운 경영형태가 나타났다는 점이 이전 시기의 경영과 차이가 있다.

나) 재지지주경영의 변동

 지주경영 가운데 구래의 토지집적에 의한 소유확대보다는 상품경제를 배경으로 경영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지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재지주의 경우는 원격지의 토지를 경영하는 데 있어 중간관리자를 통해 수취하기 때문에 부실한 경영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지만 재지지주의 경우는 거주지와 자신의 토지 소재지가 가깝기 때문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구래의 병작제적 방식과 다른 형태의 경영방식을 구상하는 새로운 재지지주의 경영방식을 택하는 지주가 있었다.

 우선 이와 같은 지주로서 주목되는 형태가「庶民地主」이다. 서민지주는 지주적 토지경영방식 내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의 전제가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봉건적 외피를 어느 정도 탈각하면서 발전해왔는가를 구명한 소작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0207) 허종호, 앞의 책. 한편 상업적 농업을 배경으로 한「經營型富農」연구에 이어 양반지주의 변신을 융커경영적인 형태로 파악한「經營地主」論은, 지주층이면서 농업생산에 직접 참여한 경영지주적인 농업생산방식이 경영형부농적인 그것을 매개로 企業農的이고 자본주의적인 농업생산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0208) 金容燮,<羅州 李氏家의 地主經營의 成長과 變動>(≪震檀學報≫42, 1976;≪韓國近現代農業史硏究≫, 一潮閣, 1992).
―――,<朝鮮後期 兩班層의 農業生産-自作經營의 事例를 중심으로->(≪東方學志≫64, 1989).
또한 양반토호가의 농업경영 형태를 위로부터의 자본주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여 지주제 경영과 직영지 경영을 혼합한 과도기적 형태로 규정하고 그것을「경영형지주」로 범주화한 연구도 지주경영을 주목한 것이다.0209) 李世永,<18·19세기 兩班土豪의 地主經營>(≪韓國文化≫6, 서울大, 1985).
―――,<대한제국기 농촌사회경제구조의 변화-1900∼1903년 경기도 광주군 북방면을 중심으로->(≪韓國文化≫16, 1995).

 이같은 지주경영의 공통점은 지주가 스스로 경영 확대를 꾀하는 적극적인 경영 방략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번째 특징으로서, 부재지주의 경우 경영에 적극 개입하기 어렵다는 점이 부재지주경영의 위기를 초래하기 쉬운 요인이 되었지만, 재지지주경영은 농지를 한 곳에 집중화시킴으로써 농지 관리가 쉬울 뿐 아니라 지대 징수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원거리 토지를 계속 방매하고 근거리의 토지를 매입함으로써 토지를 집중시켜 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예컨대 한말 일제하 지주경영 사례 가운데 江華 金氏家는 농지를 집중하는 방법으로 경영 합리화를 꾀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강화도의 屬島인 석모도에 적지 않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도 소홀하고 지대 징수도 어려웠다. 이후 이를 처분하고 강화도 북단의 三海面 일대를 중심으로 농지를 집중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재지지주로서 농지를 거처로부터 當日程內에 집중시켜 그 경영에 편의를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0210) 金容燮,<江華 金氏家의 地主經營과 그 盛衰>(앞의 책, 1992).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경영지주의 두번째 특징은 分半打作의 병작제 지주경영을 되도록 줄이고 많은 부분을 자작경영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지주층의 경우는 지주제 경영과 직영지 경영을 혼합한 과도기적 형태이다.

 이들은 경영지주의 전통을 계승한 경우로서, 羅州 李氏家의 지주경영 가운데 한말·일제 초기 농지 160여 두락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82두락을 자작으로 경영하고, 戶外집(호지집) 소작농민 7세대에게 50∼60두락, 門中人 소작농민 수세대에게 25두락을 대여하는 방식으로서 수대에 걸쳐 행함으로써 경영 합리화를 꾀하고 있었다.0211) 金容燮,<羅州 李氏家의 地主經營의 成長과 變動>(위의 책). 海南 尹氏家의 고종 9년(1872)의 자작경영 역시 전체 18결 40부 2속 가운데 약 16.5%인 3결 4부 4속을 차지했지만, 1894년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29.9%로 확대되었다. 지주경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유가 자작지 경영 확대로 나타난 좋은 예로 볼 수 있다.0212) 崔元奎,<韓末 日帝下의 農業經營에 관한 硏究-海南尹氏家의 例->(≪韓國史硏究≫50·51, 1985), 297쪽<표 6> 自作地 규모 변동상황 참조.

 세번째 특징은 지주경영에 있어 임노동을 이용한다는 점에 있다. 재지 경영지주의 자작지 확대를 통한 家作은 병작지주가 자기 소유 또는 자기 지배하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자작을 하는 것이 병작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같은 병작지주의 자작경영으로의 전환은 대지주의 경우보다 중소지주에게 많았다. 이들은 병작을 되도록 줄이고 노비나 고공을 이용하여 자작경영을 확대시킴으로써 수입을 늘리고자 하였다.

 羅州 李氏家의 호외집을 이용한 지주경영이 그러한 예인데, 이들 호외집은 무산자로서 일종의 고용농민이었다. 이같은 지주경영은 구래의 생산관계를 보여주지만 임노동을 고용한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그것은 마치 雇農을 주축으로 운영되는 독일의 융커경영과 흡사하지만 지주권이 융커경영에서와 같이 강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농업생산에 적극 참여하는 이들 양반지주층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자본주의 이행방식을 전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네번째 특징으로서 양반층이 아닌 일반 서민층 가운데 상인지주나 부농층의 지주경영형태의 출현이 주목된다.0213) 허종호, 앞의 책, 제1장 3절 병작제 발전에서 발생한 새로운 추세. 신분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지적된 서민지주의 존재는 특권적인 양반지주에 비해 경영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이같은 경영 합리화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재지기반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었다. 예컨대 경거지주인 박진사의 토지를 1,000냥으로 사들인 개성의 王彦鏞이 그러한 예로서 부재지주경영의 위기에 편승하여 토지를 사들이는 경우이다.0214) 허종호, 위의 책, 제1장 3절 2항<자유>소작인과 서민지주의 장성. 20∼30년간에 10만 평의 토지를 사들인 황주의 李得烈이나 그 답의 전 주인 황륜, 광해군의 궁장토를 退賭地로서 100냥을 주고 산 개성의 王彦庸 등도 그러한 대상인 지주들이다.0215) 홍희유·허종호,<19세기 초·중엽의 경제형편>(≪김옥균 연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1964;≪김옥균≫, 역사비평사, 1990).

 이들의 지주경영은 신분적으로도 작인층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쌍방간에는 경제적 관계로 지대 수취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같은 비특권적 지주의 출현은 지주경영 중심의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잉태하였을 뿐 아니라 구래의 봉건적 외피를 탈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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