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4. 임노동의 발생
  • 1) 농민층의 분화
  • (1) 부역제의 한계

(1) 부역제의 한계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 보편화되고 있던 임노동형태는 필연적 현상으로서 당시의 사회경제적 산물이었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여러 부문에서 임노동이 발생하는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첫째로, 신분적 토대 위에서 운영되던 노동력의 강제동원체제인 賦役制가 이 시기에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끔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리학적 지배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봉건적 사회질서를 다시 한번 재편성하면서 성립한 조선왕조는 건국 당초에 노동력 수취체제로서 부역제를 마련하였는데, 이에 의거하여 일반 백성은 身役으로서 국가가 필요한 모든 노동활동에 동원되어야 했다. 흔히 ‘役’으로도 일컬어지는 국가의 노동활동에는 노동의 성격에 따라 軍役·職役·徭役의 구별이 있고, 노동자의 신분에 따라 良役·賤役의 구별이 있었다.0256) 劉元東,<國家財政>(≪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522쪽. 그런데 이와 같은 부역제는 성립 당초부터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良人皆兵制, 兵農一致制의 원칙 아래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양인 장정이 부담하던 군역제는 경제적 뒷받침이 안되는 給保制에 의존함으로써 처음부터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府兵制의 정신에 의해 國役을 지는 자에게는 누구나 그 지위에 상응하는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지급한다고 하였지만, 科田法에서는 농민에게 결코 한 평의 토지도 지급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농민에게 군역을 강요하였다.0257) 車文燮,<壬亂 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上·下)>(≪史學硏究≫10·11, 1961), 120쪽.

 봉건국가는 군역뿐 아니라 요역도 일방적으로 강요하였다. 요역은 중앙 및 지방의 관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농민의 노동력을 징발·사역하는 無償의 강제노동이었다. 15세기말에 편찬된≪大典續錄≫에 의하면, 당시 농민들이 부담하던 요역은 進上·貢物 등의 생산과 운반, 사신들의 짐 운반, 성곽·도로·제방·목장·공공건물·陵墓 등에서의 토목공사, 얼음·숯·석회·광물·무기·화약의 제조 등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0258)≪大典續錄≫권 2, 戶典 徭賦. 봉건국가는 이같은 요역에 농민을 징발하면서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였다. 즉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經國大典≫에서는 무릇 토지 8結에 1명의 부역을 내고, 1년에 6일 이상 노동을 시킬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0259)≪經國大典≫권 2, 戶典 徭賦. 그러나 이것은 한 번도 제대로 집행된 일이 없는 허구적인 조처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요역은 부담량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관의 자의적인 수탈이 처음부터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잡다한 요역의 노동량은 부역군을 사역할 수 있는 기간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工役을 원만히 진행시킬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일의 책임을 맡은 관리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부역에 응하는 농민들의 거주지와 노동현장과의 거리도 고려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왕래와 복무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예컨대 皂隷·羅將의 근무처는 서울이었지만, 그것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경기·충청·강원·황해도 등 지방의 농민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부역군들은 대개 식량·기구 등을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부담이 과중하였다.0260)≪中宗實錄≫권 31, 중종 12년 12월 무오.

 특히 당초부터 부역제에는 布納化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 역은 신역을 원칙으로 하여 개개인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것이었는데, 立役者가 질병이나 혼인·喪 등의 일을 당했을 때는 신분이나 직역에 따라 차이있게 역을 면해주거나 代役을 허용해주었다. 이를 악용하여 대역의 풍조가 만연해지면서 15세기에 이미 대역을 공인하게 되고 대역의 값이 정해지고 있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身役制의 원칙이 무너지고 布役制가 법제화되었다. 비록 모든 역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보병에 적용된 軍籍收布法은 역제 전반의 동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0261)≪中宗實錄≫권 94, 중종 36년 12월 임신. 신역이 포납화하는 속에서 봉건국가는 역의 근본 의미를 잊어 갔고, 그리하여 身布를 일반재정에 충당하는 데 급급하였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탐관오리들은 수탈을 목적으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자행하니 농민의 부담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역제의 동요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賦稅의 일종으로 바뀐 軍布의 부담은 그 부담액이 과중할 뿐 아니라 역의 종류에 따라 고되고 무거움과 헐하고 가벼움에 차이가 있어, 농민들이 과중한 양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였고, 이 때문에 그 운용이 매우 어려웠다.0262) 鄭演植,<17·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123∼137쪽. 그리고 漕軍과 같이 신역이 아직 징발되는 곳에서도 苦役을 불가피하게 하는 제도적 불합리성에 더하여 탐관오리들의 핍박이 가중되어 그 입역조건은 17세기에 이르면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부역꾼들은 소극적으로는 대립을, 적극적으로는 流亡을 꾀하여 應役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도 유망현상이 보이기는 했지만, 17세기에 이르러 그 현상은 한층 두드러졌다. 稅穀을 운송하는 노동인 漕役의 경우, 인조 27년(1649) 사헌부 집의 金弘郁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고된 조역 때문에 流移逃散하는 조군이 10 중 8, 9이요, 가산을 겨우 지탱할 수 있는 조군이 10 중 2, 3뿐이었다고 한다.0263)≪備邊司謄錄≫13책, 인조 27년 3월 19일. 조군의 유망은 응역자의 부족현상을 가져왔다. 숙종 21년(1695) 참찬관 崔奎瑞의 보고에 의하면, 한 사람의 조군을 확보하고자 하여 조사에 나서도 열 집이 모두 빈 집이며, 끝까지 추쇄하고자 하니 온 고을이 소연하여 마치 난리를 겪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0264)≪備邊司謄錄≫49책, 숙종 21년 2월 24일.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부역노동에서도 그 양상이 같지는 않더라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부역노동 가운데서도 부정기적이고 일시적인 노동력 징발은 민호의 田結數를 기준으로 하는 요역이었다. 요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공물의 생산과 운송에서의 노동이었다. 그런데 17세기에 大同法이 시행되면서 공물과 관련된 노동력 징발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었다.0265) 韓榮國,<湖西에 實施된 大同法-大同法硏究의 一齣-(下)>(≪歷史學報≫14, 1961), 124쪽.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完)>(≪歷史學報≫24, 1964), 112쪽.
아울러 지방 군현의 일부 요역도 布納化되어 갔다. 그러나 신역으로서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은 아직도 여러 종류가 남아 있었다. 山陵·궁궐·관아·성곽·제언·도로 등의 토목공사에 부역노동이 강행되고 있었다. 17세기초의 山陵役에는 대체로 8천∼9천 명의 인부들이 징발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었다.0266)≪宣祖實錄≫권 130, 선조 33년 10월 정해.
≪仁祖實錄≫권 22, 인조 8년 4월 병인.
그런데 이와 같은 요역노동에서도 조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노동 부담과 열악한 작업조건 아래서 동원된 농민들은 가급적 이를 기피하고자 하였고, 대립·投託하던 농민들은 마침내 유망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것은 응역자의 감소현상을 초래하였으니, 영조 11년(1735) 경기감사 趙明翼의 보고에 의하면, 楊州牧의 전체 民戶 9천여 호 가운데 응역할 수 있는 민호는 5백여 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0267)≪各陵修改謄錄≫을묘년 윤4월 24일.

 위정자들은 피역자가 날로 증가하고 그리하여 응역자의 감소현상이 심해지자 그들이 계획했던 공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궁궐이나 각 관청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差備軍노동이나, 지방관청에서 주관한 축성·도로공사 등 요역뿐 아니라 기술노동을 행사하고 있던 관청수공업장에서도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위정자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우선 役弊를 일으키고 있던 탐관오리들의 탐학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응역자의 피역을 법규로써 엄히 규제하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番次規定을 완화하여 그 부담을 경감해주는 듯하였다. 잡역에는 가급적 동원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대책은 부역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역과 유망이 날로 심화되고 있던 상황 속에서 그것은 부역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고식적 의도에서 제안된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요역에서 응역인원이 부족하자 승도를 대신 입역시키고 있었는데 이것도 임기응변적 조처였을 뿐 본질적 대책은 아니었다.0268)≪備邊司謄錄≫27책, 현종 9년 11월 6일. 피역의 물결은 이제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역을 담당할 사람이 없는 속에서 부역제는 의미가 없었다. 부역제는 이제 원형대로 돌이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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