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4. 임노동의 발생
  • 1) 농민층의 분화
  • (3) 노동예비군의 형성

(3) 노동예비군의 형성

 셋째로, 농민층 분화를 주된 요인으로 하여 생성된 ‘可賃勞動人口’가 이 시기에 크게 증대한 점도 임노동 발생의 중요한 조건이 되고 있었다. 노동형태에서 임노동이 주요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수요가 창출되어야 함과 아울러 노동력이 자유롭게 공급되어야 한다. 특히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 또는 생산수단을 축적한 자본가의 출현과 함께 신분적, 인격적 예속으로부터도 그리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해방된 자유로운 노동력의 공급이 전제되어야 한다. 원래 자유로운 노동자란, 그들 자신이 노예 또는 농노와 같이 생산수단에 결박되어 있지도 않고, 자영농과 같이 생산수단, 즉 토지가 그들에게 속하여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인격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품팔이꾼을 말한다. 이 자유로운 노동력이 시장에서 자본과 만나 생산관계를 이룰 때 그것은 자본주의적 임노동으로 전환된다.0279) 전석담·허종호·홍희유,≪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0;이성과 현실, 1989), 144쪽.

 조선 후기에는 농촌사회가 여러 요인에 의해 부농과 빈농으로 양극화되고 있었다. 봉건정부와 봉건지주의 탐학·착취도 원인이 되고 있었지만 농민층의 분해가 내적 요인에 의해 급격히 진전되고 있어 농토에서 방출된 많은 유랑민이 임노동자화할 수 있는 조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18세기 李大圭는 그의≪農圃問答≫에서, 부자들은 넓은 땅을 차지하고 빈민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농사일을 하지 않고 호사롭게 살지만, 빈민들은 한 치의 땅도 없이 부자의 땅을 빌어 힘껏 농사지어도 겨우 소출의 절반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그렇지도 못하면 농사일에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 갈 뿐이라고 하였다. 또 품팔이조차 얻지 못하면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닌다고 당시의 농촌 실정을 표현하였다.0280) 李大圭,≪農圃問答≫均田制.

 농민층의 분해는 첫째 토지소유구조의 모순에서 촉발되고 있었다. 본래 조선왕조의 토지제도는 科田法에 의거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기본적인 전제로 하는 地主·佃戶制의 토대 위에 그 사적 소유를 일정하게 제약하는 국가의 토지지배권이 작용하고 있었다. 즉 과전법에서의 토지분급은 수조권에 의한 토지점유를 인정한 田主·佃客制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과전은 지배계층인 양반이 봉건국가에의 봉사와 충성의 대가로서 받았기 때문에 생산자 농민과 소유지를 정치적, 신분적으로 지배하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무상으로 수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0281)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 硏究≫(一潮閣, 1986), 296쪽. 그런데 16세기에 이르러 職田法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해소되고, 竝作制가 전면적으로 확대되면서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0282) 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6), 181쪽.
―――,<朝鮮前期 職田制의 運營과 그 變動>(≪韓國史硏究≫28, 1980), 107쪽.
이를 계기로 양반관료·토호 등 봉건지배층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욕이 강화되어 그들은 여기에다 그들의 경제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봉건지배층의 토지소유는 주로 정치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대토지소유자로 성장하여 갔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전국토를 거의 황폐화하고 국가재정을 거의 탕진케 한 倭亂·胡亂을 겪으면서, 조선왕조는 그 존속을 위해서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특히 농토의 확보가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개간사업이 정책적으로 추진되었다. 새로이 개간된 농지는 그것을 개간한 사람에게 소유권을 부여하였다. 개간에는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에는 왕실·관아·양반관료 등이 주로 참여하고 부분적으로 상인이나 부호 등이 참여하여 지주층으로 성장하였다.0283) 李景植,<17世紀의 土地開墾과 地主制의 展開>(≪韓國史硏究≫9, 1973), 96쪽.
金容燮, 앞의 책, 146∼149쪽.
이로써 전국 각지에는 새로운 宮房田·官屯田 및 양반층의 농장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 시기 이후의 토지소유관계에서는 신분적 속성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경제외적 강제가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품화폐경제가 급속히 진전하면서 토지소유에 있어서도 상인, 부호 등 비특권적 지주들의 토지집중이 늘어남과 아울러 농민들의 신분제적 구속에 대한 저항으로 인한 현상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계급적 관계에서도 봉건적 신분제도가 분해되기 시작하면서 신분적 대립은 약화되어 갔다.0284) 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占有-尙州量案硏究의 一端->(≪史學硏究≫15, 1963), 46∼48쪽. 그리고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생산력 증대는 상품유통을 촉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상인·부농·고리대금업자 등은 재화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고, 축적된 재화의 대부분은 수익성이 비교적 안정된 토지에 투자되었다.

 한편 화폐가 널리 보급되고 유통경제가 장시를 통해 농촌에 침투함에 따라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었다. 이 시기의 토지매매는 경제외적 강탈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었지만, 대체로 자유매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유매매는 숙종 14년(1688) 봉건정부가 궁방에 給價買土하면서 기본적 현상으로 자리잡아 갔다.0285) 전석담·허종호·홍희유, 앞의 책, 108쪽. 물론 상인·부농들이라 하여 순경제적 관계에 의거하여서만 토지를 사들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리대나 勒買도 상인·부호들의 주요 토지집적 수단이었다.0286) 李世永,<18, 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韓國史論≫9, 서울大, 1983), 189쪽. 상인·부호들은 고리대로 돈과 곡식을 빈농들에게 빌려주거나, 흉년·길흉사로 인해 농민이 곤궁함을 기화로 그들의 토지를 헐값으로 빼앗았다. 그렇다고 하여도 봉건적 특권에 의거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뺏는 일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는 양반관료들도 농민이 팔기를 원하는 토지를 시가에 준하여 사야만 했다.

 토지의 상품화는 일부 부유층으로 하여금 토지집중을 쉽게 하였으며, 그 반면에 빈농의 토지상실을 촉진시켰다. 특히 상인들은 그 동안 축적한 재화를 갖고 빈농 또는 몰락한 양반들의 토지를 틈나는 대로 매입하였다. 그리하여 冠婚喪祭 등 돈을 쓸 일이 생겨서 또는 빚을 갚기 위하여 굶주리고 힘없는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경작해오던 토지를 팔아 파산하여 갔다.0287) 朴趾源,≪燕岩集≫課農小抄 限民名田議.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토지, 즉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되어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서울 부근과 강화도 일대에서는 양반관료·상인들에 의하여 많은 토지들이 점탈당하고, 토지에서 유리된 무전농민들은 도시나 광산을 찾아 품팔이에 나서고 있었다.0288)≪備邊司謄錄≫59책, 숙종 34년 10월 8일. 영조 34년(1758) 당시 높은 지위에 있던 洪啓禧는 남쪽 지방에 100리나 연이은 기름진 논을 갖고 있었다.0289)≪英祖實錄≫권 91, 영조 34년 3월 계축.

 지주들이 수백 결 이상의 토지를 집적하고 있는 데 대하여 대다수의 농민은 1결 이상을 소유한 경우가 극히 적어 대부분 영세한 토지소유자이거나 무전농민들이었다.0290) 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農村經濟·社會變動-≫Ⅰ(一潮閣, 1970), 195쪽. 땅에서 내쫓긴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랑의 길에 나섰다. 유랑민은 종전에도 있었지만 18세기처럼 큰 사회적 문제로 된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학자들은 그 원인이 토지소유구조의 모순 때문이라 보고, 여러 가지로 토지소유의 제한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토지소유구조의 모순은 확실히 농민층 분해의 주범이었다.

 농업경영상의 변화도 농민층의 분해를 조장하고 있었다. 농지개간이 지주층에 의해 수행되면서 농민들은 오히려 소유지를 잃거나 감축당해야 했다. 이에 농민들은 자구책을 강구하여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영농방법을 개선하고 소득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였다. 나아가 일부 농민들은 경영방식도 바꾸어 갔다. 즉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들은 1인당 경작면적을 보다 넓혔고, 농민층 가운데서도 활동적이고 영리적인 일부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여 廣作을 하였다.0291) 金容燮, 앞의 책(1971), 143∼153쪽.
宋贊植,<朝鮮後期 農業에 있어서의 廣作運動>(≪李海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1970), 103쪽.
광작은 지주·자작농은 물론 소작농에게서도 행해졌다. 지주들은 토지 자체의 확대를 통해서,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 경영의 확대를 통해서 광작을 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 확대는 그 이면에서 소작지조차 얻기가 더욱 어려워진 많은 가난한 농민들을 농토에서 떠나게 하였다. 그들은 도시로 나아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 도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0292)≪備邊司謄錄≫170책, 정조 11년 정월 20일. 결국 이앙법의 발달, 광작의 보급은 일부 농민을 경영형부농으로 성장시킨 반면, 다수의 농민 특히 소작농을 토지에서 방출케 하여 농민층 분해를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면서 더욱더 격화되어 갔다.

 그리고 봉건적 착취나 우연적 자연재해도 농민의 離農을 재촉하였다. 이는 일찍이 조선 전기에도 보여진 현상인데, 특히 봉건적 착취는 봉건정부와 봉건지주의 양 측면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봉건정부와 봉건지배층의 착취는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심해지고 있어, 농민들에게 좀체로 자신의 삶을 증진시킬 물질적, 정신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조선 후기 봉건정부가 농민으로부터 징수한 수취체제의 기본은 田政·軍政·還政의 이른바 3정이었다. 3정으로 대변되는 부세수취체제는 비록 그 동안 永定法·大同法·均役法에 의해 다소 조정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계속 농민을 가혹하게 억압하여 농민의 삶을 곤궁에 이르게 하였다.0293) 方基中,<朝鮮後期 收取制度·民亂硏究의 現況과「국사」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39, 1986), 103쪽. 즉 영정법에 의해 전세율이 다소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전세 외에 여러 가지 세가 추가로 징수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세의 부담은 증가되었다. 예컨대 전세를 납부할 때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소모에 대한 보충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그 액수가 전세액 자체보다 훨씬 많아 실제 납부액은 법정 수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貢納制도 田稅化되어 大同米로 징수되면서 농민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나 대동법 이후에도 농민들은 여전히 進上이나 別貢을 부담하였고, 지방관아에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토산물을 징수하였다. 군역제도에 있어서도 균역법에 의해 군포 부담이 2필에서 1필로 감해졌으나, 그것이 시행된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군포의 착취가 가장 첨예한 사회적 문제의 하나였다.0294) 黃夏鉉,<良役의 實相과 均役法의 實施>(≪經濟史學≫3, 1979), 52쪽.

 당시 군포 징수는 단일 관청에 의해 통일적으로 이루어져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5군영과 정부기관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한 사람의 장정이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 역시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장정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봉건정부는 전국의 장정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재정 상태가 어려워짐에 따라 군포액을 임의로 증가시켰다. 인구는 그리 늘어나지 않았는데, 1670년대에 30만 필이던 군포액이 1700년대에는 50만 필로, 1720년대에는 70여만 필로, 영조 26년(1750)에는 100만 필로 늘어났다.0295)≪增補文獻備考≫권 156, 財用考 2. 여기에 수납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수령·아전들의 농간까지 겹쳐 白骨徵布, 黃口簽丁, 隣徵, 族徵 등의 폐단이 자행되었다. 부세수취과정에서의 봉건적 착취는 날로 심화되어 부세의 본래 모습을 상실케 할 정도에 이르렀다.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군포를 받아내는 백골징포, 어린아이도 군포 대상자로 등록하는 황구첨정, 친척과 이웃 사람의 몫까지 부담해야 하는 족징·인징 등의 작폐는 농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고향땅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15세기에는 농민들에게 가장 가혹한 착취수단이 전세였는데, 16세기에는 공납제도가 농민을 제일 못살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17세기 이후로는 군포의 수탈이 농민의 삶을 가장 고달프게 하였다. 이 시기에 군포에 의한 착취가 전에 없이 가혹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마침내 농민들은 고향땅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0296)≪增補文獻備考≫권 156, 財用考 3.
≪肅宗實錄≫권 60, 숙종 43년 8월 신해.
≪備邊司謄錄≫80책, 영조 2년 10월 6일.
군포 수탈은 남의 소작인으로서 가뜩이나 모진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더욱더 도탄 속에 몰아넣었다.

 군포를 비롯한 부세수취체계를 기화로 봉건정부에 수탈을 당하고 있던 농민들은 지주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소작료를 징수당함으로써 이중적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파행적 토지소유구조로 인하여 일부 지주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함에 대하여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소작농이 되어 가고 있던 현실이 17세기 이후의 조선사회였다. 경종 원년(1721) 사간원 정언 柳後明은, 백성으로서 1결의 땅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인가, 열 집이 있다면 제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두 사람밖에 없으며, 태반은 남의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0297)≪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9월 갑오.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토지를 집적한 지주들은 병작관계를 확대하여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착취하였다. 끝없는 탐욕으로 가득찬 지주들은 더 많은 소작료를 징수하기 위해 여러모로 농민을 괴롭혔다.0298)≪備邊司謄錄≫76책, 영조 즉위년 12월 29일. 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불러다가 자기 집 일을 시키기도 하고, 짐을 나르게 하는 등 사적으로도 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0299) 허종호, 앞의 책, 267쪽. 비위에 거슬리거나 경제외적 강제에 잘 응하지 않으면 여러 구실을 붙여 소작권을 박탈하였다. 소작권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 이래 자행된 부세수취와 소작료 징수에서의 수탈은 농민을 절대적 빈궁 속으로 빠지게 하였으며, 마침내 토지로부터의 이탈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봉건정부와 지주계급은 아무리 흉년이 심해도 감면 규정을 무시하고 이미 정한 액수를 농민으로부터 빼앗아냈다. 조선 후기에는 재난과 질병이 유난히도 심했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전국을 강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농민들은 각종 자연재해나 전염병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영조 9년(1733) 충청도·경상도지방의 기근 때에는 40여만 명의 飢民이 발생했고 그 중에서 1만 3천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0300) 趙 珖,<19世紀 民亂의 社會的 背景>(≪19世紀 韓國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188쪽. 이와 같은 기근은 농토의 황폐화를 가져왔고, 이로 인하여 농민들의 이농 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적 착취가 가혹해지고 있던 조건하에서 흉년은 농민 파산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농민층이 분해하여 다수의 농민들이 생산수단인 농토에서 유리되어 갔고, 그들은 결국 다른 생산부문에서의 노동예비군으로서 역할이 부여되어야 했다. 토지소유구조의 모순, 농업경영상의 변화, 봉건적 착취의 강화 등으로 인해 농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은 다시는 농토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러한 노동력은 사회적 분업이 분명해지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속에서 형성된 노동시장에 공급되어 가게끔 역사적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다. 더구나 부역제는 더 이상 현실에 맞는 노동형태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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