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4. 임노동의 발생
  • 2) 임노동자의 출현
  • (1) 유민의 증대와 대책

(1) 유민의 증대와 대책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촌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농민층 분화를 촉발시켜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의 양극으로 나뉘었다. 즉 토지의 상품화, 경영의 확대, 상업적 농업 등을 통해 양반관료·토호들은 더욱 더 많은 토지를 집적해갔고, 일부 경영형부농들도 재화를 축적하여 지주층으로 성장해 갔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성장에 희생되어 대부분의 농민들이 몰락의 길을 재촉받았다. 이에 더하여 고율소작료와 불합리한 지주·전호관계 등으로 인한 지주적 생산구조의 모순과 부세수취구조의 모순, 세제운영상의 폐단 등 봉건정부의 착취는 더 이상 그들을 토지에 묶어 두지 못하였다.

 농민층의 분해는 17·18세기를 통해 인구가 크게 증대함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자료의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하여도 기록에 의하면, 인조 17년(1639) 150여만 명이던 인구수는 효종 2년(1651) 200만 명을 돌파하고 현종 7년(1666) 400여만 명을 기록하더니, 숙종 4년(1678) 500만 명을 넘어서고, 숙종 19년에는 700만 명을 상회하였다.0301) 權泰煥·愼鏞廈,<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관한 一試論>(≪東亞文化≫14, 서울大, 1977), 317∼320쪽.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조선 후기 상품유통경제가 활성화되고 그리하여 도시가 발달하여 도시로의 농촌인구의 이동이 두드러지게 전개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전국 인구의 태반은 농촌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17세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농촌에서는 노동력 수요가 감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구의 증대로 인한 노동력의 과잉공급은 농민들로 하여금 더욱 농토에서 유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밖에 생활수단이 없는 無田農民들은 이앙법의 보급, 경영의 확대로 소작농조차 여의치 않게 되자 임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그들은 우선 농촌에서 고용기회를 찾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자 도시나 광산·포구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도시·광산·포구 등에서는 그들에게 고용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농토에서 방출된 직후에는 고용기회를 얻지 못하고 유리걸식해야만 했다. 그들은 노동력의 수요가 창출됨에 있어서는 고용예비군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당장은 정처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집단적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전국을 헤매야만 했다.0302) 李大圭,≪農圃問答≫均田制.

 유리걸식하는 流民 현상은 비단 조선 후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흉년이나 전염병, 그리고 탐관오리의 수탈이 심하여 견딜 수 없을 때는 언제라도 보여지고 있었다. 防納 등으로 인해 가혹한 貢賦의 부담을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16세기말 대대적으로 유랑의 길을 나선 바 있다. 그리하여 고향을 떠나 타향에 가서 토호의 소작인이 되어 호구를 강구했는데, 선조 16년(1583) 황해도 순무어사 金誠一의 보고에 의하면 큰 고을엔 수백 명, 작은 고을도 80∼90명 이상의 유민이 생겨나고 있다고 하였다.0303) 金誠一,≪鶴峰全集≫續集 권 2, 黃海道巡撫時疏. 17세기에 이르러 그 경향은 심화되었는데, 인조 때 趙翼의 보고에 의하면 마을마다 유민이 태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0304) 趙翼,≪浦諸集≫권 2, 因求言論時事疏. 18세기에 이르면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숙종 37년 전라도 務安지방에서는 5천 호 가운데서 2천 호가 떠났고, 경종 3년(1723) 평안도 龜城 고을에는 8천 호 가운데서 남아 있는 호수가 3천 호도 되지 않았다.0305)≪備邊司謄錄≫61책, 숙종 37년 2월 20일.
≪景宗實錄≫권 11, 경종 3년 3월 경자.
영조 5년(1729) 충청도와 평안도 일대에 가뭄이 계속되면서 46만여 명의 飢民이 발생하였다.0306)≪正祖實錄≫권 35, 정조 16년 6월 을축.

 고향을 떠난 유민·기민들은 대개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모여들어 행랑살이로 고역에 시달리거나 품팔이로 연명하기도 하였지만, 산 속이나 바닷가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경종 3년(1723) 평안도 昌城지방에는 수많은 외지의 유민들이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있었고, 전라도 바닷가, 섬에도 많은 유민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고 있어 정부에서는 새로이 고을을 설정하자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었다.0307)≪備邊司謄錄≫74책, 경종 3년 2월 21일.
≪備邊司謄錄≫61책, 숙종 37년 2월 8일.

 유민들의 상당수는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인구가 급증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효종 8년(1657) 8만여 명이던 서울의 인구수는 현종 10년(1669) 19만여 명으로 늘어나, 2배가 넘는 급속한 인구증가 현상을 보였다. 이는 인구조사에 다소 의심이 가게 하는 사실이지만, 유민의 서울 집중은 이 시기에 연중행사처럼 전개되고 있었다.0308) 金甲周,<18세기 서울의 都市生活의 一樣相>(≪東國大論文集≫23, 1984), 218쪽. 서울에는 그래도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정부가 미봉적으로 실시하던 구휼책도 서울이 우선이었기에 호구지책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유민들은 서울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변두리의 龍山·西江·麻浦·뚝섬·왕십리 등지에 집단거주지를 이루어 갔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서는 이같은 城外 지역주민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에서 들어온 유민들이 서울 변두리에 정착한 결과였다. 서울은 15세기 이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서 전형적인 중세 봉건도시였지만, 18세기를 전후하여 상품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의 물산이 집산되는 대상업도시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물산이 하역되는 곳은 용산·서강·마포·뚝섬 등의 京江浦口였다. 따라서 대량의 상품이 하역되는 이들 포구에는 물건을 운반하고, 지키고, 하역하는 등의 일이 끊일 새 없이 있었다. 농촌에서 쫓겨난 유민들이 정착할 수 있게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0309) 李世永, 앞의 글, 213쪽.

 그런데 농민의 이농과 유민의 증대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우선 그것은 사회현상적으로도 불안한 정국을 조성하고 있었다. 유민들이 집단적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시로 모여들어 걸식하는 부랑아가 되거나 산 속에 모여 도적이 된다는 것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불안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대규모의 기근이 휩쓸어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거나 심지어 人肉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0310)≪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5월 정축.
≪英祖實錄≫권 58, 영조 19년 11월 계해.
이는 정치도의상으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民本과 仁政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왕조의 위정자들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과제였다. 이 때문에 봉건국가로서도 일찍부터 義倉·常平倉 등을 설치하고 구호활동을 실시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국가 재정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봉건지배층도 자신들의 권력다툼에만 혈안이어서 민생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시책이라는 것은 미봉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농민의 부세 부담을 일시적으로 연기하거나 감축시켜 주고, 기근이 특히 심할 때는 納粟策 등을 실시하여 부민들의 양곡을 수집함으로써 기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거나 죽을 쑤어서 먹여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0311)≪顯宗實錄≫권 19, 현종 12년 5월 갑술.

 한편 유민의 증대는 궁극에 가서는 범죄를 유발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살길이 막막한 일부 유민들은 법을 초월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당시의 도적들은 거의 굶주린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말세의 도래, 變亂의 예고 등 근거없는 秘記·圖讖이 널리 유포되면 상황은 급박해진다. 18세기에는 사회 불안이 심화됨에 따라 각처에서 보다 공격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도적들 중에는 무기를 휴대한 火賊이나 水賊도 있었는데, 그들은 점차로 집단화 하는 경향을 띠었다. 유민임을 자처한 도적 집단도 있었으니, 流團이 그것이다.0312) 裵亢燮,<壬戌民亂 前後 明花賊의 活動과 그 性格>(≪韓國史硏究≫60, 1988), 187쪽. 이 시기 대표적인 도적으로는 張吉山의 무리가 유명하였다.0313) 鄭奭鍾,≪朝鮮初期 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164∼167쪽. 이에 대하여 봉건정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한 유민의 발생은 불가피하였고, 나아가 도적들의 횡행 역시 불가피한 것이었다.

 유민의 증대는 봉건적 체제의 유지와 관련하여서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봉건사회로, 사회 구성의 물질적 토대는 토지에 있었다. 따라서 전국의 토지를 장악한 봉건국가는 농민을 수취의 기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농민의 토지에서의 이탈은 비록 그들이 무전농민이었다고 하여도 봉건체제의 토대를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그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게 된 위정자들은 수취체제를 다소 조정하고, 賑恤정책을 표방하면서 농민들을 무마하는 척하면서 농민을 토지에 얽어매고자 하는 정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종래 시행된 바 있던 號牌法, 5家作統法을 강화하여 농민들이 농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법제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 수령들에게 책임지고 유민을 쇄환하도록 강력히 독촉하였다.0314)≪備邊司謄錄≫117책, 영조 23년 4월 2일.
≪備邊司謄錄≫119책, 영조 25년 2월 17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대책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게끔 역사적 현실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조선 후기의 유민현상은 그 원인과 상황이 전과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봉건적 착취나 자연재해가 주로 유민을 발생시켜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전에는 고향에서 유리하게 되면 타향에 가서 소작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그 곳에서 계속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민이라 하더라도 생산수단인 토지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봉건적 수탈, 자연재해의 압박뿐 아니라 토지소유구조의 모순,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침투, 농촌노동력의 과잉증대, 농업기술과 경영의 변화 등으로 인해 농촌사회의 분해가 이루어지면서 유민이 형성되고 있었다. 즉 농업노동력의 수요에 비해 농업노동자의 공급이 초과되는, 농촌사회 내부에서의 분해 작용으로 유민화가 촉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고향을 떠나 타향에 가더라도 그 곳이 농촌이라면 고용의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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