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4. 임노동의 발생
  • 2) 임노동자의 출현
  • (2) 고용관계의 수립

(2) 고용관계의 수립

 유민의 증대, 그로 인한 노동력의 과잉공급은 노동시장을 확장하여 고용관계를 합리적으로 처리함으로써만 근원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18세기 전후에는 노동시장도 전술한 바와 같이 점차 확장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땅없는 농민이 여기저기 구걸하러 다니다가도 마침내는 고용되어 살아간다고 하였는데,0315)≪承政院日記≫431책, 숙종 32년 8월 16일. 고용노동이 이 시기에 다양하고 보편적이었음은≪흥부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흥부는 가래질하기, 나무베기, 짐싣기, 물긷기, 등짐지기 등 다양한 노동에 고용되고 있었다. 당시 떠돌아다니던 유민들은 흥부와 다를 것 없이 생산부문, 비생산부문에서 또는 도시와 농촌에서 품팔이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에 위정자들 중에는 현실을 직시하여 유민의 실태를 인정하고 그들을 새로운 일자리에 고용하자는 적극적 자세를 보인 사람도 있었다. 정조 4년(1780) 영의정 金尙喆은 서울로 모여드는 유민들이 고향에 돌아가도 농토가 없어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굳이 쇄환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차라리 일자리를 마련해 주자고 주장하고 있다.0316)≪備邊司謄錄≫161책, 정조 4년 2월 26일.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에 앞서 유민을 京江民의 雇工, 즉 머슴으로 수용케 하는 방안을 논의한 바 있었다. 실제로 고공으로 立案받은 자도 많았다. 그리고 종래 봉건정부가 부역노동으로 충당하던 축성·능묘·도로 등의 노동력도 이 시기에는 부역제가 역할을 하지 못하여 일꾼을 고용해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민들은 그러한 곳의 일꾼으로 고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無田農民 중의 일부는 계속 농촌에 남아서 농업노동에 고용되고 있었다. 소작지 확보에 실패한 농민일지라도 농사지을 기회는 있었다. 농업경영 방법의 개선으로 경작지를 확장하고 또 상업적 농업을 시도한 경영형부농층은 그 경영을 가족노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특히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이앙기에 단시일 동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임노동자의 고용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영조 35년(1759) 충청도 永春현감 李敬玉의 보고에 의하면, 영춘현의 호수는 4년 전에 2,300여 호였으나, 그 동안 840호가 파산하거나 유망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가호 중에도 300여 호는 구걸하여 먹거나 품팔이로 연명하고 있다고 하였다.0317)≪英祖實錄≫권 93, 영조 35년 6월 경신.

 그런데 농촌사회에서의 임노동에는 무전농민뿐 아니라 자기 땅이나 소작지를 어느 정도 경작하는 영세농민의 경우에도 家計의 유지가 곤란할 때, 또는 좀더 소득을 올리고자 할 때는 임노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우의 임노동을 ‘日雇’ 또는 ‘날품팔이’라고 하는데, 일고라고 하여도 때로는 며칠, 몇 달 동안 고용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들은 머슴살이 즉 고공이나, 행랑살이 즉 挾戶와 같은 계층과는 구별되어 ‘計日取直’이라 하여 노동일수를 계산, 품삯을 받고 있었다.0318) 金容燮, 앞의 책(1971), 184쪽. 자기 땅이나 소작지를 경작하고 있는 농민까지 임노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전농민의 임노동 기회는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전농민의 수는 농촌사회의 분해가 심화되면 될수록,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늘어났다. 18세기초의 경상도와 충청도에는 각각 5만 명, 10만 명이 넘는 무전농민이 발생하고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0319)≪肅宗實錄≫권 41, 숙종 31년 3월 임인.
≪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3월 계해.

 무전농민들은 농촌에서 안주할 수 없었으므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농토는 고용의 기회를 별로 주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포기하고, 그리하여 농민으로서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유랑의 길을 나섰다. 그들은 고용시장을 찾아 나섰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이 생계의 수단임을 알고 자유로운 임노동의 길을 택했다. 이에 상응하여 비록 제한적이지만 도시·광산·포구 등에는 노동시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봉건정부가 토목공사, 물건만들기, 잡일 등으로 일을 시키면서 품삯을 주고 있었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심부름이나 짐나르기 등 허드렛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때로는 틈을 타서 장사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고 있었다.

 그리고 광산에는 작업과정이 복잡하여 많은 사람의 일손이 필요하였는데,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일 자체는 단순노동이었다. 당시 정부에서도 광산개발을 촉진하고 유민을 처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임노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원격지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전국 해안이나 강변에 포구가 발달하고 있었는데, 예컨대 京江浦口나 江景浦口 같은 곳에는 稅穀船이나 商船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어 물품을 싣고 내리는 작업이 항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유민들은 그들의 노동력이 요구되는 사회 현실에 부응하여 임노동자로서의 자신의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즉 임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부합되는 속에서 새로운 고용관계의 수립을 위한 여건이 현실적으로 마련되어 가고 있었고, 노동예비군·고용예비군으로서의 유민들은 이러한 상황에 적극 부응하게 된 것이다. 이제 유민들은 정부의 각종 쇄환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농촌을 떠나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賃傭爲業’하는 길이었다. 봉건정부는 이들을 문제시하여 ‘游手之徒’, ‘無賴之輩’로 간주하면서도 토목공사 등 각종 작업에 이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종래의 부역노동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봉건정부로서도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있던 이들 전업적인 임노동자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0320) 尹用出,≪17·18세기 徭役制의 변동과 募立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173쪽. 즉 유민들은 이후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만을 생계의 수단으로 하면서, 그 어떤 존재에서도 해방되어 전업적인 임노동자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의 임노동은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거기에 가까운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맹아라 할 수 있다. 생산수단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로운 노동력이 시장에서 자본과 대립하고 접촉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적 임노동이 된다.

 조선 후기 임노동자의 출현은 그 외형에서 보편화, 전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성격에서도 노동형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용노동은 고공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일찍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가부장적, 예속적 고용이었다. 경제외적 강제가 노동활동 전반에 작용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후기 보편화된 임노동은 예속에서 벗어난 경제적 노동형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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