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1) 자영수공업체제의 형성과 발전

1) 자영수공업체제의 형성과 발전

 조선 후기에 이르러 京工場과 外工場을 근간으로 한 官營手工業은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私匠의 自營手工業이 전면에 등장하여 널리 발달하고 있었다.

 효종 9년(1657) 承政院에 소속 匠人이 없어 兵曹에서 주는 약간의 價布로 두서너 명의 사장을 雇立하고 있었다고0356)≪承政院日記≫152책, 효종 9년 9월 25일. 할 정도로 일부 경공장에서는 소속 공장들이 없어져 사장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후 정조 9년(1785)에 편찬된≪大典通編≫의 단계에서는 경공장의 30개 司 중 司贍寺·典艦寺·昭格署·司醞署·歸厚署 등 5개 사의 관아 자체가 혁파되었다. 또 內資寺·內贍寺·司導寺·禮賓寺·濟用監·典設司·掌苑署·司圃署·養賢庫·圖書署 등 10개 사는 소속 공장이 없어지고 나머지 각 사도 공장의 종류와 수가 변동되었으며 수공업자들을 등록하는 법, 즉 工匠成籍法이 폐지되었다.0357)≪大典通編≫工典 京工匠.

 한편 외공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라도의 경우≪經國大典≫편찬 당시에는 외공장이 모두 778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정조 23년에는 ‘元匠時存者’가 불과 8명뿐이었다.0358)≪日省錄≫정조 23년 5월 30일. 이는≪대전통편≫에서 “원전에는 각 도 各營에 모두 공장의 名色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공업자를 本道에 등록하여 관리하는 규정이 없어졌다”고 하고 “관청에서 일할 것이 있으면 私工을 賃用한다”0359)≪大典通編≫工典 外工匠.고 하는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관영수공업이 붕괴되고 민간수공업이 발달된 조건하에서 관청에서 일할 것이 있으면 사장을 임노동자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더 나아가 고종 4년(1867)의≪六典條例≫에서는 개인수공업자를 임용하는 경우의 日給賃料를 규정해 놓고 있다.0360)≪六典條例≫戶曹 放科.

 물론 이 때부터 바로 관영수공업이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廣州·楊口 등의 分院은 아직도 관영의 형태로 존속하였으며 고종 2년(1865)에 편찬된≪大典會通≫에서는 분원에서 1년에 2차례에 걸쳐서 磁器를 진상하는 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0361)≪大典會通≫工典 雜會. 조선초에 창의문 밖의 蕩春臺에 설치된 관영의 제지수공업체인 造紙署는 表盞咨文紙를 비롯한 제반 紙地를 생산하면서 19세기까지 존속해오다가0362)≪漢京識略≫. 고종 19년(1882)에 이르러서야 혁파되었다. 또한 영조 9년(1733)에 尙衣院에서 행하였던 매년의 5織造所는 중지하고 그 제도를 폐지하였으나 정조 10년(1786)에도 비단을 제조하는 일부 직공들이 존속되어 있었다.0363)≪日省錄≫정조 10년 정월 23일.

 그러나 19세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던 이러한 소수의 관영수공업도 실질적으로는 점차 민영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분원의 경우 원래 私造磁器의 판매가 허용되어 분원 안에 따로 私窯가 있었으며 여기에서 분원의 장인들은 ‘私燔의 利’를 누리고 있었다.0364)≪分院邊首節目≫. 또 이것이 점차 확대되고 여기에 상인자본이 침투하여 物主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분원은 “30명의 胥吏 가운데서 선출되는 都渚員에 의하여 거의 관권의 지배 없이 경영되었으며…경제적 유력자에게 자금을 차용하여 만들어지는 분원사기는 극히 적은 부분만이 왕실에 납품되고 판매되어 지금의 분원리는 전국 각 처에서 모여드는 사기행상으로 인하여 상설 사기전문시장과 같이 되었다”0365)≪承政院日記≫370책, 숙종 23년 3월 6일.고 한다. 또한 조지서의 경우에도 영조 29년에는 50명에 이르는 紙匠들이 모두 도산되고 7, 8명이 남아 있는 형편이 되었다.0366) 姜萬吉,<分院硏究>(≪亞細亞硏究≫20, 高麗大, 1965). 그나마도 관영의 성격을 차츰 벗어나 “試紙의 조성은 모두 廛人의 물력에서 나오고 우리들이 私備取利하는 것이 아니다”0367)≪貢弊≫4책, 造紙署紙匠.
宋贊植,≪李朝後期 手工業에 관한 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3) 참조.
라고 한 것을 보면, 고종 19년 혁파 이전에 이미 실질적으로 민영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다른 관영수공업의 경우도 사정은 거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세기를 전후해 잔존했던 약간의 관영수공업조차도 민영화가 이루어져 실질적으로 자영수공업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관영수공업이 민영화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 원인의 하나로 관영수공업에 있어서 소속 장인의 기술적 낙후성과 생산의욕의 감퇴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민간의 자영수공업이 광범하게 발전하고 민간수공업제품이 시장에서 널리 유통됨에 따라 봉건정부와 그 예하 관청에서는 필요한 수공업제품을 전속 官匠을 두어 조달하기보다는 시장에서 구입·조달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유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를 전후하여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시장에서 조달하는 貢人이 생겨 소위 공인자본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私匠의 수공업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店’ 혹은 ‘店村’이라고 불렸다. 가령 유기수공업체는 鍮店이나 鍮店村으로, 철기수공업체는 鐵店으로, 사기수공업체는 沙器店으로 불렸고, 채광과 제련을 겸하고 있었던 광산의 경우에도 銅店·銀店 등의 식으로 불리고 있었다.「점」이라는 말은 관영수공업의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약간의 예외는 있었으나 유통부문만을 담당하는 순수상업체의 단위로도 쓰이지 않았다. 沙店·土店·甕店 등으로 부르는 장소는 현재 燒物이 있는 곳으로 窯跡이 있으므로 요적이 있는 곳을 店土 또는 釜土라고 부른다고 한다.0368) 淺川巧,≪朝鮮陶磁名考≫(東京;八潮書店, 1931), 248쪽.

 조선 전기에도 점이라는 용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보편화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였다. 따라서「점」경제는 조선 후기에 ‘시장을 위한 생산’을 전개하는 소상품생산자적 자영수공업이 전면적으로 발전하는 체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매매문서에서도 모두 ‘유기점’·‘사기점’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柳壽垣은 餠店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면서 傭保를 고용하여 ‘造得於店中’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많다고 하여, 점 수공업의 보급을 권유하고 점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0369) 柳壽恒,≪迂書≫권 8, 論商販事理額稅規制. 丁若鏞도 그러한 자영수공업체를 ‘점’ 혹은 ‘점촌’이라고 부르면서 수공업점촌에서는 이윤이 비교적 많고 관리들의 착취는 비교적 적다고 지적하였다.0370) 丁若鏞,≪牧民心書≫권 6, 戶典 六條 平賦·권 7, 禮典 六條 賓客 및 권 12, 工典 六條 匠作. 禹禎圭도 “은이 있는 곳에 富商大賈들이 점을 설치하도록 허가할 것”0371) 禹禎圭,≪經濟野言≫銀店勿禁之議.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다 들 수도 없을 만큼 일반적이었다. 조선 후기의 자영수공업체제를「점」경제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러한 자영수공업「점」의 사회경제적 성격은 어떠했을까.「점」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봉건정부와의 관계, 임노동관계 및 상업자본과의 관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봉건정부 및 그 예속관청과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원래 조선 봉건체제하에서 일반 사장들은 “和會鷹狀”0372)≪經國大典≫兵典 番次都目. “取才擇定”0373)≪大典通編≫工典 工匠.하여 소위 ‘番次都目’에 의해 “分二番別” 혹은 “分三番別”’0374)≪經國大典≫兵典 番次都目.로 교대로 일정 기간에 걸쳐「公役」혹은「國役」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경공장과 외공장에 징용되어 온 장인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자기의 영업활동과는 분리되었다. 따라서 공역을 위해 무상의무로 부담하는 잉여노동과 자기를 위한 필요노동이 시간적, 공간적 및 심리적으로 분열되었다. 단지 공역 일수에 대해서는 匠稅가 면제되고 자기경영 활동에 대해서만 장세를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제 관청수공업의 폐지로 공역에 나가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자영수공업자의 봉건적 의무는 공역징발이 아니라 장세로 되었으며 따라서 종래 직접노동의 형태로 급부하였던 것을 이제는 그 노동이 실현한 생산물의 일부를 실물 혹은 그 가격으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공역이 없는 대신 그만큼 장세가 증가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경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봉건적인 직접수취제인「공역」의 해체에 의한 소규모 자영 상품생산업의 일반적 확립을 나타낸다. 물론 이 경우에도 봉건국가가 잉여노동 생산물 또는 그 가격을 상품교환법칙의 매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세로서 직접적으로 영유해간다는 점에서 아직 봉건적 본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봉건적 수취의 방법 또는 경제외적 강제의 방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對人的인 것에서 對物的인 것으로 전화하여 종래와 같은 봉건정부의 교란적인 專壇과 우연의 개입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는 방향에 서게 된 것이다. 자기를 위한 필요노동과 봉건국가에 수취되는 잉여노동의 시간적, 공간적 및 심리적 분리가 한 단계씩이나마 줄어들어 전 노동시간을 자기의 계획과 계산하에 처리할 가능성이 생겨 생산력 발전의 기점이 봉건국가의 직접 지배에서 벗어나 자영수공업 경영 내로 이행되었다. 이에 따라 스스로를 재생산의 궤도 위에 위치시켜 소규모 경영이 봉건적 외압에 항거하거나 이를 회피하면서 시장발달=민간수요의 증대에 대응하여 점차 성장·발전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 상품생산업체인「점」은 봉건적 태내에 잉태된 것이며 공장제적 수공업(Manufacture)과는 단계적으로 거리가 있지만 수공업에서 자본주의 발생의 기초적 전제-필요한 경과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영수공업 단위로서의「점」의 전면적 확립과「점」에서의 소상품생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형태로 전개해가는 데는 아직도 봉건정부와의 사이에 허다한 문제점이 놓여 있었다. 지방관청에서 사장을 임용하는 경우, 임료에 관한 문제만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대전통편≫의 규정대로 잘 시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학자 柳馨遠은 관청에서 민간수공업자를 임용할 때 “官役은 賃價를 적게 지급한다”0375) 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上 雜說.고 지적하였다. 정약용도 지방관청에서 ‘賃用私工’의 명목으로 심한 착취를 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무릇 청렴을 배우려는 수령이 사장을 고용하여 놋사발·놋접시·가마솥·괭이·삽·자기·옹기·가죽신 등을 만들 때에는 수령 자신의 印帖을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0376) 丁若鏞,≪牧民心書≫권 12, 工典 六條 匠作. 정약용이 당시 관청에서 방석을 만드는 것을 예로 든 것을 보면, ‘임용사공’의 경우 工價로 1錢, 糧米價로 2전이 지급되어 工賃은 결국 겨우 식량을 충당하고 좀 남을 정도였던 것 같다.0377) 丁若鏞,≪牧民心書≫권 3, 奉公 六條 守法. 분원에 고용된 장인의 경우도 1년에 價布 4疋, 朔料 7석 남짓을 받았는데0378)≪承政院日記≫303책, 숙종 10년 3월 17일 및 434책, 숙종 33년 2월 2일. 우선 그 절대액이 적은데다가 장인에게 지급될 임금의 재원이 흉년 등으로 징수되지 못할 때에는 그나마도 지급하지 못하여 장인 중에는 굶어 죽는 자까지도 생겼다고 하니0379)≪承政院日記≫370책, 숙종 23년 윤3월 2일 및 498책, 숙종 42년 9월 4일. 그간의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당시 노동자들이 자영수공업체에서 받는 임금에 비하여 매우 적은 편이다.

 따라서 개인수공업자들은 ‘임용사공’이라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관청이나 양반세도가에게 임용되기를 꺼리고 소문이 나지 않게 ‘潛造’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유형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울 안의 수공업자들도 稅가 있으나 지금은 모두 상정할 세가 없고 다만 관의 일이 있으면 소문을 듣고 잡아다가 부리고 이르기를 관의 일이라 하여 그 값을 적게 주며 外方에서는 세가 있거나 없거나를 물론하고 소문만 듣고 억지로 불러다가 부릴 뿐이다. 관부에서 이와 같이 하니 세력이 있는 집이나 양반집에서도 또 따라 본받아서 그 소위 값을 준다는 것이 품삯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工匠을 업으로 하는 자는 오히려 그 기술의 소문이 남에게 들릴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百工이 법도가 없고 추악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다(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上 雜說).

 한편 헌종 13년(1847)에 전라우도 암행어사는 任實현감이 당시의 다른 곳 현감들과는 달리 유기 등을 제 값을 주고 제작시켰다고 하여 그를 특별히 표창하였다.0380)≪日省錄≫헌종 13년 11월 26일.「임용사공」체제에서 자영수공업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제대로 주었다는 사실이 표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임용사공’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권력의 자의적 수탈이 이제는 불법으로 규정되고 탄핵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0381) 丁若鏞,≪牧民心書≫권 12, 工典 六條 匠作.
≪日省錄≫헌종 13년 11월 22일.
우리는 수탈의 한계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탈은 이미 자영수공업자들의 노동 그 자체의 직접적인 수탈이 아니라 노임의 절하에 의한 잉여가치의 수탈이라는 점에서 관영수공업체제하의 상태와는 단계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둘째로「점」과 상업 내지 시장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시장이 발달하고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萬機要覽≫에는 19세기초 전국의 정기적인 場市수를 1,031개로 소개하고 있다. 徐有榘의≪林園經濟志≫에서는 1,052개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324개의 장시에 대해서는 유통되는 상품을 적고 있다. 면포유통 장시는 240개소, 명주는 60개소, 마포는 139개소, 모시는 45개소, 유기는 79개소, 철물은 91개소, 자기는 90개소, 토기는 94개소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서울과 지방의 자영수공업자들은 유형원의 증언처럼 소문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몰래 만들고 몰래 파는 ‘潛造貨賣’가 일반적이었으므로 실제 수공업제품의 유통 정도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고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자영수공업에서는 아직도 주문생산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정기적인 장시에 상품을 출품하여 소위 ‘전내기’ 혹은 ‘장내기’를 하는 것은 전체 상품유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보다 큰 상품세계를 염두에 두고 자영수공업점과 상업과의 관계를 검토하면 크게 보아 두 방향에서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영수공업자들이 원료의 구입과 생산물의 판매를 위하여 부단히 시장과 접촉하지 않으면 안되는 소상품생산자로서 자기의 노동생산물을 스스로 상품으로 전파하고 화폐로 실현시켜 시장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萌芽이윤을 축적하면서 점차 초기적인 기업가로 성장·발전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성립의「두 개의 길」가운데서 소위 생산자가 상인으로 된다는 제1의 길과 비슷한 형태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가령 유기에 대한 시장수요의 증가에 대응하여 유점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서유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東國의 풍속으로 유기를 가장 귀하게 여기므로 아침·저녁으로 登盤하는 그릇으로 모두 유기를 쓰고 있다.…옛날에는 오직 권세 있는 집이나 부유한 집에서만 유기를 사용했으나 오늘날은 荒村의 오두막집에서도 유기를 쓰지 않는 곳이 없고 대개 3, 4벌씩은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곳곳에서 鍮匠들이 爐를 개설하고 유기를 주조한다. 호남 求禮의 유기가 나라 안에 이름이 나 있지만 근년에는 松都인이 만드는 유기도 역시 좋다고 한다(徐有榘,≪林園十六志≫贍用志 권 4).

 종래 서울의 양반들만이 유기를 사용하더니 지금은 시골의 농민들도 즐겨 유기를 쓰고 있으니, 이러한 수요의 증가에 대응하여 전국 도처에 유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유기만이 아니라 다른 수공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화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일반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경향이 크게 늘어갔다.0382)≪肅宗實錄≫권 30, 숙종 22년 12월 무술. 李瀷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힘껏 일해도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는 “하루 벌어 닷새는 먹는다”0383) 李 瀷,≪星湖僿說類選≫권 4, 下 人事編 6, 治道門 3, 先禁末作.고 하였다.

 이러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의 사회상을 묘사한 朴趾源의≪許生傳≫에서는 굶주리고 있던 허생의 처가 굶주림을 면하는 방법으로서 대뜸 수공업을 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0384) 朴趾源,≪熱河日記≫권 5, 一齊本 進德齊夜話. 이것은 이익의 말처럼 수공업에 종사하면 하루 벌어 닷새나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정약용도 “수공업이 농업을 초과한 지 오래되었다”0385) 丁若鏞,≪丁茶山全集≫上, 詩文 議 策門議 農政疏.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북지방 농민의 태반은 금·은·동 등을 채광하고 제련하는 광업으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0386) 禹禎圭,≪經濟野言≫銀店勿禁之議.
≪正祖實錄≫권 17, 정조 3년 2월 신사.
또 충청감사 李翊漢의 보고에 의하면, “백성들의 습속이 모두 수공업을 업으로 삼고 있으며,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駿笠을 만들어 육지에 팔아 생활하고 있다”0387)≪顯宗實錄≫권 8, 현종 5년 3월 갑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순조 2년(1802)에 편찬된 황해도의≪平山邑誌≫에 기록된 자영수공업자의 수가 모두 430여 명인데 이는 원래≪경국대전≫에서 규정한 평산 외공장 정원 7명의 15배가 넘는 숫자이다. 이 430여 명의 자영수공업자는 수공업 장세를 내는 단위 수공업체의 대표자이므로, 여기에는 고용된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평산 한 고을에 있던 독립 자영수공업체인 店이 430여 개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을까.0388)≪平山邑志≫軍摠. 그럼에도 아직 등록되지 않은 업체가 많았으므로≪續大典≫에서는 “閑雜人이 爐冶處를 만들면 호조에서 적발하는 대로 案에 올린다”0389)≪續大典≫工典 工匠.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冶匠들이 水鐵店이나 유점 등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서울의 12座의 잡화전 중 수공업자들이 스스로 廛을 만든 1좌가 급격히 성장하여 다른 11좌의 전을 모두 몰락시켰다.0390)≪承政院日記≫531책, 경종 원년 윤6월 19일. 이것 역시 수공업자가 상인으로 되면서 자기의 수공업을 소기업으로 발전시키는 하나의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자영수공업자가 상인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소기업가로 성장해가는 향방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중에서 앞선 것은 이미 매뉴팩처적인 단계에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수공업자가 기업가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상업자본에 예속되어 先貸制的 지배를 받는 방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점」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영수공업점의 생산양식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생산양식의 기초를 이루는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형태를 분석하기로 한다.

 자영수공업체로서의 점에는 ‘점주’ 또는 ‘물주’라고 부르는 고용주가 있었고 그 고용주는 많든 적든 일정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는 농민분해과정을 통하여 분출된 이른바 ‘농토가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민(無土不農之民)’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농촌에서의 농민분해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광범한 토지없는 농민들은 소작인 혹은 雇工으로서 농촌에 눌러 있기도 했지만 도시로 몰려들어 조선 후기에는 일정한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고,0391) 金泳鎬,<朝鮮後期에 있어서의 都市商業의 새로운 展開>(≪韓國史硏究≫2, 1969) 참조. 수공업점이나 鑛店에 들어가 임금노동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 점에 고용된 雇人들은 종래 농촌 지주집에 있는 고공 또는 婢夫, 즉 머슴들이 隷農的인 형태로 장기간 인간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日傭 또는 月傭, 季節傭 등으로 고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하루의 평균 雇價는 25文이 일반적이었고0392) 禹夏永,≪千日錄≫권 7, 觀水漫錄. 월급으로 주는 경우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9냥(900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임금노동자들은 고가의 고저에 따라 점촌과 점촌 사이를 “문득 왔다 문득 갔다”0393)≪秋官志≫권 6, 雇工立案.고 하며 그 숫자가 매우 많아 일종의 노동시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0394)≪正祖實錄≫권 27, 정조 13년 5월 병술. 노동자들이 농촌을 떠나 광공업부분으로 몰리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하루에 품삯을 100전을 준다 해도 고용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0395) 丁若鏞,≪丁茶山全書≫上, 詩文 策門議 農政疏.

 이러한 임금노동자들이 자영수공업의 점주 또는 물주와 상품교환의 방식으로 대립 혹은 결합할 때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자본의 구성적 계기로 대상화되는 것이며 그것은 계약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영수공업이 이러한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소상품생산업체로서 발전해갈 때 그러한「점」은 적어도 단순 協業의 단계, 즉 매뉴팩처의 선행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가족노동의 비중이 큰 자영수공업점도 적지 않았으며 고용주와 임금노동자의 관계가 순수한 ‘대물적’인 계약관계에 의해서 지배되기보다는 오히려 춘프트(Zunft)적인 강제규정에 의하여 지배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遺制에도 불구하고 자영수공업으로서의 점은 대체로 소상품생산업체로서, 수공업에 있어서 매뉴팩처 발생의 역사적 기점이 되었으며 그 중 앞선 것은 先貸制 내지 매뉴팩처적인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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