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3) 매뉴팩처의 발생
  • (1) 유기산업부문

(1) 유기산업부문

 19세기의 실학자 서유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종래에는 서울의 양반들만이 유기그릇을 사용하였으나 19세기에 와서는 시골의 오막살이 농가에서도 으레 3, 4벌의 유기를 쓰는 지경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도처에 유기수공업장인 鍮店이 생겨나게 되었다.0411) 徐有榘,≪林園十六志≫贍用志 권 4 “處處鍮匠開爐鼓治”.

 이러한 유점은 유기원료의 산지와 판매시장을 따라 점차 지역별로 특화하여 경기도의 安城과 개성, 평안도의 定州 納淸, 전라도의 求禮, 경상도의 慶州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기산지가 되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유점이 몇 개의 마을을 이루어 소위 유점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무렵에 안성에는 약 40여 개의 유기점이 있었고 납청에는 약 50여 개의 유기점이 있었다.

 이러한 유점 가운데 앞선 것은 어느 정도 매뉴팩처적인 경영형태에 접근하고 있었다. 매뉴팩처를 규정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와 생산수단을 함께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적 기업가가 對物的으로 결합하는 것이 전제가 되며 아울러 공장제적인 분업노동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것이 핵심을 이룬다.

 그러면 당시의 수많은 유점 가운데 비교적 자료가 자세한 몇 개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한 예로 헌종 8년(1842) 평안도 祥原의 한 유기수공업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0412)≪平安監營啓錄≫12책, 道光 22년 임인 5월 15일. 그 유점의 점주이면서 물주이었던 韋明圭는 자기집 주변에 銅店도 병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점에서는 야장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採鑛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련도 겸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광산업과 제련업, 유기제조업을 상호 연관시켜 일종의 계열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명규의 유기제조장에는 각종의 생산수단 내지 생산도구를 갖추고 있었고 많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유점에는 유기제조 기술자로 李順之·朴云成·崔仲陸 등의 이름이 나오고 있으며 동점의 야장으로서는 李亨鎭 등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때마침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 작업을 하지 않을 때였으므로 현장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위에 이름을 소개한 노동자들은 모두가 각처에서 모여든 자유노동자로, 위명규의 유기장에서 임금을 받고 노동하고 있었다. 이순지는 황해도 載寧사람으로 위명규의 유점에 와서 유기그릇을 만드는 장인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면서 10냥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박운성은 이순지와 함께 고용되어 있던 鑄器匠이었고 이형진은 平壤사람으로서 높은 임금을 찾아 온 유장이었으며 최중묵은 평안도 咸從사람으로 사정은 비슷하였다. 이형진은 위명규가 유점과 함께 병설한 동점에서 야장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름이 나오지 않은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거의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거의 다 임금의 고저에 따라 유점과 유점 사이를 “문득 왔다 문득 갔다”0413)≪秋官志≫권 6, 雇工立案. 하는 소위 ‘以賃傭爲業者’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점주 위명규는 이러한 자유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유점을 경영하던 경영가인 동시에 그 유점에 자본을 투하한 물주이며, 아울러 유점의 제품을 시장에 파는 상인으로서 말하자면 초기적인 기업가였다. 흔히 초기 기업가가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자본공급자이면서 동시에 기술자요 또한 상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점주를 초기 기업가의 한 유형으로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유기를 생산하는 기술수준에 조응하여 일정한 노동분업이 나타나고 있었다. 분업의 형태는 ‘붓배기’ 유기의 경우와 ‘방짜’ 유기의 경우가 각각 다르다. ‘붓배기’란 유기원료를 높은 열로 가열한 후 鑄型에 부어서 만드는 방식이며 ‘방짜’란 유기원료를 고열에 녹인 후 器物로 두들겨서 만드는 방식이다.

 먼저 붓배기 유기를 제조하는 노동분업을 보면 다음과 같다.0414) 金泳鎬,<安城鍮器産業에 관한 調査報告>(≪亞細亞硏究≫20, 1965).

대장: 1명 鑄物夫: 1명(대장이 겸임하는 수도 있음) 조수(풀무군): 1명 旋盤工(일명 가질): 2명 참나무숯·젓토·물 등을 담당하는 작업부: 1명

 이렇게 유기의 한 제조공정에 약 5∼6명의 노동자가 한 조가 되어 보통 1일에 약 20벌의 유기를 제조한다고 한다. 안성의 현지조사 결과 유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던 19세기말경에 보통 한 유점에 3∼4조가 있었다고 하니 대략 15명 내지 2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방짜 유기의 제조공정은 한층 복잡하고 분업도 고도화되어 있었다.0415) 위와 같음.

鑄物工程(부질)  겹대장(鑄物夫): 1명  받풍구: 1명 壓延工程(내피)  대장: 1명  앞망치(제 1 망치군): 1명  걸망치(제 2 〃 ): 1명  제망치(제 3 〃 ): 1명  네핌가질(壓延旋盤工): 1명  네핌앞망치(연연망치군): 1명  안풍구(숙련 풍구 책임자): 1명 旋盤工程(가질)  旋盤工: 2명

 이와 같이 방짜 유기 제조공정은 3개의 공정으로 나누어지고 약 11명의 노동자가 있어야 한 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안성에는 주로 붓배기 유기를 제조하였고 정주의 납청에서는 방짜 유기를 제조하였다고 하니 지역적 기술특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19세기 중엽 납청에서는 지주 겸 상인출신의 박명조가 11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유기수공업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방짜 유기수공업의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0416) 전석담·허종호·홍희유,≪조선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0;이성과 현실, 1989) 참조. 안성이나 납청이나 유기제조 노동분업이 비슷한 것을 보면 그 당시 구례나 개성의 경우도 거의 비슷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러한 배경을 미루어 앞서 본 위명규의 유점을 방짜 유기를 제조하는 일종의 매뉴팩처적 형태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또한 당시 유기점의 매매문서를 통하여 대규모의 유점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九山里라는 곳에 都景春이란 점주가 경영하는 유점이 있었는데 이 유기제조장은 초가로 무려 39間이나 되었고 그 곳에는 유기를 만드는 器機가 49座나 있었으며 쓰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원료도 백철이 126근, 동철이 123근, 황철이 273근이 있었다. 이러한 규모라면 수많은 유장을 고용하였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유기점을 팔 때 매입자를 ‘金生員重玉’으로 표기하고 자기자신은 ‘店主 都景春’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도경춘은 평민신분이었으며 노동자들과는 임노동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붓배기 유기를 제조했건 혹은 방짜 유기를 제조했건 간에 이만한 규모라면 점주 도경춘은 꽤 큰 유기매뉴팩처를 경영하던 초기 기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0417) 金泳鎬,<朝鮮後期 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營形態>(≪大東文化硏究≫9, 成均館大, 1972), 199∼200쪽.

 또한 순조 21년(1821)에 유기 점주 姜泰周는 자기가 오랫동안 경영하던 유기제조장을 판매하였는데 규모가 역시 28간이었으며 周鉢 등 190개의 유기와 채 완성시키지 못한 유기 등을 합쳐 매매하고 있었다.0418) 金泳鎬, 위의 글, 200쪽.

 한편 서울에서는 1800년 이래 대상공업자인 吳漢柱가 ‘吳漢柱興昌處’라는 대규모 수공업장을 만들어 유기를 비롯한 각종의 철기물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철기물을 匙召廛 등 여러 시전에 판매하였고 또 직접 시판도 하고 있었다. 철종 10년(1859)에는 다른 30여 명의 장인들과 함께 정부의 鑄錢 사업을 위탁받기도 했다.0419)≪備邊司謄錄≫190책, 정조 24년 2월 11일.
≪日省錄≫철종 10년 6월 13일.
그런데 1850년대의 주전위탁 사업문서인<鑄錄>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30爐의 주전시설과 각종 부속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각 노에서 사용하던 연장의 종류와 수량은 70여 종에 150여 기가 되었다고 한다. 주전이 행해지는 작업 공정은 세분화되어 磨鍊匠·洗鐵匠·鐵舂匠·注匠·磨光匠·作貫匠·方正匠 등이 해당 공정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관련지워 본다면 ‘오한주흥창처’는 유기제조장으로서만 아니라 주전사업장으로서도 일종의 특권매뉴팩처적 형태로 주목된다.

 이상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볼 때 당시 전국 각처에서 성업을 하고 있던 유기점 가운데 많은 부분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일종의 유기매뉴팩처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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