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3) 매뉴팩처의 발생
  • (2) 야철산업부문

(2) 야철산업부문

 철의 제련과 주조 및 段冶 등과 관계되는 冶鐵수공업에서도 미약하나마 매뉴팩처적 경영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水鐵수공업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후기에는 광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광석을 제련하여 생쇠 즉 무쇠를 만들고 다시 그것으로 각종의 농기구를 만드는 수철 수공업장이 널리 번창하고 있었다. 19세기의 각종 자료에 나오는 水鐵店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여러 수철점 가운데서 특히 자료가 풍부한 것은 19세기 중엽 평안북도 寧邊에서 李甲圭가 경영하던 수철점이다. 이 수공업체는 철종 11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감영에서 심문하는 가운데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었다.0420)≪平安監營啓錄≫28책, 寧邊府. 이 기록에 의하면 점주 이갑규가 경영하던 수철점에는 수많은 임금노동자가 고용되고 있었다. 成器片手로 劉仲涉, 役軍으로 方濠京·金成實·申洪夫, 帖首로 李昌環, 점인으로 金以權, 團速軍으로 金石喆·金同允·金允卜 등이 있었다. 여기에 소개된 노동자들은 살인사건에 관련되는 사람들이고 그 밖에도 ‘店漢이 잡다하여 그 성명을 모두 쓰기 어렵다’고 하는 형편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모두 이갑규의 수철점에 임금노동자로 고용되어 생계를 이어갔으며 雇主로부터「雇錢」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점주 이갑규는 일종의 초기기업가로 보여진다. 단지 기술전문가인 편수 내지 첩수 등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자신은 자본가 겸 상인으로서 기능을 하는 기업가가 아닐까 한다. 그의 수철점은 일종의 수철매뉴팩처로 보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밖에 평안북도 价川에서 安宅俊이 수철점으로 생업을 삼고 있었고,0421)≪題判抄錄≫民訴論題, 권 61, 병술 5월 1일. 朔州에서는 수철장세로 1냥 6전을 징수하였으며,0422)≪賦役實摠≫朔州. 昌城에서 水鐵食鼎 4좌에 대하여 수철장세를 징수하였다고 한다.0423)≪賦役實摠≫昌城. 영업세를 내고 있는 이들 수철수공업의 경영형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길이 없고 영변 이갑규의 수철점을 기준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수철수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서 鎔鑛수공업을 들 수 있다. 당시에는 철을 제련하는 노를 ‘德’ 또는 ‘鐵德’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용광로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광수공업은 특히 개천 일대와 경상북도 雲門山 일대, 강원도 洪川 일대에서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의 제련기술은 19세기의 실학자 李圭景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즉 풀무왼쪽에 9개의 바람구멍을 만들고 야로를 만들 때는 먼저 4廓을 쌓고 곽 내에다 9개의 골을 만들어 골마다 바람이 통하게 하여 철을 용광한다는 것이다.0424)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煉鐵辨證說. 이러한 제련법에 따른 실제의 작업분업 실태를 이규경은 소개하지 않았지만 운문산 일대 용광수공업장의 현지 답사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0425) 權丙卓,<李朝末期의 鎔鑛手工業>(≪韓國經濟史特殊硏究≫, 嶺南大 産業經濟硏究所, 1972) 참조.

錢主: 1명 관리인 : 2명 원불편수 : 1명 뒷불편수 : 1명 골편수 : 1명 둑수리 : 1명 풀무군(풀무대장 외) : 16명 숯쟁이(숯대장 외) : 8명 쇠쟁이(겉대장 외) : 8명 공양주(炊事 노파) : 2명

 이렇게 모두 41명이며 거의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다. 실제 분업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은 전주·관리인·공양주 등이며 규모에 따라서 숯쟁이와 쇠쟁이는 인원을 약간 줄일 수도 있으나 그 외는 모두 어느 한 부분만 빠져도 전체공정이 돌아가지 않는 분업적인 작업이었다. 실제 작업의 진행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0426) 위와 같음.

 전주는 미리 土炭과 木炭을 작업장의 지정된 장소에 산더미처럼 구입해 둔다. 이 때 목탄의 부피는 토철의 몇십 배가 되지만 중량은 거의 비슷하다. 골편수는 조수격인 기능직인 둑수리를 데리고 골일을 전담하는데 부리작업을 하기 3일 전에 풀무와 통하는 골무구멍과 골바닥을 점흙으로 손질한 다음 열을 받아도 깨어지지 않는 불목돌을 놓고 초롱구멍을 뚫을 자리를 마련해 둔다. 이 때 풀무구멍과 골바닥의 각도라든지 방향이 잘못 잡히면 공기와 쇳물이 한쪽으로 치우쳐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다. 불편수는 뒷불편수와 숯대장·불매대장 등을 지휘하면서 부리작업 전반을 담당하는 공장장 격이다. 즉 불편수는 골편수가 손질해 둔 골바닥에 점화할 불사르게를 알맞게 하고 숯대장(곁대장)에게 지시하여 토둑 안에 숯을 가득 채우도록 지시한다.

 숯대장의 감독하에 8명의 숯쟁이가 지게로 숯을 채우는 동안 불매대장은 선거리 8명의 풀무군으로 하여금 정해진 장소에 대기하게 한다. 이 때 불편수는 미리 뒷불편수가 준비해 둔 불씨를 불사르게에 붙인다. 불사르게에 불이 붙어 토둑 위에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기 시작하면 불편수는 ‘불매 올려라’라고 소리친다. 풀무군의 동작은 차츰 빨라지고 불이 토둑 위에까지 돈다. 이윽고 토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면 불편수는 쇠대장에게 ‘쇠 넣어라’고 지시한다. 2명의 쇠쟁이는 교대로 앞창을 단 바소쿠리에 토철을 알맞게 담아 토둑 위에 넣고 이 때 겉대장도 역시 숯쟁이로 하여금 2명씩 교대로 숯을 져다 놓도록 한다. 풀무바람은 강할수록 좋으므로 선거리·후거리가 교대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풀무를 밟는데 겉대장과 숯대장이 불편수의 지시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화력에 따라 알맞게 숯과 토철을 투입하지 않으면 쇳물이 적게 나거나 곧 구멍이 막히기 일쑤이다. 點火한 지 7∼8시간이 지나 강한 풀무바람을 받은 도가니의 화염은 하늘을 찌른다. 이 때 골편수는 토둑의 바깥벽을 쇠망치로 가볍게 쳐보면서 쇳물이 고인 정도를 확인한다.

 한편 둑수리는 초통구멍 아래 땅바닥에 판장쇠바탕자리를 좌우로 4개씩 8개를 깨끗하게 준비해 둔다. 점화한 지 8∼9시간이 지나면 가장 조건이 좋아지는데 이 때 골편수는 쇠창으로 초롱구멍을 뚫는다. 쇳물은 골을 따라 흘러내려 첫째 바탕에 고이고 이어서 둘째, 셋째로 차례로 고여서 강엿처럼 굳어진다. 굳어지기 전에 둑수리는 감나무 고무래로 쇳물 위에 뜨는 찌꺼기를 조심성있게 끌어낸다.

 쇳물이 멎으면 골편수는 초롱구멍을 점토로 다시 막는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중 일체의 종업원은 자신의 업무 외에 어떠한 작업에도 가담할 수 없으며 심지어 다른 작업자가 죽어가는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관여치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작업조건에 따라 동일하지는 않지만 보통 24시간에 3회에 걸쳐 쇳물을 뽑으며 80근짜리 판장쇠(中三鐵)를 1회에 평균 3개씩만 얻으면 작업은 성공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여타의 조건만 구비되면 불을 끄지 않고 몇 개월이고 계속하는데 단위작업에서 15일간을 계속할 수 있으면 전주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작업공정은 이규경이≪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 부분적으로 밝히고 있는 연철 기술형태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19세기 중엽 평안남도 개천지방의 용광수공업의 작업분업에 대한 회고담의 조사 결과와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북한학계에서 이루어진 개천 용광수공업의 조사에 의하면 1개의 용광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약 30여 명의 인원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0427) 홍희유,≪19세기 개천(평안남도)지방 야철(冶鐵) 수공업에서 발생한 경제적 변화에 대하여≫.

대보수군(쇳물 용해 담당자): 2명 웃거리군(광석과 숯을 배합하여 용광로에 넣는 기술자): 4명 너울군(풍구질군): 16명 숯패쟁이(숯 공급 담당자): 2명 돌패쟁이(광석 공급 담당자): 2명 보조노동자: 4∼5명

 이 중에서 대보수군·웃거리군·숯패장이·돌패쟁이 등은 쇠부리 물주에게 상시적으로 고용된 전업적 기술자로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았다. 너울군과 기타 보조노동자 등은 그때그때 작업이 있을 때만 단기적으로 고용되는 임금노동자로서 이들은 半農半工의 형태로 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철덕에 가서 일하는 단기적인 노동자였다고 한다.

 당시의 전국의 용광수공업이 모두 이와 같은 분업체제하에서 작업이 진행되는 매뉴팩처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약용이 “지금의 爐店은 모두 奸民이 私設한 것이다”0428) 丁若鏞,≪牧民心書≫권 11, 工典 六條 山林.라고 지적한 노점의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분업형태로 작업을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다만 이러한 형태는 아직 지배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솥을 만드는 鎔銑수공업에 관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분업작업을 하고 있었다. 즉 재래식 기술로 주조한 솥을 ‘익부리’라고 하고 근대식 솥을 ‘생부리’라고 하는데 익부리 솥을 만드는 작업은 바숨(鑄型)작업, 불(鎔鑛)작업, 골(送風)작업, 오리(鑄造)작업 등의 4개의 공정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이들 각 공정은 다시 각각 분업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0429) 權丙卓,<李朝末期의 鎔銑手工業>(앞의 책).

바숨(鑄型)작업  흙건즈리기: 2명  손짓군: 2명  허드렛군: 2명  짙불군: 1명  송쇳군: 1명  도래질편수: 1명  수증군: 1명   계: 10명 골(送風)작업  골편수: 1명  둑수리: 1명  쇠치기: 16명  불멧군: 2명  허드렛군: 5명   계: 25명 불(鎔鑛)작업  적집쌓기: 10명  원불편수: 1명  뒷불편수: 1명   계: 12명 오리(鑄造)작업  큰쾽이군: 2명  솔내기: 2명  솔굴리기: 2명  오릿군: 6명  가래지금군: 1명  발매깃군: 1명  쪼준쇠잡이: 1명  나빗짚군: 1명   계: 16명

 이와 같이 전통적 익부리 솥을 만드는 수공업은 4개의 공정으로 분화되고 각각 기능을 달리하는 60여 명의 노동자가 분업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매뉴팩처적 형태였다. 이는 곧 19세기의 분업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용광·용선수공업이 운문산 일대에 얼마만큼 있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개천지방의 경우에 대해서는≪朝陽邑誌≫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개천의 동북면은 산이 험하고 골이 깊어서 잡목이 무성하여 주민들은 숯을 구어 資生하고 있으며, 서남지역의 주민들도…철석을 채광하여 판매하고 있다. 곳곳에 爐를 설치하여 무쇠와 강철을 제련하고 가마를 주조하며 器機를 鍛造한다. 이로써 상업이 크게 일고 物貨가 사방으로 유통하여 이 읍의 生利가 성행하고 있다(≪朝陽邑誌≫).

 곳곳에 용광로를 설치하여 무쇠·강철을 제련하고 가마솥을 주조하며 기기들을 단조하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영형태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규경이 소개한 제련기술과 운문산 용광수공업의 분업과정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강원도 洪川지방에서도 용광수공업이 일정하게 번창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 곳에서는 여러 철덕들이 경합을 하다가 그 중 철덕도고가 출현하여 대규모의 용광수공업을 경영하고 있었다.0430)≪日省錄≫철종 8년 11월 27일. 도고는 독점적인 상업자본의 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지만 야철수공업에서도 독점적인 산업자본의 한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철덕도고의 출현에 대하여 홍천 주변의 중소 德主들은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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