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5. 수공업의 발달
  • 3) 매뉴팩처의 발생
  • (4) 광업부문

(4) 광업부문

 광산업은 엄밀히 말해서 채취산업으로 제조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광산에서는 흔히 채광만 하였던 것이 아니라 채광한 광물들의 제련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채광과 제련이 연결되고 다시 제련이 분업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광산 매뉴팩처가 나타날 수 있었다.

 가령 앞에서 유기수공업장을 경영하던 위명규는 銅店까지 경영하고 있었는데 이 동광에 야장이 고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채광과 제련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도에 銀店·銅店·鉛店 등 각 점을 새로 설립한 자들은…이미 허다한 재력을 들여서 掘取, 合鑄를 한다”0433)≪備邊司謄錄≫173책, 정조 12년 11월 20일.고 하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정약용은 “사적으로 채광을 시작하려는 자에게는 그 吹鍊하는 것을 금지하여야 한다”0434) 丁若鏞,≪牧民心書≫工典 6, 山林.고 하여 채광과 제련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산업을 채광공정과 제련공정으로 나누어 볼 때 제련공정은 앞서 본 야철수공업의 분업형태와 거의 비슷하였을 것이다. 단지 채광부분은 정약용이 마련한 採金 규제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채금을 하는 데 있어서 고용노동자로서 掘土者를 100명, 負土者를 50명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금을 精出하는 데에는 火陶法을 쓸 것을 제의하고 있다.0435) 위와 같음. 화도법의 분업형태나 雇人의 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약용의 채금 규제는 일종의 금광 매뉴팩처경영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분업은 당시에 규모가 큰 금광의 표준적인 형태였다. 이러한 분업형태는 순조 6년 호조판서 서영보의 啓言에서 “요사이 들으니 畿湖·兩西·東北 등 6도에 금맥이 점점 성하여 潛採의 무리가 없는 곳이 거의 없다”0436)≪日省錄≫순조 6년 12월 10일.고 한 것이라든가 헌종 6년(1840)에 “금을 캐는데 백성들에게 주는 돈이 230냥이 된다”0437)≪日省錄≫헌종 6년 9월 12일.고 하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정조 22년(1798) 遂安郡의 경우를 보면 그 곳에서 성업중인 3개의 금점이 99개의 金穴을 파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약 550여 명의 임금노동자가 고용되고 있었고 그들이 받는 ‘料價’가 1천여 냥이 넘었으며 금점에서 내는 점세만도 1천여 냥이 되었다.0438)≪備邊司謄錄≫188책, 정조 22년 7월 27일. 또한 고종 13년(1876) 개항 당시에 한국에 왔던 한 일본인은 당시 조선의 금광에 대하여 “永興府 관하만도 砂金을 산출하는 곳이 십수 개처나 되며…갱부가 4만 명”0439) 黑田淸隆,≪還遊日記≫上編.에 달한다고 소개하였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금점에는 수천 명의 광산노동자가 모여 있었다는 것이 된다.

 硫黃店의 작업공정도 採黃부분과 연황부분으로 나뉘어져 유황의 생산이 분업적·협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채황부분은 掘土·負土·排水 등으로 분화되고 있었고, 연황부분은 夢同이라는 水鐵기구를 주도구로 사용하는 공정과 甁缸을 주도구로 사용하는 공정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밖에 연료를 조달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여 유황점에서는 보통 100여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銅鑛의 경우도 채광과 제련이 연속공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래 우리 나라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도 동을 채굴할 수는 있었으나 제련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쓰고 있었다.0440) 徐有榘,≪林園十六志≫贍用志 권 4, 工制總纂 攻金.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동을 제련하는 기술이 도입되어 甲山 동점과 같은 곳에서는 실제로 이를 적용하여 일본산 동에 손색이 없는 동을 생산하고 있었다.0441)≪純祖實錄≫권 30, 순조 28년 9월 임인. 앞서 본 위명규의 동점도 동의 제련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개광된 것으로, 제련공정을 담당하는 冶匠이 고용되어 있었다.

 동의 채광방식은 앞서 본 금의 채광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련방식은 매우 복잡하고 고도로 분업화된 것이었다. 동의 제련과정은 크게 보아 세 개의 공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燒鑛공정이다. 여기에는 黃鐵桶이라고 부르는 燒釜를 맡은 기술자가 있었다. 둘째는 용광과정인데 ‘고가리통’이라고 부르는 素吹床과 風驅櫃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기술자가 붙어 있었다. 앞서 본 용광수공업의 분업 실태가 이 경우와 관련된다. 셋째로 製銅공정이다. 여기에는 동집(銅家)이라고 부르는 眞吹床과 풍구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기술자가 붙어 있었다. 이러한 각 공정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는 기술자를 製鍊主라고 하였는데 경영주격인 德大가 흔히 그 소임을 담당하였다.

 끝으로 은점의 경우를 살펴보자. 조선 후기에 은광은 금광이나 동광보다 더욱 크게 발전하고 있었고 이러한 은광에 대하여 정부는 은점을 설치한 뒤 민간인으로 하여금 세금을 내고 採銀토록 하는「設店收稅制」를 실시하였다. 은점도 역시 채은과 제련이 병행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은의 제련은 원래 端川 은점에서 발전하여 당시에는 ‘端川鍊銀法’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단천연은법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0442) 徐有榘,≪林園十六志≫贍用志 권 4, 工制總纂 端川鍊銀法.
여기서 소개된 단천연은법은≪端川邑誌≫에 소개된 연은법과 내용이 거의 같다.
먼저 개울을 파서 熱恢로 쌓고 그 위에 鉛片을 놓은 다음 채광부분에서 채취한 생은을 가져다 놓고 개울의 사방에 장작을 덮고 불을 붙인다. 그러면 연편이 먼저 녹고 생은은 차차로 용해되어 鉛水가 서로 비등하는 皮面 중간에 홀연히 銀精이 모인다. 다음에 灰 중에 남아 있는 것을 다시 녹여서 爐火하면 회는 없어지고 연만 남는다는 것이다.

 철종 9년(1858) 함경도지방을 둘러 본 암행어사 洪承裕는 “금·은·동·연은 각처에서 산출되고 있는데 한 점이 열리면 팔방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광산마다 모인 수가 기천 명이 넘을 정도로 많다”0443)≪日省錄≫철종 9년 2월 3일.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앞서 본 영흥부 관하의 금광에 모인 노동자들의 수가 광산마다 수천 명이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러한 금점·은점·동점 등의 광업매뉴팩처는 대체로 통치권력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잠채의 형식으로 발전되거나「설점수세」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수공업은 관영수공업의 민영화와 농촌부업 수공업의 전업화를 기반으로 봉건적 수취체계 속에서 왜곡·변형되면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한 발전은 상업자본의 수공업 투자로 인한 선대제의 등장, 민영수공업에 있어서의 임노동제의 전개, 공장제적 수공업의 등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제약되면서 다시 시장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金泳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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