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6. 광업의 발달
  • 1) 18세기「별장」제하의 광업 실태
  • (2)「별장」제하 은점의 경영 실태

(2)「별장」제하 은점의 경영 실태

 호조는 군·영문의 鉛店을 銀店으로 흡수하면서 서울의 부상대고들을 별장으로 파견하였고 새로 개발하는 은광에도 별장을 파견하여「설점」·「수세」하였다. 18세기에는 별장에 의한 설점수세제하의 은광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별장제하 은점의 설점 절차와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은점의 설점은 별장으로서의 경력을 갖추었거나 별장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새로운 산은지의 채굴 허가를 호조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으면서부터 착수되었다. 호조에서는 대체로 이들을 별장으로 삼아 현지에 파견하고 공문을 발송하여 당해 읍의 수령과 함께 은광맥과 銀品 및 민폐를 조사토록 하였다. 이러한 사전조사 행위를 흔히 ‘看色’·‘看審’·‘摘奸’이라 표현하였다.

 둘째, 별장과 수령의 현지 조사에서 은맥이 풍부하고 은품이 양호하더라도 그 곳의 설점이 민폐를 끼칠 우려가 있으면 수령은 호조의 설점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입지조건이 좋아도 민폐가 없는 곳이라야 가능하였다.0458) 柳承宙, 앞의 글(1976a), 588∼589쪽.

 셋째, 설점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호조에서 전담하였다.0459)≪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2월 13일.
≪承政院日記≫875책, 영조 14년 7월 22일.
店所에는 수 개 또는 수십 개의 광석 제련용 冶爐와 숯불을 일구는 風箱 등의 생산시설, 별장·店匠·鉛軍들의 막사, 그 밖의 부대시설을 구비해야 했다. 그러나 은점은 생산물 자체가 화폐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생산 전단계의 시설비와 운영비만이 필요했다.

 넷째, 설점시의 선결과제는 무엇보다도 인력과 연료 조달문제였다. 당시는 良·賤을 막론하고 신역을 지고 있었으므로 호조는 별장으로 하여금 임의로 인부를 모취하여 鉛軍을 삼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고 건축설비에 필요한 재목이나 제련용의 연료인 炭木을 조달토록 하기 위하여 禁松이 아닌 이상 주변의 산야에서 자유로이 수목을 채벌할 수 있게끔 허가하였다.0460) 蔡齊恭,≪樊岩集≫論扶安蝟島銀鑛設店便否啓.

 이와 같이 은점의 설점은 점소만을 설치하는 일이 아니라 제반 절차와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은점의 명목상 관리자는 별장이었다.0461) 이하 별장의 호칭과 신분 등에 대해서는 柳承宙,≪朝鮮時代鑛業史硏究≫(고려대 출판부, 1993), 304∼305쪽 참조. 별장은 호조에서 파견하였고, 호조를 대신하여 은점을 관리하였다. 이들 별장은 호조가 은점을 관리하도록 임시로 차송한 자들이었고 국왕이 임명한 정식관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을 흔히 ‘差人’ 또는 ‘私差’로 표현하였고, 서울에서 차송되었다 하여 ‘京差’로도 표시하였으며 군·영문의 감관과 혼동하여 ‘監官’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호조 소관 은점의 별장들은 군·영문의 감관과는 달리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감영에서 차송한 별장 곧 營差들까지도 서울에 거주하던 자들이었다. 군·영문의 감관들은 광산에 대한 기술과 식견을 갖추고 또 광산을 개발한 지방민들이었지만, 은점의 별장에는 종래 군수용의 광물을 군·영문에 買納하여 포상을 노렸던 서울 상인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즉 이들 부상대고는 대신·중신들의 ‘사인’으로서 그들의 청탁에 힘입어 호조의 別將帖을 따내 별장으로 파견되고 있었다. 한편 호조로서도 그들이 서울에 거주하는 부상대고이자 대신·중신이 보증하는 자들이며 영리에 밝고 재력과 신원이 확실하였으므로 이른바 “勤幹可信人”0462)≪承政院日記≫905책, 영조 16년 정월 20일.으로 여겨 택차하게 마련이었다.

 별장은 호조를 대신하여 설점을 주관하지만 나름대로 사업을 영위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설점이 끝나면 店所에 머물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수세시에만 현지에 내려갔다. 그러나 별장이 설점과 수세 임무를 담당하면서 그 대가로 은점에서 수취하는 이득은 상당하였다. 별장의 몫은 은점의 생산량에 따라 차이가 컸지만, 당해 은점의 월간 또는 연간 총생산액 중 2/3 가량을 수취하였다.0463)≪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6월 26일. 따라서 은맥이 풍부한 곳의 별장이면 가히 일확천금을 실현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위정자들도 은점의 생산품이 대부분 별장의 돈주머니로 들어감을 지적하였고, 그러한 별장의 모리행위를 경멸하여 흔히 ‘別將輩’·‘差人輩’라 지칭하기 일쑤였다.0464) 柳承宙, 앞의 책, 306쪽. 별장의 모리행위는 은점의 생산물에 대한 공식적인 분배 몫에만 있지 않았다. 이를테면 李旭과 같은 자는 숙종초에 군·영문에 군수물화를 ‘收價貿納’하고 영직의 포상을 받았지만,0465)≪承政院日記≫41책, 숙종 13년 3월 25일. 趙泰采의 사인이기도 한 부상대고였다. 그는 조태채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 成川銀店의 별장이 되었는데, 營庫錢 42,500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고 은점의 연군들에게도 교묘한 명목을 붙여 정은 1,672냥과 전문 7,685냥을 수탈하였기 때문에 숙종 28년(1702)에 고발되어 같은 왕 30년 4월 평양에서 주살되었다.0466)≪肅宗實錄≫권 37, 숙종 28년 7월 경신 및 권 39, 숙종 30년 4월 갑자.

 이처럼 별장들은 은점의 분배 몫뿐 아니라 때로는 관료와 결탁한 영리행위나 연군의 착취를 통해 사리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은점에 자본을 투입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호조는 언제든지 별장직을 박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한 별장에게 한 곳의 은점만이 아니라 2∼3곳의 은점 수세를 맡기기도 하였다. 별장은 결국 수취제도가 미비했던 당시에 호조 소관 은점의 수세청부업자로 기생한 셈이다.0467) 柳承宙, 앞의 책, 306∼307쪽.

 은점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운영한 것은 店匠이었다. 점장들은 은석을 식별할 수 있는 식견을 지녔거나 채광과 제련 기술을 갖춘 전업적인 광산기술자들이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은광이 개발되었다. 이들이 광맥을 발견하면 설점의 허가를 따낼 만한 능력과 재력을 갖춘 자를 찾아 별장으로 삼았으며, 기존 은점의 광맥이 단절되면 다시 새로운 광맥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각기 분화된 공정에 따라 연군을 거느리고 채굴·제련작업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점장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호조는 점장들을 과세 대상인원에서 제외하여 연군들과 엄격히 구분하였고,0468)≪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2월 13일. 그 대신 이들에게는 생산한 은괴에 반드시 점명과 점장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여 품질을 보장해야 하는 책임을 지웠다.0469)≪備邊司謄錄≫95책, 영조 10년 6월 21일. 이들 점장의 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20∼30명에 달하였다.0470)≪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6월 26일.
≪承政院日記≫470책, 숙종 38년 8월 3일.

 이들 중 한 사람이「두목」이 되어 점역을 총관하였다. 별장이 서울에 머무는 기간은 물론, 별장이 현지에 머무는 동안에도 점소는 사실상 두목의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두목은 은점의 채굴·제련작업을 지휘 감독하면서 생산한 은을 관장·분배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곧 두목이 실질적인 은점의 관리 경영자였으며 별장은 호조에 바치는 稅銀과 자기 몫으로 분배된 은을 받아가는 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0471)≪承政院日記≫679책, 영조 5년 2월 21일.
≪備邊司謄錄≫85책, 영조 5년 2월 26일.

 점장들에 의하여 은맥이 발견되고 점장들이 선정한 별장이 호조의 공문을 받아 설점에 착수하면 본읍과 인근의 농민들,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일시에 운집하였다. 이들이 이른바「鉛軍」들이었다. 연군이란 칭호는 군·영문의 鉛店에 종사하던 모군에게 붙여졌던 것으로서 은점에도 전용된 셈이다. 그것은 연점이 곧 은점이었기 때문이다. 연군에는 元定鉛軍과 加募鉛軍의 구분이 있었다. 원정연군은 설점시 정원으로 등록된 연군이며 가모연군은 은맥이 풍부하여 추가로 모집·등록한 연군이다. 어떻든 당시 별장제하 은점의 연군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로 그 성격을 간추려 볼 수 있다.

 첫째, 연군은 세은의 수취대상이었고, 연군수는 곧 세은액을 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호조에서는 원정연군과 가모연군의 장부를 작성하여 해마다 한 사람당 은 5전씩을 기준으로 한 세은을 수취해왔다.0472)≪備邊司謄錄≫41책, 숙종 13년 정월 2일 및 141책, 영조 38년 3월 17일.
≪承政院日記≫509책, 경종 원년 2월 5일.
南九萬,≪藥泉集≫4, 疏箚 五十度呈辭後乞免兼論採銀事箚.
李恭遇,≪換几翁漫錄≫ 10, 暗行御史書啓.

 둘째, 연군들에게는 군역과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호조는 소관 은점의 연군들에게 帖文을 발급하여 군역과 잡역을 면제하는 표징으로 삼게 하였다.0473) 위와 같음.

 셋째, 연군들에게는 매달 또는 매년 일정액의 노임이 지급되었다. 연군은 군·영문의 군수광산에 징발된 부역 농민과는 달리 생업을 찾아 투신한 노동자들이었다. 연군에게 지불된 노임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대개 은점의 총생산량 중에서 1/3 가량이 이들의 몫으로 분배되었다고 한다.0474)≪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6월 26일.

 넷째, 연군들은 본읍 및 인근 읍의 농민과 농촌에서 유리된 빈민들이었으며 이농민의 대다수는 세역을 도피한 처지였다. 따라서 위정자들은 이들을 흔히 “생활할 터전도 없고 호적에도 들어 있지 않은 무리”,0475)≪承政院日記≫324책, 숙종 13년 9월 13일. “의지할 곳 없는 부류들로 세역을 피해 투입한 자들”0476)≪承政院日記≫470책, 숙종 38년 8월 3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연군수는 정수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몇몇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앞에 서술한 군·영문 연점의 연군수보다는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곳곳마다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있는 모군들”,0477) 南九萬,≪藥泉集≫4, 疏箚 五十度呈辭後乞免兼論採銀事箚, 숙종 13년 3월 15일. “각 도에 널리 가득찬 연군들”0478)≪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2월 13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연군들이 빈민들로 구성되고 또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나고 정치적인 문제도 심각하였다. 은점의 연군들이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부녀자를 약취하는 등의 불상사도 없지 않았지만 연군들은 살 길을 찾아 은점에 투신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소속한 은점을 다른 관청의 연군들이 침해할 때에는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고 사사로이 끌어다가 처벌하는 등 피나는 싸움도 일으켰다.0479)≪承政院日記≫ 530책, 경종 원년 4월 30일·5월 27일. 이 때문에 위정자들은 이들에 대한 단속과 규제를 게을리할 수 없었으며 특히 李麟佐의 난이 일어난 후에는 더욱 이들을 경계하였다. 위정자들은 연군 중에 도적들이 투입되어 절도행위가 잦음을 걱정했을 뿐 아니라0480)≪承政院日記≫688책, 영조 5년 7월 19일 및 875책, 영조 14년 7월 22일. 흉년에는 이들이 도적떼로 변모하여 불의의 사태를 유발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0481) 李恭遇,≪換几翁漫錄≫10, 暗行御史書啓別單. 심지어는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무과의 出身들이 연군과 결합하여 명말의 流賊들처럼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어떻든 별장제하의 은점은 점장들에 의하여 광맥이 발견되고 별장이 선정된 후 호조의 경비로 설점이 이루어졌다. 두목의 총관하에 채굴·제련·벌목·운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각 공정에 점장들의 지휘 감독을 받는 수많은 연군들이 분속되어 분업적 협업으로 점역이 이루어졌다. 두목은 실질적인 경영자로서, 생산한 은에서 호조 납세은과 별장·연군들의 몫을 나누고 그 나머지를 점장들과 분배하였다. 이러한 별장제하 은점의 경영형태는 일종의 관청 선대적 민영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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