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6. 광업의 발달
  • 2) 18세기말 19세기 전반「물주」제하의 광업 실태
  • (1)「별장」제의 폐지와「수령수세」제의 성립

(1)「별장」제의 폐지와「수령수세」제의 성립

 호조 별장제하의 은광업도 18세기 초·중엽부터 점차 쇠퇴해갔다. 별장제하의 은광업 발전을 저해한 세력은 軍·營門과 군·영문 소관하에 있었던 監官·鉛軍들이었다.

 숙종 28년(1702)에 호조가 군·영문의 연점을 흡수하고 設店收稅權을 독점함으로써 군·영문은 稅鉛·稅銀을 수취할 재원을 상실하였고 감관과 연군들도 나름대로의 이권과 생활터전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군·영문과 감관·연군들은 상호간에 이해를 같이하면서 호조의 독점적인 설점수세권에 철저히 도전하였다. 호조의 독점적인 설점수세권에 도전하는 방법은 새로운 광산을 비합법적으로 개발하는 길과 호조 소관 광산을 갖가지 방법으로 수탈하는 길이었다.

 우선 군문의 경우, 호조에서 세연을 군문에 분송토록 한 숙종 28년의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들의 수용 연환을 조달하기 위하여 때로는 연점의 설치를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조 소관 은점의 세연 수취권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금위영이 숙종 38년에 谷山銀店의 세연 수취권을 따낸 데0482)≪承政院日記≫470책, 숙종 38년 8월 3일. 이어 경종 2년(1722)에는 수어청이 淸風·丹陽銀店을 소관하에 두었고0483)≪承政院日記≫546책, 경종 2년 10월 2일. 이듬해에 다시 高原銀店의 세연 수취권을 갖게 되었다.0484)≪備邊司謄錄≫75책, 경종 4년 5월 3일. 그리고 어영청도 경종 4년에 錦山銀店을 소관하에 흡수하였고0485) 위와 같음. 훈련도감은 영조 16년(1740)에 역시 곡산은점의 세연 수취권을 차지하였다.

 한편 호조가 군·영문의 연점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대부분의 감관과 연군들은 산은지가 풍부한 평안도와 황해도로 투속하였고 그 곳에서 다시금 은광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각 도 감영 중에서도 특히 황해·평안양도의 감사는 管餉使를 겸대하고 있음을 구실로 도내의 호조 소관을 제외한 산은지를 찾아 은점을 신설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게 되었다. 나아가 황해도의 수안이나 평안도의 성천 등 은광맥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호조 소관 은점의 근처에도 은점을 설치하여 상호간에 관할권을 둘러싼 분쟁을 야기하였다.

 감영소속 별장·은군과 호조소속 별장·은군 간에는 협박과 칼부림이 자행되었고 전자는 때로는 후자를 관아로 납치하여 고문하기도 하였다.0486)≪承政院日記≫530책, 경종 원년 4월 30일·5월 27일. 호조와 양도 감영 간의 분쟁을 계기로 정부는 경종 원년(1721)에 황해감영 소관의 은점을 모두 호조에 이속시키고 설점수세권을 박탈하였으나 평안도만은 감사가 국방·외교상의 중요성과 호조의 ‘分戶曹’라는 재정상의 유관성을 내세워 설점수세권을 고수하였다.0487) 柳承宙, 앞의 글(1976a), 621∼622쪽. 따라서 평안도에는 호조와 감영이 경쟁적으로 은광개발을 장려하고 설점 수세했기 때문에 18세기초 평안도의 은생산은 7도의 은점 생산을 능가했다고 한다.0488)≪備邊司謄錄≫84책, 영조 4년 12월 17일.

 한편 각 도 감영에서도 진휼비를 염출한다는 명목으로 호조 소관 은점의 수세권을 차용하기도 하고 각종 명목의 잡세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감영에서는 차인들을 호조 소관 은점에 파견하여 風爐稅·幕稅·路稅·穴稅·地稅 등의 잡세를 수탈하였는데 이는 호조가 소관 은점에서 수취하는 원정세액보다 훨씬 많았다.0489) 柳承宙, 앞의 글(1976a), 625∼630쪽. 하지만 호조와의 분쟁 끝에 노세를 제외한 잡세들은 호조의 새로운 세목으로 전환되어 갔다.0490) 柳承宙,<朝鮮後期 鑛業의 經營形態에 관한 一硏究>(≪歷史敎育≫28, 1980), 95∼96쪽.

 설점수세권이 박탈되자 각 도의 감사와 수령들은 호조의 은점설치를 철저하게 방해하면서 관내 은광업자들의 잠채를 비호하였다. 각 도의 감사와 수령들은 호조의 설점을 방해하기 위하여 갖가지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호조의 별장·은군들의 작폐와 良役문제를 위시하여 산은지가 관아·사직단·향교·서원·봉수대와 가깝다든가 山城主脈·嶺阨成脈·邑基來脈이라든가 土豪의 養山·墳山이라든가 도적의 우려, 민폐, 흉년 등 잡다한 명목을 붙여 은점의 설치를 방해하였다.0491) 柳承宙, 앞의 글(1976a), 651쪽.

 이처럼 감사와 수령들은 호조의 설점을 방해하여 관내의 산은지를 보존하는 한편 은광업자로 하여금 잠채토록 하고 일정량의 세은을 수취하려 한 것이다. 일례로 함경도의 定平 산은지는 영조 6년(1730) 12월에 연군 2명이 잠채를 시도하다가 정평부 관원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 곳이다.0492)≪巡歷日錄≫권 8 참조. 이 사건을 계기로 호조에서 알고 설점 수세하려 하였으나 감사나 수령의 방해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10월 본부의 토호가 생은 수십 태를 잠채하다가 호조의 별장에게 발각되었다.0493)≪備邊司謄錄≫90책, 영조 7년 10월 12일. 이는 정평부의 수령이 관내 토호의 잠채를 비호하기 위하여 호조의 설점을 방해한 사례였다. 이처럼 설점수세권이 박탈된 각 도의 감사나 수령이 비합법적으로 허락한 잠채광업은 순수 민간자본으로 운영되었으며 뒷날 물주제하 광산 경영형태 발생의 단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이 18세기 전반에 걸쳐 호조와 군문·영문 특히 설점수세권이 박탈된 각 도 감사·수령과의 연은광산 개발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자 정부는 영조 16년 이를 규제하기 위하여 금령을 제정하였다. 이 금령은 좌의정 兪拓基의 다음과 같은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은점의 설치로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수원을 고갈케 하며, 10여 장 내지 수십 장에 달하는 갱 내에 많은 사람이 압사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은점에서는 각처의 놀고 먹는 무뢰배가 몰려들어 서로 싸우고 살상하고 도둑질하는 폐단이 일어난다. 明末 流賊의 난이 鑛稅로 인해 야기되었던 점을 고려하여 호조나 각 군문 및 각 도, 각 읍을 막론하고 朝令없이 연·은점을 설치할 경우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承政院日記≫ 905책, 영조 16년 정월 20일).

 이 때 중죄에 대한 처벌 규정은 영조 22년에 간행한 ≪續大典≫에 등재하였다. 곧 “호조와 각 군문 및 각 영, 각 읍을 막론하고 조정에 稟達하지 않고 은·연점을 신설한 자는 道臣 이상은 파직하고 수령 이하는 拿問한다”0494)≪續大典≫戶典 雜稅.는 것이다.

 이 금령이 지니는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숙종 28년(1702)의 조처는 호조의 독점적인 설점수세권에 대한 원칙을 설정했을 뿐 처벌 규정은 없었다. 따라서 이 금령이 반포되기 이전에는 설점수세권이 배제된 각 군문이나 영읍의 관장이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점수세하거나 잠채를 비호해왔다. 호조에 발각되지 않는 한 계속 영위할 수가 있었고 또 발각되었다 하더라도 잠채자만이 처벌될 뿐 관장이 처벌받지 않았으며 또 처벌할 법적 근거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군문과 영읍의 관장들은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은점을 설치할 수도, 잠채를 비호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발각될 때는 본법에 의해 처벌되기 때문이었다.

 둘째, 호조는 전국의 기존 연·은점에 대한 전관수세권을 박탈당하지는 않았지만 독자적인 설점권은 상실하였다. 군문이나 영읍과 마찬가지로 은점을 신설할 경우에는 사전에 반드시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종래 호조는 전국의 연·은산지에 대한 독자적인 설점수세권을 쥐고 있어서 은점을 신설할 때에 설점의 가부를 사전에 상주하지 않았다. 다만 감사와 수령이 설점을 방해하거나 은점을 침해할 때 이를 금제하기 위하여, 또는 군·영문의 연·은점을 탈취하거나 수세권을 차용하기 위해서만 왕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구점을 흡수하거나 신점을 설치할 경우 반드시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결국 이 금령은 은광개발의 폐단과 반란의 소지를 두려워한 영조와 유척기 등이 호조와 군문 및 영읍의 자의적인 설점행위를 억제함으로써 연·은광산개발을 저지할 의도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이후 호조의 은점설치는 둔화되었고 오래된 기존의 은점들도 광맥의 단절로 폐쇄되어 갔다. 금령이 발효되고부터 영조 51년(1775)에 이르기까지 35년간 구점으로서 복설된 곳이 平山·安州·三陟 등 3개소이고 신설된 은점이 江界·江陵·定州 등 3개소로, 모두 6개소가 설치된 데 불과한 반면 기존 은점 중 폐쇄된 곳은 成川·端川은점과 영남의 6∼7개소였고, 신설이 허가되지 못한 곳은 淮陽·理山·碧潼·綾州·永興·昌城·南陽·咸昌 등 8개소에 달했다.0495) 柳承宙, 앞의 글(1976a), 675쪽.

 호조가 왕의 허가를 얻지 못해 은점의 신설과 복설이 둔화되고 기존의 구광들이 계속 폐쇄됨에 따라 은점에서 유리된 은군의 수는 해마다 증가되어 갔다. 은점에서 유리된 은군들은 점차 설점권이 약화된 호조에 의존하기보다는 영읍의 비호하에 잠채를 도모할 방도를 더욱 강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에는 호조 소관 은점이 줄어들었던 것과는 달리 영읍 간에 은광의 잠채문제가 표면화되고 있었다.0496) 柳承宙, 위의 글, 672∼675쪽.

 잠채은점은 전술한 정평은점과 같이 영읍의 비호하에 순수한 민간자본에 의해 설치 운영되었다. 잠채은점이 호조에 발각되면 호조 소관 은점으로 치부되지만 반드시 별장을 파견·수세해야 할 이유는 없게 되었다. 영읍에서는 별장의 폐단과 모리행위를 규탄하면서 조세의 수취원칙에도 위배되는 별장수세제를 폐지하고 수령수세제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정부는 영조 27년에 理山·碧潼銀店을, 같은 왕 40년에는 江界銀店을 각각 영읍으로 하여금 관장·수세케 하고 별장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같은 왕 51년에는 별장제를 완전히 혁파하고 본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관장·수세토록 하였다.0497)≪度支志≫外篇 8, 版籍司 財用部 金銀事實, 영조 51년 정월. 은광업에 적용된 수령수세제는 민간자본에 의한 광산경영, 곧 물주제하의 광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정조 4년(1780)에 동광업에도,0498)≪日省錄≫정조 4년 5월 29일. 순조 6년(1806)에는 사금광업에도 적용되어 갔다.0499)≪備邊司謄錄≫197책, 순조 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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