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6. 광업의 발달
  • 2) 18세기말 19세기 전반「물주」제하의 광업 실태
  • (2) 물주제하의 광산경영 실태

(2) 물주제하의 광산경영 실태

 당시의 물주들은 형편에 따라 금광에 투자하기도 하고 은·동광업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므로 금·은·동광업을 막론하고 그 성격은 다를 바가 없었다.0500)≪備邊司謄錄≫176책, 정조 14년 4월 4일.
≪日省錄≫정조 23년 12월 8일.
그리고 당시 금·은·동점의 물주를 기록상으로 식별하기 또한 용이하지 않다. 그것은 첫째 금·은·동점의 수령수세제가 동시에 적용되지 않았고 5년 또는 35∼36년간의 시차를 두고 실시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정조연간에는 금광을 제외한 은·동점에서만 물주를 찾아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둘째는 금·은·동점의 물주란 명칭이 고유한 역사적 용어였으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호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은·동점의 물주는 기록상 대체로 물주로 표현되었지만0501)≪關西平亂錄≫13책, 임신 2월 8일.
≪左捕廳謄錄≫9책, 嘉慶 무인 3월 21일·23일.
그들의 대부분이 상인이었기 때문에 私商으로도 불려졌으며, 물주의 모리행위를 지탄하여 모리배·奸民·駔儈로도 불렀다.0502) 이하 물주의 호칭과 신분, 자격요건 등에 대해서는 柳承宙, 앞의 책, 381∼384쪽 참조. 그런데 금·은·동점의 물주의 호칭은 설점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설점 전 물주가 호조에 산지를 보고하는 단계에서는 陳告人, 入聞者, 또는 聽聞者로 지칭되었고 호조의 관문을 얻었을 때에는 ‘圖得京關’·‘圖出戶曹關文’·‘圖得公文’·‘圖得京司關文’한 자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설점한 뒤에는 물주가 호조 소관 점의 점주이자 호조에 광세를 납부토록 지명된 공인이었기 때문에 호조의 ‘差人’0503)≪日省錄≫정조 22년 6월 11일.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금·은·동점의 물주들은 점소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店民 또는 店漢輩로 혼칭된 경우도 흔히 있었다.

 어떻든 당시 금·은·동점의 물주들은 대부분 상인들이었고 그 중에는 송도의 부상 등 지방 상인도 있었고 토호나 부민자제들도 끼어 있었다. 또 물주는 호조의 관문과 영읍의 허락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여건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서울의 太醫가 물주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掌務官과 閑良도 물주가 되고자 하였다. 곧 금·은·동점의 물주는 서울과 지방의 상인과 지주 및 하급관원 등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고 관부의 허가를 얻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설점의 허가는 원칙적으로 호조에서 받아야 했지만 정조 말년부터는 영읍에서도 사채를 허가하였으므로 설점허가 문제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더욱이 호조나 영읍이 허가없이 소규모로 잠채하던 금·은·동점의 경우는 물주가 설점허가의 부담을 질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원칙상 물주는 전술한 바와 같이 호조에 산지를 陳告하고 호조에서 당해 도에 관문을 띄운 후 計士(정조 연간)나 물주 자신이 간색 적간하여 영읍의 허가를 받는 동시에 호조에 납부하는 세액을 수납할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었다.0504)≪日省錄≫정조 4년 5월 29일.

 그리고 물주는 店을 설치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사금광산은 甘土層이 매장된 전토를 매입해야 하였지만 은·동광산은 채굴 및 제련장을 설치하고 각종의 생산도구를 구입하거나 제련용의 연료를 조달하는 등 각기 당해 광산의 종류와 작업과정이 다름에 따라 물주의 투자 대상이나 자본규모가 상이하였다.

 순조 11년(1811)에 禹君則은 洪景來亂에 가담할 군사를 모으기 위하여 서울의 물주가 채금비용으로 錢 수천 냥을 보냈다고 하였다.0505)≪關西平亂錄≫13책, 임신 2월 8일. 이것은 당시 사금광산에 투입된 물주들의 자본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같은 왕 18년에 호조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잠채를 시도한 서울 근교 延曙驛村의 은광은 시굴단계에 불과하였고 광맥도 보잘것이 없었지만 물주는 300냥을 투자하도록 되어 있었다.0506)≪左捕廳謄錄≫9책, 嘉慶 무인 3월 30일. 당시 금·은·동광에 투입된 물주의 자본은 최소한 300여 냥에서 많게는 수천 냥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호조의 허가를 받아내어 설점한 물주는 그가 투입한 자본금에 대해 높은 이윤을 수취하였고 광산물의 판매과정에서도 상당한 이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0507) 柳承宙, 앞의 책, 384∼385쪽.

 물주는 穴主나 德大를 정하여 광산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혈주나 덕대는 대개 현지에 거주하는 자들로서 광산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고 있었지만 물주의 자본에 예속된 상태여서 항시 물주의 감시 감독을 받고 있었다.0508)≪日省錄≫정조 22년 2월 6일. 곧 혈주나 덕대 등은 호조의 관문을 얻고 설점 채광할 자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물주를 물색하였고 물주는 광산에서의 횡재를 꿈꾸며 그것을 현지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혈주·덕대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물주는 자기 자본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믿을 만한 혈주·덕대를 택하는 것이 중요하였고 동시에 혈주·덕대는 물주의 자본에 힘입어 광산을 경영하였으므로 물주의 감시 감독을 배제할 수 없었다.

 혈주·덕대는 설점할 때 참여한 자들을 각 혈과 각 공정에 배치하여 광군의 작업을 지시 감독하였다. 혈주·덕대는 점소의 채광·제련작업을 총관하는 동시에 생산된 광물을 수합하고 물주를 통해 판매하였다. 곧 혈주·덕대는 광산의 채굴·제련작업과 생산물의 수합 및 분배를 담당한 광산의 실질적인 경영주였고 설점시 동참한 자들과 더불어 물주의 자본에 의지하여 광산업을 영위한 소생산자들이었다. 따라서 혈주·덕대와 설점에 동참한 자들은 광산의 생산물 중에서 관청세납액과 물주의 몫, 그리고 연군들의 雇價를 제하고 난 나머지를 서로 공동분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509)≪左捕廳謄錄≫9책, 嘉慶 무인 3월 30일. 이러한 점에서 혈주·덕대와 설점에 동참한 자들은 자본의 성격은 달라도 별장제하 은점의 두목·점장들과 유사하였다.

 다음 금·은·동점의 연군들은 광산의 채굴 및 제련작업에 종사한 자들로서 그들에 대한 당시의 고유한 명칭은「鉛軍」0510)≪備邊司謄錄≫169책, 정조 10년 8월 23일.이었지만 店民이라고도 하였고 나쁜 뜻으로 店漢輩라고도 하였다. 금점의 연군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金軍, ‘採金之人’, ‘採金之徒’, ‘採金爲業者’, ‘淘採之類’라고 하여 연·은·동점의 연군과 구분할 때도 있었다.0511) 柳承宙, 앞의 책, 385쪽. 당시의 점소에는 농촌에서 유리된 빈민들이 연군으로 투입되었고 정조연간에는 이농민의 대다수가 금점으로 몰려들었다. 정조연간에 금점에 투입되었던 연군의 수는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정조 4년(1780)에 朴趾源은 성천사금지의 경우 사방에서 몰려든 ‘無賴遊手’들로 촌락이 형성되었고 그 수는 무려 10여만 명에 달한다0512) 朴趾源,≪燕巖集≫熱河日記 太學留舘錄.고 하였다. 정조 8년에 전평안감사 朴性源은 ‘食力之民’의 태반이 金穴에 투입되었다고0513)≪正祖實錄≫권 17, 정조 8년 2월 신사. 하였고 같은 왕 19년 熙川과 定平의 사금지에는 각각 수백 명의 금군이 채금하고 있었다.0514)≪箕牒≫2, 정조 19년.
≪日省錄≫정조 19년 4월 2일.
같은 왕 20년에 사간 李羽逵는 연군들이 당을 지어 채금하는데 “수백, 수천 명에 달한다”0515)≪日省錄≫정조 20년 10월 14일.고 하였다. 정조연간의 금점에는 곳에 따라 다르지만 수백, 수천 내지 십여만 명에 가까운 연군들이 투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연간의 금점에 수백, 수천 명의 연군들이 몰려 금을 채취하고 있었지만 철종 9년(1858)의 함경도 암행어사 洪承裕의 서계에 의하면 금점만이 아니라 은·동·연점을 막론하고 하나의 광산이 개발되면 그 곳에 투입되는 연군이 기천 명을 넘게 된다고 하였다.0516)≪日省錄≫정조 9년 2월 3일. 당시 금·은·동점의 연군들은 대다수가 농토를 잃고 힘으로 벌어 먹기 위하여 농촌을 떠난 유민들이었다. 그 때문에 정부가 수 차례에 걸쳐 채광을 엄금하고 연군을 쫓아냈지만 연군들은 쉴새없이 광산에 숨어들어 잠채하였고0517)≪備邊司謄錄≫197책, 순조 6년 12월 12일.
≪箕牒≫5, 정조 19년.
때로는 里任을 매수하거나 里尊이나 風憲을 회유하여 채광을 시도하였다. 또 때로는 처벌을 무릅쓰고 ‘擊錚原情’하였으며 광산의 규모에 따라서는 영읍수령을 종용하여 공식적인 설점도 요구하였다.0518) 柳承宙,<李朝開港前後의 鑛業政策硏究>(≪亞細亞硏究≫19-1, 高麗大, 1976), 217∼218쪽. 심지어 그들은 방해자를 살해하기까지 하면서 광산을 채굴하려 하였다.

 연군들은 물주의 자본에 예속되는 동시에 점역에서는 혈주나 덕대의 지시와 감독을 받으며 채광·제련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물주는 연군을 모취하기 위하여 선금을 지불하였고 연군의 수를 한정하였으며 연군들이 사용할 채굴·제련도구들을 마련해 주었다.0519) 순조 18년에 잠채한 서울 근교 연서역촌 향현은광의 경우에 사용된 채광도구는 부자·철추·철정·장도리 등이었다(≪左捕廳謄錄≫9책, 嘉慶 무인 3월 30일). 이에 따라 연군들은 물주의 자본에 예속되어 갔으나 점소에서의 작업과정에서는 혈주나 덕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연군들의 점역은 사금광일 경우와 은·동광일 경우에 따라 달랐다. 당시 주로 水淘法에 의하여 채취되고 있었던 사금광산에서는 小鑿·布帒·木瓢 등 간단한 소도구로 甘土를 채굴하고 강물에 운반하여 淘沙하고 있었다. 사금광의 연군들은 굴토군·운반군·도사군으로 분리되어 각각 작업을 분담하여 협업형태의 생산조직을 갖추고 있었다.0520) 丁若鏞,≪增補與猶堂全書≫권 5, 牧民心書 11, 工典六條 山林.
≪辛未西賊日記≫大陳班師之日.
그러나 은·동광산은 사금과는 달리 광석을 제련해야 하기 때문에 제련용의 풍상과 야로를 설치하고 연료를 조달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은·동광산에서는 공정이 더욱 세분화되어 연군들은 각기 채광·운반작업과 제련작업 그리고 연료를 채취·조달하는 작업들을 분담하는 분업적 협업이 운영되었다.0521)≪左捕廳謄錄≫9책, 嘉慶 무인 3월 30일.

 금·은·동광 중 임금노동제가 최초로 발생한 것은 역시 수령수세제가 먼저 적용되고 물주의 투자가 선행되었던 은·동광산이었다. 은점은 영조 51년(1775)에, 동점은 정조 4년(1780)에 각각 수령수세제가 적용되어 물주의 자본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 12년 禹禎圭가 상소한 다음의<疏陳冊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근래 정부가 은점이 민폐가 크다는 이유로 상주하여 설점을 금하고 동점만 주전하기 위하여 허가하였는데 만약 은점이 폐가 된다면 동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은점이나 동점이 모두 폐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조정에서 각 도에 공문을 띄워 산은읍으로 하여금 은을 채굴·상납토록 하면 지방관이 부득불 역정을 징발하여 채굴·제련할 것이므로 농업을 폐하니 실로 민폐가 되겠지만 조정에서 산은지의 설점을 허가한다면 부상대고들이 각기 물력을 내어 傭民을 모취하면 無土不農之民이 점민이 되고자 그 곳에 모여들 것이고 채굴·제련하여 지부와 영읍에 납세하고 나머지를 물주에게 돌리면 토지없는 백성들도 힘입어 살아갈 수가 있으니 공사 간에 이로운데 어찌 민폐가 되겠습니까. 신은 초야에 살았기 때문에 은점의 폐단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이에 감히 앙진하니, 전하는 은점을 많이 설치하도록 허가하십시요(禹禎圭,≪經濟野言≫銀店勿禁之議).

 금·은·동광의 임노동은 18세기말에 은점과 동점에서 발생하고 있었으나 금점에서도 순조 6년(1806)에 수령수세제가 적용되고 물주의 자본에 의하여 점역이 이루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임노동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첫째 丁若鏞이≪牧民心書≫에서 사금광산의 관영론을 제기한 가운데 “인부를 고용하여 금광을 채굴하고 매일 인부들에게 약간의 임금을 지급한다(본토의 풍속이 각기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0522) 丁若鏞,≪增補與猶堂全書≫권 5, 牧民心書 11, 工典六條 山林.라고 한 점이다. 정약용이 사금광산의 관영론을 제기할 당시에는 이미 금광에도 수령수세제가 적용되고 물주의 자본에 의한 경영형태가 일반화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매일 雇錢을 지급하되 고전의 다소나 지불방법 등은 현지의 관례에 따르도록 부언하였고 그 한 사례로서 “금군들에게 비록 임금을 지급하였지만 돌려보낼 때는 사금광의 일부를 떼주어 3일 동안 私採토록 한다”0523) 위와 같음.라고 하는 방법도 제시하였던 것이다.

 둘째는 순조 12년 洪景來亂 때 그 군사들이 정주성에 물러나 있으면서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파하였는데 그 때 굴토군 중 慈山 굴토군 8명에게 선봉장이 금점의 하루 役價를 묻자 1인당 3전이라고 대답한 사실이다.0524)≪辛未西賊日記≫大陳班師之日. 즉 당시 물주의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금·은·동점에는 임노동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임금은 사금지의 연군이 3전 가량이고 연·은광의 연군이 주야 1일 2냥 정도였다.0525)≪韓國鑛業調査報告≫(함경도), 61∼62쪽. 금점의 경우 곳에 따라서는 연군에게 고가 대신으로 사금지의 일부를 시한부로 채취하게 하였지만 고가는 동전으로 지불하는 것이 통례였던 것 같다. 당시 광산에 투자한 물주의 자금이 동전이었으므로 연군들의 고가도 동전으로 지불하는 것이 간편하고 용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금·은·동광에서 생산한 금과 은·동은 제품의 용도가 각기 달랐기 때문에 판로도 역시 상이하였다. 금은 종래 귀금속으로만 이용되었으나 점차 화폐적 기능을 갖게 되었고 19세기초에는 이미 국가재정상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어 관비로 사금을 구입하였다.0526)≪備邊司謄錄≫200책, 순조 10년 4월 18일. 그러나 사금은 대청 사무역에서 특히 높은 상품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赴燕譯官과 燕商들에 의하여 매입되고 있었다.0527) 丁若鏞,≪增補與猶堂全書≫권 5, 經世遺表 7, 地官修制 田制 19, 井田議 1. 은은 이 시기에도 국내외의 공사거래에 화폐로서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관아의 차인과 국내외의 상업에 종사한 상인들이 주로 店銀을 구입하고 있었다.0528) 柳承宙, 앞의 글(1980), 99∼107쪽. 동은 동전과 군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호조와 선혜청·진휼청 및 三軍門에서 차인을 동점에 파견하여 구입하였고 사상인들이 각종 그릇의 제조원료로 구입하고 있었다.0529)≪日省錄≫정조 4년 5월 29일.
≪備邊司謄錄≫211책, 순조 23년 4월 3일.

 따라서 금·은·동광산의 점촌에는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서 파견한 차인들과 국내외의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금·은·동을 구입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또 수천, 수백 명의 연군과 그 가족들에게 생필품을 팔기 위하여 坐賈들도 상주하였으므로 茅幕과 土室이 즐비하고 상거래가 성행하여 점촌은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루었다. 그리고 점촌은 일시에 형성되고 많은 인구가 갑자기 몰려들었기 때문에 금·은·동점이 설치되는 고을은 물론 인근의 도읍에서도 米·布를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폭등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다.0530)≪書啓輯錄≫9-6, 정조 14년 3월 24일.

 수령수세제하에서의 금·은·동점에서는 매달 店稅(원정 금·은·동세)를 본읍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고 점세를 수납하는 의무는 전술한 대로 물주에게 지워져 있었다. 물주가 납부한 점세는 본읍의 담당 감관과 이속이 수봉하였고 호조의 銀色으로 올려 보내졌다.0531) 柳承宙, 앞의 책, 396쪽. 그리고 금·은·동광에는 본읍의 수령이 호조에 수납하는 점세 외에도 호조와 영읍이 점소나 점촌에서 수취하던 잡세도 있었다. 정조 5년(1781) 호조 계사제하 성천·자산금점에는 人摠稅가 있었고 같은 왕 22년 장용외영 소관 수안금점에는 幕稅·土稅·廛稅 등 잡세의 명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0532)≪備邊司謄錄≫162책, 정조 5년 3월 15일 및 188책, 정조 22년 7월 27일. 한다. 그 밖에 물주제하의 은·동점에는 看色稅가 있었다.0533) 禹夏永,≪千一錄≫4, 採銀便否說.

 그런데 별장제하의 은점과 차인제하의 금점에서 거뒀던 풍로세·혈세·토세·노세·막세·전세·인총세 등이 물주제하의 금·은·동점에 모두 적용되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우선 풍로세는 사금광산이 아닌 은·동광산의 제련기구인 풍상과 야로에 부과한 제련장의 세목이었다. 그리고 별장제하 은점의 풍상과 야로는 호조의 경비로 제작된 것이므로 수세가 가능하지만 물주제하 은·동점에는 적용할 명분이 없었을 것 같다. 혈세와 토세의 경우에도 혈세는 은·동광혈의 채광장에 부과한 잡세였고 토세는 사금광산에 부과한 잡세였다. 수령수세제하의 사금광산에서는 광산이 농토일 경우 물주가 매입하여 채취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과연 토세가 부과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노세는 감사가 파견한 營裨가 점촌에 출입하는 행상들로부터 수취한 일종의 통행세로서 금·은·동점에 다 같이 있었던 세목이다. 막세와 전세는 점민의 묘막·토실에 부가한 가옥세와 좌고들의 상점에 부과한 점포세와 유사한 것들로서 본읍에서 모두 수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물주제하의 금·은·동점에서 실제로 물었던 세금은 매달 본읍에 납부하는 원정 금·은·동세가 상세였고 잡세로서 간색세와 금점의 토세나 은동점의 혈세가 부과된 듯하며 다른 잡세들은 점소와는 상관없이 점민이나 좌고 행상들에게 부과한 세목들이었다.

<柳承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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