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7. 어·염업의 발달
  • 1) 어업
  • (4) 어전·방렴류

(4) 어전·방렴류

 어전과 방렴은 발 어구이다. 어전의 원명은 漁梁이고 한글로 ‘어살’,0579) 金弘喆,≪譯語類解補≫佃漁補. 또는 ‘살’0580) 柳 僖,≪物名考≫권 2, 有情類 水族.이라고 하였다. 어전은≪균역사목≫에 언급되어 있듯이 나무·대·갈대 등으로 엮은 발을 조수가 흘러오는 쪽을 향하여 V자형으로 벌려 세워 말목으로 고정시키고, 양쪽 날개의 거리가 좁혀진 곳에 함정 장치인 임통을 설치한 어구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형태 외에도 지형에 따라 한쪽 날개가 없는 것 등 변형도 많았다. 다음의 金弘道가 그린 漁箭圖에 표현되어 있는 어전은 특수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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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金弘道의 漁箭圖
<그림 1>金弘道의 漁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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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전은 조선 초기부터 서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수가 증가하고 규모가 커졌다. 충청도의 경우에≪世宗實錄地理志≫를 편찬할 때에는 140개소였는데, 영조 26년

 (1750)에는 340개소로 늘어났다.0581)≪均役行覽≫御使 韓光肇書啓.

 어전에 대한 세금의 징수액은 어전의 규모나 수익의 다소에 따라 달랐다. 어전에는 물고기의

 종류별로 靑魚箭, 石魚(조기)箭, 眞魚(준치)箭, 잡어전 등의 명칭이 붙은 것도 있었다.≪균역사목≫에 의하면, 충청도에서는 청어와 조기 어전이 가장 유리하였고, 황해도에는 대나무와 삼(麻)으로 발을 엮은 土箭이 있었는데 잡히는 것이 새우나 게에 불과하여 이득이 아주 적으므로 세금을 매기지 않았다고 한다.

 방렴은 어전과 유사한 어구이나 간석지가 아닌 물살이 센 물 속에 설치하였다.≪균역사목≫에 의하면, 가장 성행했던 경상도의 방렴은 대를 엮어 발을 만들고 나무를 박아 기둥을 삼아 어로를 가로로 절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렴은 강과 바다에 따라 이름이 달랐는데, 바다에 있는 것은 簾, 강에 있는 것은 箭이라고 하였다. 또 바다에는 청어렴과 대구렴이 있고 강에는 江魚箭이 있었다. 방렴은 지금도 南海島나 三千浦에 거의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이를 竹防簾이라고 하는데 어민들은 ‘살’이라고 한다.

 ≪균역사목≫에 의하면, 잡어 방렴은 수 발에 불과한 대발을 조수가 왕래하는 곳에 설치하는 것으로 조수가 빠지면 땅이 드러나므로 이를 乾防簾이라고 하였다. 서해안의 어전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의 방렴 어법은 영조대에 白가라는 성을 지닌 사람에 의하여 함경도에 전파되었다.0582)≪日省錄≫정조 14년 4월 30일. 원산에서는 옛날에는 후릿그물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았는데 영조 42년(1766)에 방렴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 후 방렴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정조 4∼5년(1780∼1781)에는 근 200坐에 달하게 되었다.0583)≪備邊司謄錄≫180책, 정조 16년 윤4월 25일. 이곳의 방렴은 주로 청어를 어획하였다. 영흥만 일대는 청어의 농밀한 어군이 내유하였는데 그 곳이 방렴 설치의 적지였으므로, 방렴 어업이 도입되자 방렴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어업 발달의 한 단면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균역청사목≫의 전라도의 어전세 항목에 萬頃·扶安·務安·沃溝·光陽·順天·茂長에 防口簾, 蘆扈桶, 扈桶, 토전 등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소규모의 발 어구였다. 방구렴은 하구에 설치되었던 어전이었을 것이고 호통은 소형 어전이나 통발이었을 것이다. 이를 갈대로 만든 것이 노호통이다.≪균역행람≫에 보이는 扈箭·編簾 등도 역시 위의 것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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