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7. 어·염업의 발달
  • 1) 어업
  • (5) 대규모 어업의 발달

(5) 대규모 어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어구가 대형화하고 어업 경영규모가 큰 대규모 어업이 발달하였다. 대규모 어업은 어전 어업이나 방렴 어업과 같은 발 어구를 사용하는 어업과 어망을 사용하는 망어업에서 발달하였다.

 ≪균역사목≫에 의하면, 전라도의 어전은 대·중·소의 3등급으로 나누어 과세하였는데 大箭은 발의 길이가 500∼600파 혹은 300파, 임통의 수심은 2丈에 이르렀다. 양쪽 날개를 이루는 발의 길이가 최대 900m에 달하고 수심도 상당히 깊은 곳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어전으로 주로 조기와 청어를 잡았기 때문에 그것들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다. 황해도의 어전도 규모가 컸다.≪균역청사목≫에 의하면, 황해도의 청어 어전은 漁利의 다소에 따라 세금을 매겼는데 최고액이 250냥이었다. 잡어 어전의 최고액이 20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청어 어전은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어획량도 엄청나게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길이가 근 1㎞에 달하는 것도 있었던 대형 어전은 경영에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다. 영조 27년(1751) 충청도 관찰사 李益輔는 상소를 올려 균역법 실시 이후의 어세의 중과에 따르는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전·배·鹽盆을 물론하고 각 관청 혹은 富民이 모두 그 본 임자가 되어 어전의 기계, 배의 노, 염분의 鉤鐵 등의 물건을 맡아서 변통하여 준비하였는데, 거의 4, 5백 냥을 들여야 어전을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며 염분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 임자가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소위 본 임자가 모두 손을 떼고 물러나고 있습니다. 저 船人·漁漢·鹽夫는 다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는 거지와 다름없는 사람들로서 그러한 일 중의 하나에 노역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미 物主가 없어진 마당에 허다한 경비를 그들이 무슨 수로 변통하여 마련해 내겠습니까. 실상이 이러하므로 벌써 이산하여 도피한 자가 있어, 배나 어전은 자연히 파괴되기 전에 스스로 파괴되고, 염분 역시 陳廢되고 설치되지 않습니다(≪承政院日記≫1067책, 영조 27년 4월 28일).

 균역법 실시 이전에 어전이나 염분은 궁가·관청·토호 등에 의하여 私占되어 있었는데 어전의 기계(지주용 말목, 발 등), 배 등을 마련하는 데 400∼500냥이 소요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전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규모 어전의 경우에는 어전의 어장주가 어전 어업을 직영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균역법의 실시를 계기로 사점 어전이 모두 혁파되어 어장주인이 어업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의 방렴이나 어조도 규모가 컸다. 정조 원년(1777) 좌의정 金尙喆은 임금에게 여쭌 말 가운데, 통영에 소속시킨 경상도 오른쪽 연안 어전은 物力을 마련하기 어려워 熊川의 방렴 3곳과 巨濟의 어조 3곳만 골라 시설을 하였는데, 지난 해에 든 물력이 租 390석, 돈 2,310냥이었고, 이듬해 겨울의 어조와 방렴의 물력의 경비가 700여 냥에 달할 것인데, 6곳에서 얻는 이익은 500냥에도 미달한다고 했다.0591)≪備邊司謄錄≫158책, 정조 원년 5월 16일. 이 어장은 영조 51년 균역법 시행 전의 소유주였던 통영에서 되돌려 받은0592)≪備邊司謄錄≫158책, 정조 원년 3월 27일.
≪正祖實錄≫권 7, 정조 3년 3월 계묘.
후 직영한 것인데 3개의 방렴과 3개의 어조, 즉 정치망을 설치하는 데 막대한 물력이 소비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쌀 1석이 7냥이었던0593)≪續大典≫권 2, 戶典 收稅. 것을 참작하여 조 390석을 쌀 195석으로 치고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1,365냥이 된다. 처음에 신규로 설치할 때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데 1개당 평균 600냥 정도가 들었다면 그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어구로 주로 대구와 청어를 잡았으므로 그 어획량이 많았다.

 함경도에 설치된 방렴도 규모가 컸다. 정조 14년(1790) 함경북도 암행어사 徐榮輔의 書啓에 보이는 別單에 의하면, 방렴수가 많아져 각 방렴에 잡히는 물고기는 적어졌는데 방렴에 드는 人費는 수백 냥에 달하고 이는 모두 빚으로 마련한다고 하였다. 또 방렴마다 균역세를 내야 하는데 한번 失利하면 재산을 기울여 빚을 갚고, 里徵·族徵으로 세금을 납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렴 하나를 설치하는 데 연간 잡는 소가 數百千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였다.0594)≪日省錄≫정조 14년 4월 30일.
≪正祖實錄≫권 30, 정조 14년 4월 경진.
방렴어업을 경영한 사람은 원근에서 모인 무뢰배였고 이들은 公私 債錢을 내어 방렴을 설치하였다고 한다.0595)≪正祖實錄≫권 16, 정조 7년 11월 정유.

 중선망 어업은 가장 중요한 어선 어업의 하나로서 어선과 어망의 규모가 컸고 종사 어부의 수도 많았다.≪임원십육지≫에는 중선망의 제작 방법과 사용 방법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규모를 보면, 벼실을 꼬아서 만든 포대처럼 생긴 자루그물은 길이가 45파였고, 그물 입구의 둘레가 48파였다.0596)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漁條網. 길이가 45파라면 약 68m이고, 망구 둘레가 48파였다면 망구 지름이 약 23m에 달하였다. 19세기초에 이미 초대형 어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중선 어선은 이러한 대형 어망을 하나도 아닌 2개를 어선 양현의 밑쪽에 달고 조업하였다. 이 어업의 경영에 대해서는 濱海의 富戶가 1천 냥을 들여 배를 건조하고 그물을 떠서 고기를 잡는데 1년의 어획량이 아주 많아 巨萬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어망으로 서해안에서 조기와 청어를 잡았으므로 그 어획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후릿그물에도 규모가 큰 것이 있었다. 칡을 캐어 그 덩굴 껍질을 벗겨 가늘게 꼬아서 큰 그물을 만드는데 길이가 수십 자가 되고 너비가 수백 파에 이르기도 하여 이로써 강물을 막기도 하고 조수가 왕래하는 해안을 포위하기도 하는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으며 豪富는 그물을 명주실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0597)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弋獵 搪網. 수백 미터나 되는 대규모의 후릿그물이 있었던 것이다. 멸치는 이러한 대형 후릿그물을 사용하여 잡기도 하였으므로 다획성 대중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명태는 원래 주낚으로 잡았으나≪난호어목지≫에서 함경도의 명태는 12월부터 어망을 설치하여 잡기 시작한다고 한 것을0598)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海魚 明鮐魚. 보면 19세기에는 어망으로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걸그물이 명태의 주어구의 하나였던 것을 보면 위에서 말한 어망은 걸그물이었을 것이다. 명태가 대량으로 어획되었던 것을 보면 이 걸그물도 규모가 매우 큰 것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늦어도 18세기 후반부터는 화폐와 상품이 농촌사회 전반에 침투되어 교환 경제가 발달하였다. 균역청 해세가 화폐로 납부하는 金納制로 된 것도 이를 반영한다. 이에 따라 상품생산으로서의 어업이 크게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가족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영세 漁家 단위의 비자본제적 단순 상품 생산이었으나, 가족 노동의 범위를 넘어선 노동력이 필요한 대규모 어업에서는 그 경영형태가 상품화된 노동력에 의존하는 자본제적 어업 경영으로 발달하였다. 그런데 대규모 어업이라고 해서 모두 자본제적으로 경영된 것은 아니었다. 복수의 어가가 횡적으로 결합하여 공동 출자, 공동 노동, 공동 분배의 형태로 경영할 경우는 어업 경영규모가 크더라도 그것은 확대된 어가 경영에 불과하였다. 영조 7년(1731) 동부승지 李匡世의 계품에 의하면, 방렴 어업에 있어서 海夫輩가 힘을 합하여 돈이나 재물을 공동으로 모아 가을에 방렴을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는다고 하였는데,0599)≪備邊司謄錄≫190책, 영조 7년 8월 30일. 이는 공동 경영형태였을 것이다. 군영이나 관청에서 대규모 어업을 직영하는 경우도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여 어업을 경영하는 자본제적 경영은 아니었다.

 원근의 무뢰배가 모여 공채나 사채를 내어 방렴을 경영한 것과 같은 경우는 그 경영형태가 자본제적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어업 경영자는 평민 출신의 기업가였을 것이다.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은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발생한 무산노동자로서 경영자와 신분적 주종관계가 없는 자유 노동자였음에 틀림없다. 이 이외에 富民이나 豪富가 경영한 대규모 어업에서도 대부분 자본제적 경영을 하였을 것이다. 조업 인원이 20명 이상이나 필요하였던 중선망 어업 같은 것은 규모가 큰 자본제적 어업이었을 것이다. 旅閣이나 客主, 수산물 운반업자 등이 어업 유통부문에서 前期的 상업자본을 축적하여 이를 산업자본으로서 어업에 투하하여 자본제적 어업을 직영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사례가 드물었을지는 몰라도 영세한 어민이 자본을 축적하여 어업 경영규모를 확대하고 이를 자본제적으로 경영하는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600) 자본제적 어업 경영에 관해서는 朴九秉,≪韓國漁業史≫(正音社, 1975), 177∼184쪽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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