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7. 어·염업의 발달
  • 2) 염업
  • (3) 제염기술의 발전

(3) 제염기술의 발전

 조선 후기의 소금생산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염전식 煮鹽法이었다. 이 방법은 採鹹과정을 통하여 염분을 많이 함유한 鹹砂를 얻고, 이것을 다시 鹽井에서 바닷물로 용해시켜 농후한 짠물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이 제염법은 땔감이나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로 曬鹽法을 들 수 있으니, 이것은 바닷가 간석지에 구덩이를 파서 저수지 5개를 만든 뒤 이를 차례로 연결시킨 다음 그 바깥에 도랑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수가 밀려오는 것을 기다려 제1 저수지를 채운 후 5∼6일 동안 햇볕을 쬐여 제2 저수지로 옮긴다. 이렇게 번갈아 햇볕을 쬐면서 차례 차례로 제4 저수지에 이르면 그 바닷물은 매우 짜게 변한다. 이것을 다시 햇볕에 쬐여 제5 저수지로 옮겨서 다시 한번 더 햇볕에 쪼이면 서리와 눈처럼 희게 소금이 엉긴다.0622)≪硏經齋集≫外集 第六, 雜綴類 鹽.
이것은 18세기말의 실학자 成海應이 말한 것이다.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는 天日製鹽法에 유사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인 천일제염법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1908년 일본인 기사들인데0623) 朝鮮總督府,≪朝鮮專賣史≫3(1936), 297쪽. 위의 내용은 그것보다 적어도 100여 년 이상 앞서서 우리 나라 사람 스스로가 천일제염방식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로는 바닷가 간석지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대나무를 편 다음 쑥이나 띠로 덮은 뒤 다시 그 위에 모래로 덮는 형태이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조수가 밀려와 덮힌 모래와 부딪쳐 염분이 많은 물이 구덩이 안에 떨어지게 된다. 그 다음에 조수가 물러간 뒤 횃불을 만들어 쪼이면 아주 진한 소금물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달여서 소금을 만든다.0624) 徐有榘,≪林園經濟志≫味料之類 煮海鹽方. 이러한 방식은 제염과정에 필요한 노동력과 연료비를 한꺼번에 줄일 수 있는 진보된 방법으로 생각된다.

 세번째는 서해안에 위치한 瑞山과 泰安지방에서 17세기경에 부분적으로 시행되던 제염법으로, 다른 지방의 염전은 비가 오는 여름이나 추운 겨울 동안에는 제염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곳에서는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자염활동을 하고 있었다. 염전을 다룰 때도 소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0625)≪增補文獻備考≫권 158, 財用考 5, 魚鹽. 이 방법은 염업기술상의 한계를 부분적으로나마 극복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일련의 사실들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도 종전의 관습만을 답습하지 않고 제염기술의 발전에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이와 같이 부진하지만 제염상의 기술이 계속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배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산업이 발달하면서 바닷가에서는 염업이 하나의 독립된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0626) 禹禎圭,≪經濟野言≫漁稅革罷議. 더욱이 18·19세기에 와서는 농민층의 토지소유 상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 농촌사회의 분화가 촉진되면서 몰락한 농민층의 일부는, 그들의 생계를 염업에 의지하게 되었으므로 더욱 제염기술 향상에 노력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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