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8. 운수업의 발달
  • 1) 육상운송
  • (1) 조선 후기 역의 운영 실태

(1) 조선 후기 역의 운영 실태

 조선사회는 16세기 이후 兩亂을 거치면서 지배체제의 모순과 함께 격심한 사회변동으로 크게 변모해갔다. 즉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였으며,0655) 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農村經濟·社會變動-≫Ⅰ(一潮閣, 1970).
―――,≪朝鮮後期農業史硏究-農業變動·農學思潮-≫Ⅱ(一潮閣, 1971).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그로 인한 재화의 축적 현상과 유통은 삶의 양식을 변화시켰다.0656) 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한국근대사≫(창작과비평사, 1984).
특히 농업 및 수공업 등에서의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場市가 발달하였고, 전국적인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나아가 그것은 물자의 지역 간 이동을 촉진하는 운송체계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다.

 17세기 이후 大同法의 실시로 貢人이 대두하면서 貿納制에 의하여 공공물자의 조달이 이루어졌으며, 인구증가에 따라 도시가 성장하면서 상품경제가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도시에서는 亂廛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인층이 출현하였고 지방에서는 장시와 浦口 및 店幕 등을 중심으로 상품유통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물자유통도 활발하게 진전되었고, 그 결과 육상운송체계도 크게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취체제의 변동과 함께 노동력을 동원하는 徭役制도 크게 변화하였다. 이른바 雇立制의 실시0657) 姜萬吉,≪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한길사, 1984), 339∼401쪽.
尹用出,≪17·18세기 徭役制의 변동과 募立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가 그것이다. 고립제의 발달로 각종 토목공사는 물론, 여러 가지 물자의 운송에 있어서도 ‘給價雇立’에 의한 募軍의 고용으로 擔軍·負持軍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도성 안에서도 車夫·馬夫 등이 국가로부터 운반값을 지불받고 운송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또한 대동법의 실시로 공인이 대두하게 되자 운송업에 있어서도 다양한 貢契가 조직되었다.0658) 金東哲,≪18, 19세기 貢人연구≫(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3). 즉 전세·대동미의 하역과 운송을 맡은 宣惠廳募民契, 공공물자를 운송하는 貰馬契, 내수사의 郊草를 운반하는 運負契와 각종 공용물자를 운송하는 車契·馬契·金契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육상운송 활동에서는 종래의 驛을 이용한 驛路운송과 위에서 열거한 민간운송업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는 역로를 이용한 육상운송의 실태를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역은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공공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왕래에 따른 영접과 숙박제공 등을 담당하는 교통기관의 하나였다. 역은 통신기능, 숙박기능 그리고 운송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추적인 동맥의 구실을 다하였던 것이다.0659) 趙炳魯,≪朝鮮時代 驛制 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그러나 壬辰倭亂 이후 明나라의 擺撥制가 도입되면서 역제는 그 영향을 받아 그 기능상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 결과 변경의 군사정보 등 군사통신기능은 파발이 맡게 되고, 역은 주로 진상이나 공물 등 관수물자의 운송이나 사신접대에 따른 迎送과 卜物의 운송,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에 따른 여러 가지 雜物을 운송하게 되었다. 이로써 역은 통신기능보다는 교통운송상의 역할이 더 증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로를 이용한 육상운송은 주로 공공물자의 운송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세·대동미의 일부를 포함하여0660) 전세·대동미의 운송에 대해서는 崔完基,≪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一潮閣, 1989), 85∼95쪽 참조. 대부분의 진상이나 貢賦 등은 대개 역로를 이용한 역마에 의해 운송되었다. 역이 공공물자의 운송을 담당한 사실은 태종 4년(1404) “각 도의 驛吏는 토지를 지급받아 역마를 세우고 다른 요역이 없는 대신 官物을 운송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직무이다”0661)≪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2월 신사.라고 한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관물은 주로 進上이나 공부 등 국가재정과 공공물자를 말한다.

 특히 진상이나 공부는 대개의 경우 역로를 이용하여 운송하였다. 진상은 外官의 국왕에 대한 진헌의 하나로서 각 도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비롯한 지방관이 국왕에게 지방토산물을 奉上하는 것이다. 진상은 통상 物膳進上·方物進上·祭享進上·藥材進上 등으로 나누어, 왕실의 수요에 따라 감영·수영·병영 등에 분정되어 각 관의 책임 아래 官府에서 조달하거나 일반 민호에 부과되었다.0662) 金玉根,≪朝鮮王朝 財政史 硏究≫(一潮閣, 1984), 15∼21쪽 참조. 그러나 진상 역시 전세·공물과 같이 민호에게 전가됨으로써 그 課徵을 엄격히 규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민폐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진상·공부의 운송에 대해 일찍이 세조 3년(1457) 7월 경상도지역에서는 역마를 이용하여 忠州의 可興倉까지는 직접 납부하고 그 나머지 지역은 站船을 이용하여 京倉에 납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0663)≪世祖實錄≫권 8, 세조 3년 7월 무인. 安東이나 盈德의 진상 그리고 일본인들이 바치는 토산품은 丹陽의 長林驛을 거쳐 水山驛(淸風)→黃澗驛(청풍)→連原驛(충주)→可興驛(충주)→安平驛(驪州)→新津驛(여주)→楊花驛(여주)→阿川驛(利川)→吾川驛(이천)→慶安驛(廣州)→德豊驛(광주)→平丘驛(楊州)을 지나 서울로 운송하였다.0664)≪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0월 병오. 특히 생선과 같은 어물류는 썩지 않도록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역리들이 받는 고통은 상당히 컸다. 이에 충청도·경상도지방에서는 생선을 진상할 경우는 역로를 이용하여 운송하지만 건어물 등은 수로를 통하여 운송할 것을 제시하기도 하였다.0665)≪中宗實錄≫권 44, 중종 17년 5월 을해.

 이와 같이 역마를 이용한 진상물의 운송과 그에 따른 역리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였다. 이는 평안·함경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평안도지방에서는 각 站에서 해마다 진헌하는 물건과 조정 사신들이 가져가는 잡물은 단지 참로의 아전만으로는 쉽사리 운반하지 못하여 각 고을의 백성으로 하여금 운송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참로만 피해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 고을도 또한 곤핍하게 되어 그 폐단이 끝이 없으니 각 참에 수레와 소를 적당하게 둘 것을 요청하였다.0666)≪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0월 신유. 함경도에서도 당시 사헌부 장령 高荊山이 “高山驛의 폐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영을 咸興으로 하고, 安邊 등의 관아에서 진상하는 물품을 모두 함흥에 바쳐 서울로 이르게 하는데, 그 왕래에 모두 역마를 사용하여 실어 나르고 부족하면 혹 소바리로 실어 나르며 소가 부족할 때면 남녀가 이고 지고 실어 날라도 지탱하지 못하니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0667)≪燕山君日記≫권 36, 연산군 6년 정월 신사. 라고 실토하고 있는 데서 그 페단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진상·공부 등은 대체로 역마를 이용하여 운송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방법의 변화가 나타났으니 이른바「刷馬雇立制」의 실시였다. 쇄마고립은 진상물의 증가, 잦은 사신왕래에 따른 卜物의 증대, 신·구관 수령의 왕래와 그에 수반한 잡물의 운반과 더불어 역마의 부족사태에 따라 민간인 말을 사서 운송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7년(1731) 4월 영의정 洪致中이 다음과 같이 아뢴 데서 잘 알 수 있다.

高陽·坡州·長湍 3읍의 쇄마는 그 폐단이 지극하여 백성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개 진상이나 勅行時에 필요한 쇄마는 민간에서 責出합니다. 전에는 면포 1필 운반하는 값이 쌀 3斗였는데 그 후 차차 삭감하여 2두 또는 1두 5升이 되었고, 지금은 1두 2승입니다. 그런데 그 값이 적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어 나르지 않고 심지어는 말을 가진 자는 모두 말을 팔아버려 임시로 責立하는 바람에 멀리 있는 촌락까지 파급되어 경내가 소란스럽고, 그 폐단이 적지 않아 도처에서 호소하고 있는 지경입니다(≪備邊司謄錄≫89책, 영조 7년 4월 14일).

 이와 같이 진상 등의 공물을 운송하는 데 있어 쇄마를 사용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거의 전국에 걸쳐 상당히 보편화되고 있었다.0668)≪大典會通≫권 4, 兵典 迎送.

 한편 方物이나 歲幣의 운송도 초기에는 역로를 이용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쇄마에 의존하는 것이 상례였다. 우리 나라 사행이 중국에 연례적으로나 別使로 갈 때 연례방물이나 별사방물을 진배해야 했다. 이러한 방물은 각 시전이나 해당 관청에서 ‘造作進排’하거나 貿納하여 준비하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 이와 같이 마련한 방물은 作駄하여 운송하였는데≪萬機要覽≫에 의하면 서울에서 平山까지는 1·2所監考와 金契貢人이 운송을 담당하였고, 金川·평산에서 義州까지는 쇄마고립에 의해 차차 운송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진상·공물, 세폐·방물 외에 사신의 짐 등의 물자운송도 대부분 쇄마제도에 의해 실시되었고0669) 柳馨遠,≪磻溪隨錄≫권 22, 兵制後錄 郵驛. 신·구관 수령의 교체에 따른 여러 가지 잡물도 점차 쇄마고립에 의해 운송되었다. 쇄마고립제는 民結의 토지로부터 쇄마가를 징수하여 그 값으로 민간인 말을 사서 운송에 사용하는 방식이었다.0670)≪光海君日記≫권 7, 광해군 즉위년 8월 갑술. 특히 수령의 교체에 따른 왕래시의 각종 잡물과 迎送支待는 모두 대동미에서 쇄마가를 징수하여 三南지방과 海西·關東의 고을에는 20필, 군현 이하는 15필씩 말을 지급하고 영남 대읍의 上道는 3필, 中道는 4필, 下道는 6필을 더 주고 중읍은 4필, 소읍은 3필을 추가로 지급하였다. 그리고 호남의 상도는 3필, 중도는 5필, 하도는 7필을 더 주고, 경기는 州·府는 17필, 도호부·군·현은 13필로 정하였다.0671)≪續大典≫권 2, 戶典 外官供給.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신의 복물이나 진상의 운송 그리고 신·구관 수령의 교체에 따른 영송과 잡물운송도 대부분 쇄마법에 의해 실시하게 되었다.0672) 趙炳魯,<조선후기 交通發達에 관한 硏究-교통수단으로서의 驛馬確保를 중심으로->(≪國史館論叢≫57, 國史編纂委員會, 1994), 147∼152쪽 참조. 또 쇄마비용은 대개 大同法 실시 이전에는 민결에서 징수하였으나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쇄마가 명목으로 대동미에서 일괄 징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이후 쇄마가의 지나친 濫徵의 폐단으로 지역에 따라서 民庫0673) 金容燮,<조선후기의 民庫와 民庫田>(≪東方學志≫23·24, 延世大 國學硏究院, 1980).의 형태인 雇馬廳을 설치·운영하여 그 경비에 충당하기도 하였다.0674) 趙炳魯, 앞의 글, 152∼156쪽 참조. 고마청은 雇馬庫 또는 立馬廳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설치되었는데 민호의 잡역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정한 자금을 바탕으로 ‘給債殖利’하고 그 수입으로 각종 잡세를 납부하였다. 고마청은 군현과 마찬가지로 역에 설치되었으며, 주로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支供이나 수령교체시의 迎送刷馬價, 京司求請 등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운영되었다.

 경기도 果川驛의 경우 고마청을 설치·운영하였는데 과천은 삼남지방으로 나아가는 直路上의 頭站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公物을 운송하는 데 民戶의 우마를 동원하였으나 정조 때 園陵行幸 이후부터 民馬를 입역시키는 폐단을 염려하여 고마고를 창설하고 常賑租 1,500石을 획부하여 ‘存本取耗’케 함으로써 그 비용에 충당하였다.0675)≪備邊司謄錄≫246책, 철종 10년 12월 20일.

 이와 같이 쇄마가의 비용은 일반인의 토지인 민결에서 징수하거나 大同留置米, 그리고 고마청을 설치하여 운영함으로써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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