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8. 운수업의 발달
  • 3) 원과 주막

3) 원과 주막

 조선시대, 특히 15세기에는 교통·운수활동이 자연적이기보다는 정책적이었다.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됨에 따라서 통치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교통과 통신 그리고 운수조직이 정비되어 갔다. 새 왕조의 교통정책도 이같은 중앙집권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추진되었다. 숙박시설도 초기에는 그러한 방향에서 운영되었다. 예컨대 院이 그러한 시설이었다. 즉 원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주기 위하여 교통로의 요충지나 인가가 드문 깊은 산 속에 설치되었는데,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조선왕조는 국초에 숭유정책을 내세워 사찰을 정리함과 더불어 종래 사찰이 운영하던 원까지 모두 국유화하여 驛站制의 보조기관으로 삼고, 환속한 승려 또는 인근 주민 중에서 덕망있는 사람에게 그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미미하나마 소정의 院主田을 지급하여 원의 경비로 쓰게 하였다.≪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전국 원의 수효는 대략 1,300개소였다. 대체로 도로 연변에 설치된 원은 30리마다 하나씩이었으나, 지형조건에 따라서 평탄한 곳의 간격은 길었고, 험한 곳에서의 간격은 짧았다.0786) 崔永俊,≪嶺南大路≫(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267∼283쪽. 유명한 원으로는 서울 부근의 梨泰院·弘濟院·普濟院, 수안보, 동래의 溫井院, 경기도의 長湖院·退溪院·廣惠院, 충청도의 鳥致院·新禮院, 황해도의 沙里院, 평안도의 陽德院 등이 있었다. 지역별로는 경상도에 468개소, 전라도에 245개소, 충청도에 212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용자가 한정되어 있었고, 재정 기반이 취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집권체제가 해이해지면서 봉건정부의 경영 의지도 약화되어 16세기 중엽부터는 방치되는 원이 속출하였다.≪磻溪隨錄≫에 의하면, 17세기 당시 원은 주인이 없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거의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운영되는 곳도 관리자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땔나무와 음료수만 준비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0787) 柳馨遠,≪磻溪隨錄≫권 1, 田制 上 站店. 그리하여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후 고을 관아 부근에 있던 客館(客舍)이나 큰 역에 부속되어 있던 驛館을 주로 이용하였다. 일부 원이 존속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원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였고, 대부분 소멸되어 갔는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사사로이 설치된 酒幕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大東地志≫에 의하면 각 驛路 주변에 국가가 공무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하여 원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이 문을 닫고 店舍가 새로이 생겨났고 원 이름이 그대로 점 이름으로 된 곳이 많다고 하였다.0788) 金正浩,≪大東地志≫권 27, 程里考.

 주막은 길가에 위치하여 술과 밥을 팔고 또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하던 집으로, 炭幕·旅店·夜店·店幕 등으로도 불렸는데 흔히 주막집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된 종래의 자급자족적 경제질서가 무너지면서 사회가 분업화되고 이에 따라 생산력이 향상되고 그 잉여생산물이 유통되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눈에 띄게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도처에 장시가 생겨나고 장시를 오가는 상인들이 급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사회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각 지방에서 서울로 오가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들이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곳곳에 여행객을 위한 휴식시설·숙박시설이 생겨났다. 새로이 생겨난 주막집은 원과 달리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는데, 소정의 대금을 받고 잠자리는 물론 음식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으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특히 그 이름에서와 같이 술을 팔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촌락마다 주막이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여행에 불편이 없었다. 이들 주막은 특히 장시가 열리는 곳이나 교통의 요지에 있었다. 주막에서는 음식값 외에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아 ‘봉놋방’이라고 하는 온돌방에서 10여 명이 혼숙하게 되어 있었다.

 주막은 원과 달리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상업적 숙박업소였기 때문에 여행객의 수가 적을 경우에는 폐업이 불가피하였다. 따라서 여행자가 많은 곳에 주로 설치되었고, 그리하여 장시와 거의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시는 15세기말에 전라도에서 처음 발생하였는데, 16세기에 이미 삼남지방에 널리 보급되더니, 조선 후기에는 곳곳에 설치되었다. 19세기초에는 1,000여 개소의 장시가 5일마다 정기적으로 장을 열었다.0789) 金大吉,≪朝鮮後期 場市硏究≫(國學資料院, 1997), 143쪽. 이러한 장에서는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고, 물화의 거래도 활발하여 사람들은 자연히 주막으로 모여들어 서로 한담을 하거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화폐가 널리 보급되면서 여행자나 이용자들은 미곡이나 포목을 휴대할 필요없이 常平通寶와 같은 엽전으로 숙박비나 술값을 지불하였다.

 장시에 주막이 생겨난 경우와 달리 교통의 요지에 주막이 설치되고 그 이웃에 인가들이 늘어나 酒幕村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술막, 떡점거리, 무수막, 주막거리, 주막뜸, 말죽거리 등으로도 불린 주막촌은 사람들이 사사로이 주막을 개설하면서 형성되어 형태와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였다.

 일반적으로 전통사회에서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背山臨水’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주막촌은 도로변에 주로 위치하여 후일의 교통도시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주막촌은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 등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보다 큰 장시나 포구 등에는 客主와 旅閣이라는 고급 여관도 있었다. 주막이 대개 한두 개의 침실과 술청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이었던 반면에 객주와 여각은 여러 개의 침실과 대청·마굿간·창고 등이 있는 큰 집이었다. 이들 장소에서는 독방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개 돈많은 부호나 벼슬이 높은 고관들이 유숙하였다.0790) 崔永俊, 앞의 책, 290쪽. 객주와 여각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객주가 보다 일찍 생겨났는데,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객주도 번창하였다. 객주는 그 기능면에서 步行客主와 物商客主로 나뉘는데, 숙박업은 주로 보행객주가 행하였다. 물상객주도 풍부한 자본과 창고시설 등을 갖고 상품판매·위탁판매·창고업·운수업 등을 영위하였는데, 荷主의 편의를 위하여 숙박업도 겸하였다. 여각은 주로 연해안 포구에서 해산물과 농산물을 거간하고 위탁판매를 하면서 그 하주를 상대로 여관업도 하였다. 여각주인들은 때로 중앙의 권력자와 결탁하여 그 위세로 상선이 포구에 들어오면 거의 강제로 하주를 여각에서 묵게 하고 화물을 옮기지 못하게 해서 숙박료·화물보관료·화물중개료를 임의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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