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1) 관상도고의 활동
  • (2) 공인의 활동과 공인자본의 성격

가. 공인의 등장과 유형

 貢人은 大同法 실시 이후 등장한 특권상인이다. 이들은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수취체제의 시행에 따라 정부의 수용물품을 조달하던 공물청부업자였다. 물론 대동법 실시 이전에도 각 지방에서 관부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防納하던 상인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합법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특정 공물의 납부 의무를 진 지역의 공물대납권을 얻어 그 공물을 관부에 납부한 후 해당 지역민으로부터 과다한 대가를 징수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공인은 정부가 공물 대신 田結을 기준으로 징수한 米·布·錢을 지급받아 관부가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조달하는 공적으로 인정된 상인들이었다.

 貢物主人이라고도 불리우는 공인은 본래 일반 ‘坊民’ 중 지정토록 되어 있었다.0806)≪續大典≫권 2, 戶典 歲貢. 이들 방민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공인이 되었거나 공인의 기능을 행한 사람들 중에는 이전의 방납상인이었던 사람들과 시전상인의 일부, 匠人, 其人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원칙상 비합법적이었던 방납배들의 일부가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국가의 공인된 상인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시전상인의 일부가 공인과 마찬가지로 貢價를 지급받아 배당된 관부 수용물품을 조달하였다. 또한 사영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직접 물품을 제조하여 관에 납품하는 장인들이 공인의 기능을 행하기도 하였으며, 향리의 자제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기인들이 연료와 기타 관부 수요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한 아전이었던 京主人 역시 공납청부업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0807) 경주인을 공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金玉根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주인은 공인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으며, 경주인에게 지급하는 역가는 공인에게 지급하는 공가와 성질이 다르므로 공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金玉根,<貢人>,≪朝鮮後期經濟史硏究≫, 瑞文堂, 1977, 337∼338쪽). 이에 대해 德成外志子는 공인에는 공물뿐만 아니라 役務만을 제공하는 공인도 있으므로 경주인도 광의의 공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德成外志子,<朝鮮後期 貢物貿納制와 貢人役價-官府와의 關係를 통해 본 貢人의 性格->, 高麗大 碩士學位論文, 1983, 142∼143쪽). 이후 金東哲도 德成外志子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주인·영주인을 광의의 공인으로 보고 공인의 범주에 포함시켰다(金東哲,≪朝鮮後期 貢人硏究≫, 韓國硏究院, 1993, 15쪽). 여기에서는 후자의 견해를 좇아 경주인을 공인의 범주에 넣었다. 또한 각 읍의 아전 출신으로 감영에 파견된 營主人도 공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영주인역은 본래 부역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18세기 중엽 이후 영주인의 성격 변화와 役價·進上價의 증가 등으로 인해 영주인의 공인으로서의 기능이 강해지게 되었다. 공인의 기능은 이들 이외에 역관이 수행하는 예도 있었으며,0808) 숙종 20년(1694)에 창설된 弓角契는 水牛角무역을 독점하려는 동래상인과 倭學역관의 의도가 합치되어 성립된 것이었다(金東哲,<水牛角貿易과 弓角契貢人>, 위의 책). 貢契의 증가에 따라 양반관료·부민계층 등이 공계 창설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공인은 공물납부의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공가를 지급받아 공물을 사서 납부하는 상인적 공인과, 공물을 제조하여 납부하는 수공업자적 공인이 그것이다.0809) 宋贊植,<三南方物紙貢考-貢人과 生産者와의 關係를 중심으로-(上·下)>(≪震檀學報≫37·38, 1974). 전자에는 紙契공인·馬契공인·蔘契공인·면화계공인 등이 속하며 후자에는 금계공인·칠계공인·水鐵契공인·채색계공인 등이 속했는데, 후자의 공인들은 조선 전기 당주동 일대의 관영수공업장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주로 맡았다.0810) 崔完基, 앞의 책, 56쪽.

 또한 공인은 납품하는 물품의 종류와 납품하는 기관에 따라 그 종류가 매우 많았다. 元貢의 경우 선혜청과 6道의 지방청에 57공이 있었으며, 진휼청·상평청·균역청에 17공이 있었다. 하나의 관부에 납품하는 공물의 종류도 매우 많아서 자연히 공인도 납품 물품과 기관별로 대단히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공인은 공가를 기준으로 원공공인과 別貿공인으로 대별된다. 원공공인은 정기적인 공물상납을 맡았던 공인들이었으며, 별무공인은 원공만으로 부족한 경우나 貢案에 들어 있지 않은 새로운 물품의 조달이 필요할 때 공물을 납부하던 사람들이었다. 원공공인의 공가는 선혜청에서, 별무공인의 공가는 호조에서 지급되었다. 공가의 책정은 공가를 지급하는 관청의 재정 상태와 공물 구입과 관련된 상품경제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규정되었지만,0811) 金東哲, 앞의 책, 240쪽. 공가를 미리 지급받아 공물을 납부하던 원공공인이, 물품을 먼저 납부하고 후에 공가를 지급받는 별무공인보다는 영업 여건상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0812) 하지만 원공공인이라 하여도 정부의 재정 상태의 변화 등에 따라 ‘先進排 後受價’의 공가지급제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關東蔘契貢人이 좋은 예이다(吳星,<人蔘商人과 禁蔘政策>,≪朝鮮後期 商人硏究≫, 一潮閣, 1989, 16∼17쪽).

 공인들은 납품하는 물건이 많은 경우 같은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들끼리 공동으로 출자하여 조합과 같은 계, 즉 貢契를 조직하였다. 또한 조달해야 하는 물품이 다양한 관청의 경우에는 물품마다 따로 공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공계의 종류도 납부 물종이 많아지면서 다양해져 갔다. 호조의 경우 모두 39종의 공계 조직이 있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