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2) 사상도고의 활동
  • 나. 서울 주변지역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나. 서울 주변지역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

 사상도고가 활동하고 있던 또 다른 주요 거점은 경강변을 비롯하여, 松坡·누원점·松隅店 등 서울 외곽지대에 발달한 상업중심지였다. 이 지역들은 지방의 생산품이나 물자가 서울로 반입되는 길목이었고, 시전의 금난전권 밖에 있으면서도 서울과 비교적 가까워서 도성 내의 사상도고와의 연결이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사상도고가 직접 상품을 매점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0881) 姜萬吉, 앞의 책, 179∼180쪽.

 이들 서울 주변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도고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한강 연변에 기지를 갖고 있던 京江商人을 꼽을 수가 있다.0882) 경강상인의 도고상업에 대해서는 姜萬吉, 위의 책, 59∼83쪽 참조. 이들 가운데에는 조선 초기부터 세곡운송에 종사하면서 치부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0883) 姜萬吉, 위의 책, 59∼69쪽. 처음에는 楊花津·西江·麻浦·銅雀津 등 한강변의 나루터에서 渡江業에 종사하거나 소상인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자본을 모아 커다란 선박을 여러 척 소유할 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다.0884) 劉元東,<近世 漢江邊 新興商人의 發達>(≪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602쪽. 이들이 취급하던 물자는 주로 미곡을 비롯한 곡물과 船材 등이었다. 경강상인들의 매점활동은 18세기 전반에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를 만큼 커져 있었고, 특히 백성들의 주곡이었던 미곡분야에서의 이들의 상업적 비중은 도성민의 생계 유지가 이들의 손에 달려 있을 정도라는 말이 나올 만큼 컸다. 더욱이 서울지역이 대규모의 소비도시로 변모한 데 따른 인구의 집중과 곡물소비량의 증가 현상은0885) 李佑成,<18세기 서울의 都市的 樣相>(≪鄕土서울≫17, 1963).
李世永,<18, 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韓國史論≫9, 서울大, 1983).
미곡시장에서의 이들의 활동기회와 영역을 더욱 넓혀주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정조 9년(1785)의 경우 서울의 미곡소비량은 대략 100만 석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公家所出量 20여만 석, 사대부의 私穀 20여만 석을 제외한 60여만 석이 미곡상인에 의하여 공급되고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서울지역에서의 미곡공급은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0886)≪承政院日記≫1540책, 정조 9년 9월 9일.
≪備邊司謄錄≫131책, 영조 32년 10월 22일.
姜萬吉, 앞의 책, 80∼81쪽.
李世永, 위의 글, 230쪽.
이는 곧 경강상인을 비롯한 미곡사상들이 광범하고도 풍부한 미곡시장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미곡분야에서의 사상도고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0887) 姜萬吉, 위의 책, 75∼80쪽.
吳 星, 앞의 책, 117∼124쪽 참조.

 경강상인들이 벌인 미곡매점상업의 일반적인 양상은 船商을 통해 각 지방에서 올라온 미곡을 경강에서 매점함으로써 서울의 米價를 조종하는 것이었다.0888) 姜萬吉, 위의 책, 76쪽. 京中富民과 五江富商輩가 미곡을 쌓아 놓고 10배의 이익을 기다려 내지 않는 까닭에 미가가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라든가,0889)≪備邊司謄錄≫160책, 정조 3년 정월 10일. 江上富民輩가 미곡을 매입한 다음 미가 앙등을 기다려 출매하지 않고 있어 서울의 미가가 그들의 손에 좌우되고 있다는 말들은0890)≪備邊司謄錄≫182책, 정조 18년 10월 6일. 모두 경강상인의 미곡매점 양상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경강상인들은 공인에게 지급되던 貢米0891) 공인이 선혜청에서 지급받던 공미는 약 30만 석 규모로 이 가운데 15만 석은 錢·木으로, 나머지 15만 석은 미곡으로 지급되고 있었다(≪備邊司謄錄≫120책, 영조 25년 9월 20일). 조선 중기의 현상이기는 하지만, 지주의 소작료, 농민의 식량곡, 정부의 방출곡 등이 貿穀船商에 의해 매집되고 있었는데(崔完基,<朝鮮中期의 貿穀船商-穀物의 買集活動을 중심으로->,≪韓國學報≫30, 1983),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에 와서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를 도매함으로써 미가를 조종하여 이윤을 취하기도 하였고,0892)≪備邊司謄錄≫157책, 영조 51년 8월 1일. 鑄錢이 시행될 것을 사전에 알아내어0893) 주전이 시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상들이 미리 알아냈다는 것은 이들이 궁궐 혹은 양반관료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일게 한다. 이 무렵 양반관료 중에는 미곡유통에 깊이 개입되어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備邊司謄錄≫160책, 정조 3년 정월 10일), 따라서 경강상인과 같은 미곡도고상들이 이들과 상업적으로 밀착 내지 결탁되어 있지는 않았나 짐작된다. ‘錢賤米貴’에 의한 미가 앙등을 기다려 미곡을 대량으로 매집, 미가 등귀에 의한 이익을 누리기도 하였다.0894)≪備邊司謄錄≫90책, 영조 7년 10월 8·17일.

 경강상인들의 미곡매점을 통한 이윤 취득의 양상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이들은 서울지역만을 대상으로 미곡 취리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즉 풍흉에 따라 형성되던 지역 간의 미가 차이를 이용하여 서울에 매집해 놓은 미곡을 미가가 비싼 지역으로 이송·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 강상모리배가 지방의 미가가 상승하는 것을 이용하여 남도지방에 강상미를 내려 보내 판매하고 있다는 말이라든가,0895)≪備邊司謄錄≫141책, 영조 38년 6월 21일. 강상의 米商輩가 남쪽에서 올라온 미곡을 거꾸로 외읍에 買送한 것이 강상미의 1/3에 달하고 있어 백성들의 양식이 염려스럽다는 이야기들은0896)≪備邊司謄錄≫141책, 영조 38년 6월 27일. 모두 그같은 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일 것이다. 부상이 집적해 놓은 미곡이 미가가 비싼 兩湖지방으로 보내어져 매각되고 있는데, 수삼일 동안 빠져 나간 미곡이 幾千包에 달하고 있다는 지적도0897)≪備邊司謄錄≫199책, 순조 9년 6월 12일. 동일한 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경강상인의 미곡도고활동은 곧 그들의 미곡매매활동이 다량의 미곡을 장기간 매점해 둘 수 있을 만큼 자본의 규모가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미가의 차이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광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이제 미곡을 매개로 한 사상도고의 경제적 성장은 시전상인의 상권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고, 미곡도고상으로서의 위치도 확고하게 되었다.

 더욱이 미곡을 취급하던 시전들은 서로 간의 지리한 상사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경강상인의 경제적 진출을 제어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0898) 吳 星, 앞의 책, 110∼116쪽. 물론 上米廛·下米廛·雜穀廛·南門米契 등의 시전상인들이 처음부터 미곡도고상에게 상권을 제압당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인구의 증가와 상품유통이 확대되면서 기왕의 시전 조직으로서는 그같은 유통경제의 발달에 적절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시전상인들은 旅客主人과 中都兒라는 중개역을 두어 시전이 수행해야 할 매집과 판매 기능의 일부를 맡기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선상·鄕商→여객주인→시전→중도아→소비자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던 서울에서의 물자유통구조0899) 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곡시전은 이들로부터 일정액의 수세를 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난전권보다 훨씬 위축된 형태의 권리였으며, 그 액수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곡전인들은 자신들의 기지 내에서의 수세권이 여타 미곡전에게 침탈당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시전상인들의 상세가 위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사상도고의 상업적 위치를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이 나오게 된 데에는 미곡전인과 일정한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독자성을 띠고 있던 여객주인의 역할에 기인하는 바도 컸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미곡을 취급하던 사상도고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성장과 능력을 바탕으로 여객주인을 그들의 상업적 활동권 내에 끌어들여 이들과 깊이 결탁함으로써 미곡시장에서의 시전상인의 상권을 위축·배제시켜 나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경강상인이 벌이고 있던 도고상업의 주요 물품은 미곡 이외에 鹽類·목재·柴木 등이었다. 서울에서 소비되는 시목과 건축용 목재는 대부분 목재상들의 활동에 따라 강원도에서 벌채되어 뚝섬을 비롯한 경강변에 집하되고 있었는데,0900) 姜萬吉, 앞의 책, 81쪽.
吳 星, 앞의 책, 75∼90쪽 참조.
경강상인들은 이 목재들을 매점·취리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압박·침해하였다. 목재를 취급하던 內長木廛·門外長木廛 등 시전상인들이 목재가 流下되는 뚝섬에 ‘有錢輩’가 목재를 쌓아 놓고 가격을 조종하여 전인에게 발매하니, 국역을 봉행하는 전인들은 앉아서 市利를 잃게 되어 어찌 보존할 수 있겠느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은0901)≪市弊≫2, 內長木廛·門外長木廛. 경강상인들의 목재도고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예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목재사상과 경강상인이 상업적으로 깊이 연결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전인이 제시하는 목재가격보다 고가에 매입할 수 있을 정도의 경강상인의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목재시전의 상세 위축과 경제적 쇠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통공 이후에는 이와 같은 양상이 더욱 심화되어 갔으니, 長木廛人이 난전의 활동으로 인하여 모두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하면서 난전을 금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데에서도0902)≪備邊司謄錄≫199책, 순조 9년 3월 14일.
장목전인의 금난전권 부활에 대한 호소는 통공해제에 따른 이윤 독점의 폐단과, 도고는 공공의 利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잘 나타나고 있다.

 위와 같은 유통과정의 장악을 통하여 집적된 경강상인들의 자본은 단순한 매점활동이나 상품 독점에만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완도·변산·안면도·장산곶 등 서해안가에서 올라오는 船材를 도고하고 있던 경강상인들은 그들의 발달된 造船術을 활용하여 조선업에 나서면서 조선도고로서의 위치도 확보해 나갔다.0903) 姜萬吉, 앞의 책, 94∼95쪽.
吳 星, 앞의 책, 79·87∼88쪽 참조.
미곡도고를 벌이고 있던 경강상인의 활동 역시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으며,0904) 韓㳓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一潮閣, 1970), 262∼263쪽. 개항 이후에 가서는 일본상인에 의해 시장의 일부를 잠식당하였지만, 그러면서도 조선인 시장의 주요 부분의 상권을 여전히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근대적인 정미공업을 발전시킨 것도 그들이었다.0905) 安秉直,<三·一運動 이전의 勞動運動>(≪雲嚴李相球博士華甲記念論文集≫, 1979), 329∼332쪽.
李炳天,≪開港期 外國商人의 侵入과 韓國商人의 對應≫(서울大 經濟學科 博士學位論文), 220∼221쪽 참조.
이처럼 경강상인들이 상인자본에서 상업자본으로, 이를 다시 산업자본으로 전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은 다름아닌 이 시기 경강상인들의 도고활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 주변지역에서의 사상도고의 활동은 앞서의 경강변 이외에도 누원과 송파 등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먼저 누원에서의 사상의 상업활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누원은 조선 후기의 상업중심지가 그러하듯 장시를 토대로 번성하였다. 18세기 후반 누원장은 상설시장화되고 있었으며, 주변의 마석우장·동두천장·송우장·신천장 등의 장시와 연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송파·뚝섬·용산, 멀리는 鐵原·원산 등지와도 상업적 연결을 맺고 있었다. 주변 장시로부터 미곡·약재·건과·면포 등이, 멀리 원산으로부터는 삼베와 북어 등 건어물류가 집하되고 있었다.0906) 崔完基, 앞의 책, 237쪽.

 그렇지만 누원에 본래부터 장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전을 중심으로 특권적 경제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조선정부는 시전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또한 보호하기 위해서 서울 근처에 장시가 설립되는 것을 규제하였다.0907) 崔完基, 위의 책, 239쪽. 그런데 누원은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인 도봉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함경도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목과 어물의 주요 집하처였으므로, 상인들은 이곳에 장시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누원상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시전상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처음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0908) 姜萬吉, 앞의 책, 180∼181쪽.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누원은 한강변·송파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상업중심지로서 성장하였다.

 누원상인의 상업적 성장에서 간과되어서는 안될 점은 시전상인에 물건을 중개해주고 있던 中都兒의 존재이다. 서울의 물품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상품의 매집과 분산의 기능을 시전인들이 모두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시전인들은 그들이 지정한 중도아로 하여금 그 기능의 일부를 담당케 하였다. 특히 어물류와 같이 부패성이 높아 단기간 내에 판매해야 하는 물종의 경우에는 시전인 이외의 상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중도아는 본래 시전에 예속된 하청업자와 같은 존재였다.0909) 崔完基, 앞의 책, 240쪽.

 그러나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난전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은 난전과 결탁, 난전이 매집한 물건을 시전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난전의 활동을 제어하기 위해 두었던 중도아의 존재가 시전의 상권 장악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난전활동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중도아가 본격적으로 난전활동에 나설 정도였다.0910) 崔完基, 위의 책, 240쪽.

 난전에 대한 정부와 시전의 규제가 강화되자 중도아의 일부는 금난전권이 적용되지 않는 서울 외곽지역, 바로 누원·송파 등지로 자리를 옮겨 서울에 반입되는 상품의 매집활동을 벌였다. 중도아 출신의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누원상고들은 칠패·이현의 도고와 연결하여 동북지방에서 들어오는 각종 어물을 매집, 도고활동을 벌였으며, 서울에 남아 있는 중도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물품을 서울의 시장에 유통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서울 도성안의 사상도고뿐만 아니라 인근의 송우점상인이라든가 송파상인 등과 자금합자 및 정보교환을 통한 상업적 연계망을 형성하면서 대규모로 매점활동을 펴나갔다. 이들의 상권은 이미 시전상인의 그것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고, 통공 이후에는 그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송파사상의 도고활동은 송파장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송파장은 安城 邑內場, 恩津 江景場, 德源 元山場 등과 함께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적인 장시로서 삼남지방의 물화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본래 5일장이었던 송파장은 18세기 중엽 이후 장시 내부의 질적 변화의 추세에 따라0911) 金大吉,≪朝鮮後期 場市에 대한 硏究≫(中央大 博士學位論文, 1993), 112쪽. 인근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욱이 18세기 이후 해안가나 강변에 포구가 개설되면서 선박을 이용한 상품운송이 활성화되어 가자,0912) 高東煥,<18, 19세기 外方浦口의 商品流通發達>(≪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한강 연안의 송파·마포 등지는 시장권의 중심지로 더욱 뚜렷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송파의 상인들은 상품유통경제의 발달과 확대를 배경으로 송파장을 전국적 장시로 발전시켜 나가는 동시에 지역 간의 상품가격의 차이를 이용한 매점매석 행위를 통하여 이윤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먼저 삼남지방과 동북지방으로부터 육로·수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을 매집하였다. 이들은 어물뿐만 아니라 담배·곡물·채소류·목면 등 각종의 물품을 매점해 두었다가 가격 상승을 기다려 판매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취하였다. 송파의 사상도고들은 중간 매집형태 이외에 직접 지방의 생산지나 장시에 나아가 물품을 다량으로 구입하여 송파장에 처분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간매점행위보다도 한걸음 더 나아간 적극적인 도고행위로서, 그들은 抱川 등지에서 어물을 도집한다든가,0913)≪各廛記事≫人卷, 乾隆 47년(정조 6, 1782), 11월 일. 廣州·利川·驪州·龍仁 등 미곡산지에 내려가 현지의 곡물을 매집·판매하였다.

 이들은 또한 칠패상인과 같은 서울 성내의 사상도고와 누원상인, 포천의 송우점상인 등과 연계하여 상업적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특히 칠패의 상인들과는 대단히 돈독한 연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송파상인들 중 일부가 칠패 출신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0914) 이 점에서는 누원상인도 예외가 아니다. 송파상인과 누원상인들의 상당수가 서울의 칠패상인과 그 상업적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송파시장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을 서울의 사상도고였던 것으로 짐작하는 견해는(姜萬吉, 앞의 책, 183쪽) 큰 무리가 없지 않나 싶다. 이들은 그와 같은 연계망을 바탕으로 시전상인의 상권을 압박하면서 상품유통과정에서의 시전상인의 존재를 배제시키려 하였고,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순조 4년(1804) 송파의 三田渡에 살고 있던 ‘要路亂廛窩主’ 孫道康이 양주·광주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수만 냥의 자금을 조성, 직접 원산에 가서 어물을 매점하여 중도아들에게 전매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싣고 오던 어물 30여 바리를 시전상인이 취체하려다가 도리어 손도강 일행에게 구타당한 것을 보면,0915)≪各廛記事≫地卷, 嘉慶 9년(순조 4, 1804) 2월 일. 이 무렵의 시전상인과 사상도고 간의 상업적 관계와 위치에 대해 짐작이 간다. 다음해인 순조 5년에도 退溪院에서 송파의 삼전도민 20여 명이 북어·대구 등 어물 50여 바리를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시전인들이 전매할 것을 요구하였다가 오히려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0916)≪各廛記事≫人卷, 嘉慶 10년(순조 5, 1805) 8월 일.

 송파의 도고상업이 성행하고 그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이윤이 생겨나자 새로운 계층이 상업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곧 양반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자신의 노복을 내세워 송파장에 旅客을 차려놓고 主人權을 행사하면서 상거래의 중개권을 독점하여 갔다. 여객주인들은 단순한 상품의 중개에서 나아가 직접 자본을 투입하여 상품을 매점하는 도고활동을 펼쳤으며, 따라서 여객주인권은 상당한 자본력을 지닌 사람들만이 취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여객주인권이 자본의 동원이 가능하면서도 권력과 결탁할 수 있었던 소수인에게 집중되면서 주인권의 독점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순조 29년 이후 거의 전시기에 걸쳐 양반계층들이 주인권을 쥐고 상품의 거래를 독점하고 있던 것도0917) 李炳天,<朝鮮後期 商品流通과 旅客主人>(≪經濟史學≫6, 1983), 132쪽.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서울 주변에서 사상도고가 활동을 벌이고 있던 주요 근거지의 하나는 포천의 송우점이었다. 여기에는 원산에 사는 상인들과 송우점에 거처하는 상인의 두 계통이 존재해 있으면서, 동북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물품을 매집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通川 등 수산물 생산지의 상인들과도 관계를 맺고 매일 60∼70바리에 달하는 다량의 어물을 거래하고 있었다.0918)≪各廛記事≫天卷, 乾隆 53년(정조 12, 1788) 4월 일 무신. 결국 송우점상인들은 원산지역의 사상이라든가 생산지 상인들에 의해 수집된 동북·관동지방의 어물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이를 누원점의 사상도고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