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1.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
  • 3) 반도고활동의 전개와 상업계의 동향
  • 가. 관상도고에 대한 반도고운동

가. 관상도고에 대한 반도고운동

 조선 후기의 상업계가 띠고 있던 가장 큰 형태상의 특징과 성격은 도고상인에 의한 도고상업의 전개일 것이다. 관상이든 사상이든 이들이 추구한 상업형태는 상업적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독점적 도고상업이었다. 즉 상품유통과정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자본을 축적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상인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상품경제의 발전을 자극·촉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상인 가운데 일부는 대자본을 형성한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대규모 자본이 투하되어야만 가능한 상업활동이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기반을 둔 관상의 도고상업은 기본적으로 자유상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고, 생산부문에 투입된 도고자본이라 하더라도 산업자본으로 전환·정착되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권성과 독점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었다.0944) 姜萬吉, 앞의 책, 189쪽. 특히 금난전권을 가지는 시전의 증가는 동종 시전간의 소모적 경쟁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매 물종의 급증으로 인한 물가앙등과 유통질서의 문란이라는 부작용만 야기시켰을 뿐이었다.

 관상도고의 반도고세력은 난전으로 불려지던 사상층이었다. 이들은 시전상인으로 대표되는 관상도고와 맞서 치열한 상권 경쟁을 벌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상품의 유통량이 급증하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지역의 상권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들의 활동 기반도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장시가 발달되어 상설시장화된 장시가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으며, 선박운송에 의한 물자유통의 범위도 확대되어 상품의 시장권과 유통권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상업계의 변화는 사상들로 하여금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에 강력히 도전할 수 있는 경제적 배경을 만들어 주었고, 사상들은 이를 토대로 시전도고의 상권을 끊임없이 침해하면서 자신들의 상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시전상인에 대한 사상의 상권 도전은 시전도고로 하여금 기왕의 특권체제를 강화시켜 무분별한 금난전권의 행사와 그에 따른 여러 경제적 혼란과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전도고체제의 해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辛亥通共」을 이끌어 내게 하였다.

 한편 시전체제의 해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로 도시수공업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특히 스스로 상품을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던 민간수공업자들은 상업자본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전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도고상업체제에 편승하여 스스로 판매장, 즉 시전을 개설함으로써 도고체제의 해체에 일익을 담당함과 동시에, 또 다른 특권도고상업을 만드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의 신전 창설은 折草廛의 예에서와 같이 동일한 물종에 대한 전매권의 분산을 통하여 특권상업체제를 와해시키는 데 자극제가 되었다는 면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0945) 姜萬吉, 위의 책, 190∼191쪽 참조.

 통공 이후 시전도고들은 잃어버린 그들의 특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경주하였지만, 별반 효과가 없었다. 물론 19세기초 일부의 시전이 도고권을 부활시키기도 하였고,0946)≪備邊司謄錄≫198책, 순조 7년 7월 29일. 19세기 중엽에는 사소한 잡전들까지도 금난전권을 가지지 않는 시전이 없고 도고되지 않는 상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시전의 금난전권이 부활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지만,0947)≪備邊司謄錄≫233책, 헌종 12년 정월 25일.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부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통공 정신의 유지가 대세였다고 보여진다.0948) 한편 영조 11년(1735)에 호위군관을 비롯, 연강 방민에 의해 일어난 馬契 습격사건을 역의 유무에 관계없이 家座에 따라 동전을 징수하는 동전징수 강화에 대한 반발이라는 항세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마계가 運負契와 통합하고 또한 마계 내에 말단 종실·서리·경각사 이서배가 가담하여 모리행위를 하면서 도고화해가는 추세에 대한 반발인 반도고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마계의 도고활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18세기 전반 경강변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층민의 대표적인 저항운동의 하나라는 것이다(金東哲, 앞의 책, 128∼149쪽). 이에 대해 高東煥은 용산운부도고에 대한 반도고운동이 전개된 것은 1780년대에 나타나므로 이 사건은 운부역에 대한 독점권을 둘러싼 대립이라기보다는 증세에 반대한 비특권적 경강상업세력의 반대투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高東煥, 앞의 책).
18세기 전반과 18세기말이라는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반도고운동의 전개라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깊은 검토가 요망된다. 이외에 상인이나 수공업자의 동업조합, 군대·종교집단·貰馬契·運石契 등 특정한 이익 또는 목적을 추구하는 이익집단 조직 등, 여러 형태의 조직이 사회운동의 발생과 운동에 하층민을 동원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해왔다고 하여 세마계·운석계가 하층민 저항운동의 동원 조직으로 작용했음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조성윤,<‘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연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1982, 99쪽).
아울러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세마운부계의 용산운부도고가 정조 15년(1791) 신해통공 이후에도 봉건관료나 권력기관과 결탁하여 도고활동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金東哲, 위의 책, 161쪽). 앞으로 통공 이후의 계인들의 활동과 그 성격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