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1) 농촌장시의 발달
  • (1) 상업적 농업과 농촌수공업의 발달

(1) 상업적 농업과 농촌수공업의 발달

 조선사회는 17세기 이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사회적 분업의 진전으로 점차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시인구의 증가는 농산물의 수요를 증대시켜 상업적 농업이 진전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 상업적 농업의 전개 양상은 매우 다양하였다. 우선 상업적 농업의 가장 낮은 형태는 곡물생산이나 목화재배업과 같이 생산물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자가소비에 충당하고 나머지 부분을 상품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이 시기 가장 전형적인 상업적 농업의 형태는 인삼재배업이나 도시주변의 채소재배 등과 같이 전적으로 시장판매를 목표로 하여 재배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하되 농산물을 그대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 또는 전부를 가공해서 파는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적 소상품생산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도 있었다.0952) 전석담·허종호·홍희유,≪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0;이성과 현실, 1989), 34∼39쪽.

 상업적 농업은 대체로 도시주변과 교통이 편리한 지역 그리고 특정한 작물의 재배에 적합한 자연적 조건을 갖춘 지역들에서 먼저 일어났다.0953) 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農業變動·農學思潮-≫(Ⅱ)(一潮閣, 1971).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상업도시로 급속하게 전환되었던 서울 근교에서 상업적 농업은 두드러지게 성장하였다. 왕십리에서는 무우, 살곶이다리에서는 순무, 석교에서는 가지·오이·수박 등이 재배되었으며, 연희궁에서는 고추·부추 등이, 청파에서는 미나리, 이태원에서는 토란이 재배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왕십리나 청파의 미나리가 가장 유명하였다. 이와 같은 도시근교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도 상당하였다.0954) 高東煥,<朝鮮後期 서울의 商業都市로의 成長>(≪東洋都市史속의 서울≫, 서울市政開發硏究院, 1994).

 도시근교에서는 채소나 과일작물의 재배가 성행한 반면, 농촌지역에서는 특정 농산물을 전업적으로 생산하는 상업적 농업지대가 형성되어 갔다. 李重煥은≪擇里志≫에서 전국적으로 이름난 농작물 생산지로서, 鎭安의 煙草, 全州의 생강, 林川·韓山의 모시, 安東·禮安의 龍鬚田 등이 부자들에 의하여 이익독점의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그 밖에 특정 작물의 재배지로서 서울·開城·水原 등 대도시 부근의 채소, 康津의 고구마, 개성·江界의 인삼, 경상·전라도지방과 公州·黃澗·懷德·黃州 등지의 면화 등을 이름난 것으로 꼽고 있다.0955) 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

 한편 17세기 이래 농촌에서 생산된 다양한 물품들이 상품화되었는데, 그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미곡이었다. 이는 비농업인구의 증가와 도시발달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각 지역의 미곡이 특정 이름이 붙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전주·金堤·萬頃의 完米, 황해도 연백평야의 메쌀, 鳳山의 長腰米, 驪州·利川지역의 細稻 등이 대표적인 미곡이었다. 미곡 외에 공예작물인 경우도 자연지리적 및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일정한 생산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지역은 뽕밭을 경영하는 견직 원료생산이 발전하였고, 충청도와 전라도 일부지역은 상품생산을 위한 모시밭경영이, 함경도와 강원도에는 삼밭경영이 확대되었다.0956) 홍희유,≪조선상업사≫(고대, 중세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192∼202쪽.

 농촌지역에서의 수공업도 부업적이고 자급적인 형태에서 발전하여 전업화, 상품생산화되었다. 이는 농업생산에서의 전업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모시는 충청도 한산·임천·舒川·洪州, 명주는 평안도의 安州·价川·成川, 삼베는 함경도 吉州·明川·安邊, 왕골돗자리는 경상도의 안동, 면포는 경상도·전라도 일대, 담배는 평안도의 성천·三登·陽德, 전라도의 전주·진안 등이 유명하였다.0957) 李永鶴,≪韓國 近代煙草業에 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89).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재배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홍삼으로 가공하여 淸國에 수출도 하였다.0958) 吳 星,<조선후기 蔘商에 대한 고찰-私商의 擡頭와 관련하여->(≪韓國學報≫17, 一志社, 1979). 이른바 특산지라는 명칭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18세기 이후에 진전된 사회적 분업의 결과인 것이다. 예컨대 면화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대량 재배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면직업이 발달하였으며, 뽕나무를 전업적으로 재배하였던 평안도·황해도지역에는 성천·영변을 중심으로 하는 견직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충청도·전라도 일부지역에서 재배된 모시는 임천·한산지역에서 전업적으로 직조하여 상품화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18·19세기 공예작물재배와 직조업은 상호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달하였고, 그 결과 공예작물에서의 상품생산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관영수공업체제가 붕괴되고 민영화되면서 민간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민간수공업자들은 뛰어난 기술을 배경으로 도시민의 수요에 맞춰 상품을 생산, 공급하여 생산자와 상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鍮器·漆器·磁器와 같은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지역적으로 특화되어, 이 시기에는 鍮器店·철기점·자기점과 같은 수공업촌락이 발달하였다. 이 중에서도 일찍 발달한 경기도 安城과 평안도 定州의 유기산업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0959) 김광진·정영술·손전후,≪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3;열사람, 1988).

 이와 같은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발전은 곧 상품유통시장의 확대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즉 각 지방의 장시나 포구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이 성장하였던 것이다. 18·19세기 삼남지역의 장시가 다른 지역에 비해 숫적으로 월등하게 나타나는 것도 결국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지역의 상품생산이 훨씬 발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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