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3) 상업도시의 형성
  • (3) 지방 상업도시의 출현

(3) 지방 상업도시의 출현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상업도시가 성장하였다. 지방에서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곳은 대체로 서울의 배후도시로서 성장한 개성과 수원, 서울의 공간확대에 따라 상품유통거점으로 변화된 송파장과 누원점, 평양·대구·전주 등 각 도 감영소재지로서 전통적 행정중심지, 대포구로서 전국적 시장권의 중요거점이었던 덕원 원산포, 창원 마산포, 은진 강경포, 또한≪만기요람≫에 15대 장시로 기록된 대장시들, 그리고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와 의주 등지였다.

 개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유통경로의 중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경강상인이 船運을 통한 상품유통을 장악하였다면, 육로를 통한 상품유통은 개성상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성상인들은 전국의 주요지역에 지점형태의 松房을 설치하고, 상품의 원료 생산지에 差人을 파견하여 생산과정을 독점하는 등 전국을 무대로 상업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동래와 의주를 연결하는 국제무역에도 참여하고 있었다.0997) 개성상인의 자본축적과 상업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成長-京市廛, 松商 등의 都賈商業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6, 1968).
姜萬吉,<開城商人硏究-朝鮮後期 商業資本의 成長->(≪韓國史硏究≫8, 1972).
吳 星,<朝鮮後期 蔘商에 대한 考察>(≪韓國學報≫17, 1979).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개성상인들은 막대한 상업이윤을 축적하였다. 개성에는 상업 외에도 유기수공업, 草笠제조공업, 인삼의 상업적 재배와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상업거래의 편의를 위한 신용행표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으며, 四介文書라는 독특한 簿記와 差人·書士·首使喚·使喚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상업사용인의 체계도 갖추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상업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개성에는 19세기말까지 4개의 큰 시전과 16개의 중소 시전이 존재하였다.

 한편 정조대에 계획도시로 건설된 수원도 18세기말 이후 상업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0998) 崔弘奎,<朝鮮後期 華城築造와 鄕村社會의 諸樣相-正祖代의 水原地方문제와 『觀水漫錄』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계획 당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수원의 상공업 발전문제였다.0999)≪正祖實錄≫권 29, 정조 14년 2월 임술. 이에 따라 서울의 富豪家나 안성의 紙匠에게 금융지원을 하여 水原 이주를 종용하기도 했으며, 富實한 물주를 모집하여 이들에게 모자와 인삼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1000)≪正祖實錄≫권 46, 정조 21년 2월 계사 華城富戶帽蔘節目. 특히 정조연간 노량진과 수원 사이에 新作路가 개설됨으로써 수원의 상업도시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수원의 상업도시로서의 성장은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지인 서울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서울의 공간확대와 상업번성에 따라 서울 외곽의 송파·누원 등지가 상업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특히 한성부 경계 밖에 위치한 이 두 지역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들의 유통거점이 되었던 지역이었다

 송파는 18세기 이래 전국적 유통로의 발달 결과, 영남지방으로부터 충청 내륙지방을 경유하는 上京路와 영남 내륙지방인 태백산·봉화와 관동지방에서 여주·이천을 경유하는 상경로가 만나는 한강변의 유통거점이었다.1001) 申景濬,≪道路攷≫京城東低平海路第三, 京城東南低東萊路第四. 송파가 서울에서 영남과 영동으로 가는 교통요지였다면, 누원점은 서울에서 동북지역인 함경도 경흥 서수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한 유통로상의 중심지였다. 18세기 이후 동북지역에서 생산되는 北魚·麻布와 삼남지역에서 생산된 綿布 등 의류의 교환이 활발해지면서 누원을 통과하는 상품량도 늘게 되었다.1002)≪各廛記事≫地卷, 辛未(1751) 2월 일. 특히 내·외어물전 밑에 종속되어 어물유통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현·칠패시장의 中都兒들은 18세기 중엽부터 개별적으로 동북어상들이 서울에 진입하는 길목인 누원점막에 가서 어물을 都執하여 이를 어물전에 넘기지 않고 행상층에게 직접 판매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1003) 高東煥,<18세기 서울에서의 魚物流通構造>(≪韓國史論≫28, 서울大, 1992), 196∼198쪽.

 의주와 동래도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매개하는 중개무역의 중심지로서 성장하였다. 또한 17세기 이후 평양이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는데, 그 까닭은 평안감영 소재지로서 평안도의 지역적 시장권의 중심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對淸무역의 통로로서 중국과 동래지방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핵심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므로≪택리지≫에서도 평양을 서울과 개성 다음으로 상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꼽고 있었다. 柳商으로 불리기도 한 평양상인들은 다른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상업에 종사하였고, 선상활동을 활발히 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라도의 행정중심지인 전주도 주변의 沙灘이라는 수로교통로와 주변 장시들을 포괄하면서 전라도의 가장 중요한 상품유통거점으로 성장하였으며, 경상감영 소재지였던 대구도 상업도시로 변해갔다. 특히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던 약재시장이 대구에서 열릴 정도로 대구는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도시로서 성장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 포구상업의 발달을 반영하여 대포구들인 은진의 강경포와 창원의 마산포, 덕원의 원산포 등지도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금강 하류에 위치한 은진 강경포는 호남평야지대를 배후지로 끼고 있으면서 전라도와 충청도지역에서 산출되는 상품을 서울의 경강으로 반출하는 유통기지였으며, 원산포는 함경도 지역의 모든 상품의 집하처로서, 이 지역 소포구 선박이 원산포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또한 창원의 마산포는 강경포처럼 큰 강을 끼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매우 번성한 포구로 발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전국적 해운로가 완성되면서 이들 원거리 해상유통의 중개항구로 발전했기 때문이다.1004) 高東煥,<조선후기 船商活動과 浦口間 商品流通의 樣相-漂流關係記錄을 중심으로>(≪韓國文化≫14, 서울大, 1992). 이러한 마산포의 상업적 번성은 순조 33년(1833) 선상주인만 130호에 달한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1005) 홍희유, 앞의 책.

 위에서 살펴본 상업도시는 대부분≪만기요람≫에서 15대 장시로 꼽고 있는 경기도 광주의 사평장·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 은진의 강경장, 직산의 덕평장, 전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창원 마산포장, 평창의 대화장, 토산 비천장,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 박천 진두장, 덕원 원산장 등과 일치하고 있다. 요컨대 상업도시는 대부분 교통상의 요지에 있으면서 주변 장시시장권과 포구시장권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상업도시로 성장한 곳은 정치·경제·행정중심지였던 서울이었다. 서울은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을 배경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공간이 확대되면서 17세기말 이후 급속하게 상업도시로 전환되었다. 지방에서는 주로 대포구와 대장시, 그리고 전통적인 행정중심도시, 국경도시 등지에서 상업도시로의 전환이 나타났다. 이는 우리 나라의 신흥도시들이 수공업을 비롯한 기타 생산의 중심지들에서보다도 상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 그리고 교통운수가 보다 발전한 지역에서 형성·발전한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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