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4) 상업자본의 축적
  • (1) 시전상업체제의 변동과 사상의 성장

(1) 시전상업체제의 변동과 사상의 성장

 조선 후기 서울에서 확립된 유통체계는 원래 鄕商·船商-旅客主人-市廛商人-中都兒-행상-소비자로 연결되는 유통구조로서 시전을 정점으로 한 것이었다. 즉 향상이나 선상이 상품을 가지고 서울에 들어오면 먼저 경강 등지의 여객주인에게 상품을 넘기고, 여객주인은 다시 시전상인에게 상품을 인도해야 했으며, 시전상인은 이를 서울의 소비자에게 판매하거나 중간도매상인 중도아에게 넘겼고, 중도아층은 다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거나 아니면 행상층에게 판매하여 행상층이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물건을 파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유통체계는 물론 국가가 시전상인에게 부여한 禁亂廛權을 기초로 형성된 것으로서 市廛體系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시전체계의 중심시장은 말할 것도 없이 종로시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일반 사상들에 의한 난전활동이 활발해지는 한편, 시전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중도아층이나 여객주인층의 시전 배제노력도 활발해졌다. 그 결과 종로시전 외에 난전인들의 중심시장인 이현과 칠패시장이 중요한 시장으로 자리잡았으며, 서울 외곽의 광주 송파장이나 양주 누원점에서는 경강상인을 비롯한 서울의 부호가 도고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도고들의 활발한 활동의 결과 시전을 정점으로 하는 유통체계는 붕괴되고 새로운 유통체계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서울에서의 유통체계의 변화모습은 함경도에서 서울까지 유통되었던 북어의 유통경로를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1006) 이하 서울에서의 북어유통체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高東煥, 앞의 글(1992a) 참조. 누원점의 상인들은 누원점에 乾房을 차려놓고, 안으로는 서울의 중도아와 체결하여 서울의 어물전을 거치지 않고 북어를 전국 각지로 유통시켰다. 양주의 宮洞店이나 抱川의 松隅場에서도 동북어물을 都執하여 서울의 이현이나 칠패 중도아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칠패 중도아만이 아니라 송파의 富商들도 누원보다 훨씬 먼 지역인 포천의 장거리 점막까지 나아가 지방상인들이 함경도에서 싣고 오는 북어를 송파장으로 빼돌려 이익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도아나 부상 등 사상들은 송파장시와 양주의 누원점막, 포천의 송우장 등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어물전 시민을 배제하여 독자적인 유통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종전에는 서울의 외어물전에서 북어를 비롯한 함경도지역의 어물을 구입하여 판매하였던 남서부지역 상인들은 이제 서울에 진입하지 않고 송파장에서 동북어물을 구입하여 판매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북어유통의 번성으로 함경도지역에서는 북어나 北布만을 운송하는 貰馬業이 출현하였으며, 심지어는 서울시민들도 동북산의 어물과 마포를 구입하기 위하여 포천의 송우장을 찾아야 할 정도였다. 특히 서울의 오지그릇 負商인 安景甫는 포천 新店에서 오지그릇을 떼어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판매하는 것을 전업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보면 포천의 송우장은 북어나 북포 등 동북산 물품만이 아니라 일반 상품의 유통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유통체계는 서울 주변에 새로운 유통거점이 창출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송우장·누원점-송파장·사평장-서울의 칠패·이현-소비자로 이어지는 유통로와, 송우장·누원점-송파장·사평장-인근 장시로 이어지는 유통로가 개발되어 서울의 어물전을 배제하고도 전국적으로 어물이 유통되는 체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한편 기존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체계의 하부에 편입되어 있었던 여객주인이나 중도아들도 시전상인을 배제하여 상업이윤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시전상인들은 軍兵이나 勢家 奴子들에 의한 난전보다도 여객주인층의 난전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하부에서 상품을 시전상인에게 넘기는 역할을 했던 주인층이 시전에게 넘기지 않고 중간도매상인 중도아들에게 직접 연결되는 것이 시전상인에게 가장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전상인들은 여객주인층이 난전과 도고상업을 가장 활발하게 행하는 세력으로 지목하고 중앙정부에 이들의 난전행위를 금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전상인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通共政策이 실시되었다. 정조 15년(1791)「辛亥通共」을 계기로 시전체계는 붕괴되고, 사상을 정점으로 하는 유통체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유통체계를 장악한 세력은 권세가와 연결된 私商大賈나 여객주인으로서 대부분 송파나 마포 등 경강지역의 富商大賈들이었다.1007)≪各廛記事≫天卷, 戊申(1788) 5월 일. 새로운 유통체계는 생산지에서부터 소비지까지 모든 유통체계를 부상대고가 장악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통체계는 시전상업과는 다른「私商體系」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1008) 安秉珆,<商品貨幣經濟의 構造와 發展>(≪韓國近代經濟와 日本帝國主義≫, 백산서당, 1975).
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이들에 의해 구축된 유통체계는 어물의 경우, 換錢冊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유통량도 한달에 4,000∼5,000냥, 1년에는 수만 냥에 달할 정도였다. 이것은 부상대고에 의해 장악된 새로운 유통체계가 우연적·일시적이 아니라 항상적·구조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8세기 후반 새로운 상품유통체계의 형성은 사상층의 참여와 더불어 서울 도성 안의 전통적인 상업중심지 이외에 서울주변 새로운 유통거점의 창출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즉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망에 대항하는 새로운 유통망의 구축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품유통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 동안 조선 후기 상업변동을 얘기할 때 시전상인과 사상층의 교체라는 상인세력의 성격변화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거론해왔다. 시전상인과 사상층을 官商과 私商, 독점상인과 자유상인, 어용상인과 민간상인, 구특권상인과 신특권상인으로 구분함으로써 상업변동의 의의를 설명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시전상인이나 사상층은 모두 상행위를 통하여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예컨대 조선 후기 蔘商·木材商·米商·鹽商 등의 구체적인 활동에서 관상과 사상 간의 차별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1009) 吳 星,≪朝鮮後期 商人硏究≫(一潮閣, 1989). 그러므로 이 시기 상업변동을 얘기할 때 상인의 성격변화라는 측면 외에 유통체계를 비롯한 상업구조의 측면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 시기 상업변동은 상업세력이 특권상인인 시전상인에서 자유상인인 사상으로 변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유통체계·교통로·시장권 등에 이르기까지 상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변화를 반영하는 질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1010) 高東煥, 앞의 책, 298∼30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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