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2. 상품의 유통
  • 4) 상업자본의 축적
  • (2) 도고상업과 상업자본의 축적

(2) 도고상업과 상업자본의 축적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반적인 상품유통과정에서의 都賈行爲는 미미한 물종에 대해서도 일반화되었으며, 도고행위의 주체도 시전상인과 사상은 물론 宮房·士大夫家·鄕班·土豪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었다.1011) 姜萬吉,<都賈商業과 反都賈>(앞의 책). 이처럼 도고행위가 보편화되는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도고행위를 했던 세력이 포구상업을 장악한 主人層들이었다.

 주인층이 도고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포구에서의 상품유통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조건과 더불어 그들이 일정규모 이상의 재력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상품의 출하시기와 출하량을 조절하면서 최대한의 상업이윤을 확보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 모든 상거래에서 주인의 개입이 관행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들 주인층은 포구시장권을 완전히 장악한 대상인으로 성장하였다. 경강상인들은 초기에는 稅穀운송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였으나 점차 私穀을 무역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경강상인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여객주인층의 미곡매점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지방의 생산지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미곡을 매점하는 일반적인 양상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세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船商米나 貢價米를 강변에 매점해두었다가 대도시와 지방의 중소도시 혹은 농촌을 막론하고 가격차가 심한 곳이면 어느 곳이나 운반·판매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의 상행위가 다량의 미곡을 장기간 매점할 수 있을 만큼 자금력이 컸고 각 지방 사이의 미가 차이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상업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강상인들은 18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인 상품가격을 조절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상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이들 경강의 주인층들은 도고상업뿐만 아니라 점차 造船業에도 눈을 돌려 船材都賈를 경영하다가 경강연변 특히 밤섬 등지를 중심으로 산재하던 船匠을 고용하여 조선업을 직접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상업자본의 축적을 기반으로 조선업에 투자하여 산업자본으로의 변신을 일정 정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1012) 姜萬吉,<京江商人과 造船都賈>(위의 책), 96쪽.

 이와 같이 여객주인층이 그전에 비해 훨씬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객주인권 가격은 18세기말 200냥에서, 19세기 전반에는 2,000∼3,000냥으로 급등하였고, 대부분 서울의 양반부호들이나 권세가에게 여객주인권이 집중되어 갔다.1013) 李炳天, 앞의 글. 유력가문들에서는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대부분의 여객주인권을 집중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奴子 등을 차인으로 파견하여 경강상업을 지배함으로써 대부분의 상업이윤을 획득하였다.1014) 禹夏永,≪千一錄≫권 10, 漁樵問答. 경강상인이 도고상업을 영위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유력가문과 상업자본의 결탁이 있었던 것이다.

 경강상인인 ‘江上大賈’들은 권세가문과 결탁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유통체계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상품의 출하량과 출하시기를 유리하게 조절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의 상권을 계통적으로 장악하여 도고상업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순조 33년(1833) 서울의「쌀폭동」이었다. 이 사건은 경강의 東幕旅客主人 金在純이 경강의 여러 여객주인을 지휘하여 미곡의 판매를 통제하고, 나아가 시전상인들까지도 미곡매매를 중지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서울의 미곡시장을 붕괴시킨 것이었다. 서울의 쌀가격이 급등하자 서울의 빈민층이 쌀값 폭등에 항의하여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19세기 경강의 여객주인이 미전상인에 비해 훨씬 강력한 미곡에 대한 유통지배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상들에 의한 도고상업은 상업자본의 일정한 축적단계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그들의 상업이윤의 기반은 대자본, 전국적 유통망, 그리고 봉건권력과의 결탁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상들이 권력기관과 결탁함으로써 확보한 특권은 시전체계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봉건권력과 결탁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각 체계가 기반하고 있는 유통체계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시전상인들은 서울에 반입되는 상품에 대해서만 독점적 구매권을 행사하였지만, 사상들은 생산지로부터 모든 유통체계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독점은 조직력과 자본력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전상인처럼 ‘廉價勒買’하지 않고, 생산지로부터 상품을 매점함으로써 ‘貿賤賣貴’가 가능하였다. 또한 시전상인의 독점은 경쟁을 원천적으로 배제한 것이었지만, 사상들의 독점은 같은 종류를 취급하는 다른 상인과의 경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상품유통의 효율성이나 이윤창출의 면에서 후자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사상세력이 구축한 이와 같은 상품유통체계는 자신에게 최대의 상업자본의 축적기회를 보장하는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권력이나 시전상인의 침탈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유통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궁방이나 아문, 또는 권세가문과 상업이윤을 분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경강상인들은 권력기관의 개입으로 자본축적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사상세력들은 상업독점에 의해 축적된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토지에 투자하여 경제외적 강제에 기초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아울러 획득한 부로써 신분매매와 관직매매를 행하여 봉건적 지배계급에 편승하려 한 경향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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