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1) 금속화폐의 보급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18세기 후반∼19세기 중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가. 동전유통의 확대와 신용화폐

 18세기 전반 동전유통에 기초하여 확립된 화폐경제는 18세기 후반∼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동전의 유통영역과 가치법칙의 작용범위가 한층 확대되어 상품거래는 물론 노동력에 대한 대가 또한 대부분 화폐가치로 환산되고 지불되었다. 이 시기 동전은 가치척도·교환수단일 뿐 아니라 지불수단·축장수단으로서도 독점적인 지위를 점하였다. 더욱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때에는 貨幣地代의 발생과 함께 각종 조세에서의 동전수취가 매년 수백만 냥에 이를 만큼 증대하여 농민층은 더욱 깊숙히 화폐경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과 관련하여 동전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18세기 전반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하였고, 이와 상호 인과관계를 가지면서 동전유통량도 크게 늘어났다.

 영조연간 지속적으로 추진된 주전사업은 정조연간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주전관리체계에 대한 합리화와 통제도 모색되었다. 그 일환으로 주전사업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 위한「戶曹專管制」와 동전원료난을 해소하고 동전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年例鑄錢制」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19세기 이후 봉건정부의 주전관리에 대한 감독체계가 이완되고 화폐유통 전반에 대한 중앙통제력이 현저히 약화되는 가운데 유명무실해져 중앙과 지방의 각 관부·군영은 다투어 대규모 주전사업을 벌여 나갔다.1048) 元裕漢, 위의 책, 68∼70·102∼108쪽.
崔虎鎭,≪韓國貨幣小史≫(瑞文堂, 1974), 132∼152쪽.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에는 동전발행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봉건정부에서 발행한 주전량의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주전사업만 정리하면<표 1>과 같다.

연 대 화폐주조량 연 대 화폐주조량
영조 48∼50년(1772∼4) 850,000냥  순조 25년(1825) 367,500냥
정조 9∼13년(1785∼9) 850,000냥  순조 28년(1828) 2월  
정조 15년(1791)   순조 28년(1828) 12월  
정조 17년(1793)   순조 30년(1830) 733,600냥
정조 19년(1795)   순조 32년(1832) 784,300냥
정조 22년(1798)   헌종 5년(1839)  
순조 7년(1807) 300,000냥  헌종 8년(1842)  
순조 13년(1813) 65,000냥  철종 6년(1855) 1,571,500냥
순조 14년(1814) 326,400냥  철종 8년(1857) 916,000냥
순조 16∼17년(1816∼7) 520,000여냥 철종 13년(1862)  

<표 1>18세기 후반∼19세기 중엽 주전 일람표

자료:≪朝鮮王朝實錄≫·≪日省錄≫·≪備邊司謄錄≫.

 이 기간 동안 봉건정부가 발행한 동전량은 수치로 확인되는 것만 730여만냥에 이르고 있었다. 여기에 봉건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묵인된 주전기술자들의 挾鑄나 불법적인 私鑄가 광범하게 성행하였고, 19세기 중엽에는「公私兩利」란 명분하에 민간인에 대한 都給鑄錢까지 시행됨으로써 동전발행량은 날로 증가하였다.1049) 元裕漢, 위의 책, 76∼84쪽. 동전발행의 급증이 곧 상품화폐경제 발달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방대한 양의 화폐가 유통영역에 투입됨으로써 상품유통과 교환관계 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이와 함께 동전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銅鑛 개발도 활발히 추진되어 주전 증대는 광업 발달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동전유통이 일반화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또한 신용화폐가 널리 유통되었다. 동전은 일정한 중량을 지닌 금속화폐였기 때문에 나귀 1짐바리(馱)에 200냥(동전 2만 개) 정도밖에 싣지 못하는 운반상의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장거리를 오가며 이루어지는 상업활동, 특히 대규모 상거래에서는 동전 대신「換」과「於音」등의 신용화폐가 이용되었다.1050) 홍희유, 앞의 책, 258∼262쪽. 환은 원거리에 동전을 보내거나 자신이 동전을 직접 가지고 가기 어려울 때 그것을 대신한 信用錢票로서, 대개 대규모 상업자본 사이의 상거래에 사용되었다. 환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미 18세기 후반경 서울을 비롯한 개성·평양·江景·全州 등 주요 상업도시에서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이후에는 여러 지방 소도시나 광산에서는 물론 조세의 지불보증수단으로 이용될 만큼 그 유통범위가 확대되었다.1051) 환 거래의 규모는 18세기 후반에 보통 400∼600냥, 최고 1,500냥 정도였으나, 19세기 이후에는 크게 증가하여 수천, 수만 냥이나 되는 대규모 환 거래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한편 동전지불을 보증하는 일종의 채용증서이자 신용전표인 어음은 환 거래에 비해 규모가 작은 거래의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환과 마찬가지로 18세기 후반 이후 보편화되었다. 신용화폐의 유통은 결국 이 시기 상품화폐유통의 발달, 도시상업과 상업자본의 성장을 반영하는 동시에 동전 중심의 화폐유통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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