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2) 조세금납화와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
  • (1) 조세금납의 성립조건-17세기 수취제도의 모순

(1) 조세금납의 성립조건-17세기 수취제도의 모순

 17세기 후반 동전유통이 이루어지고 화폐경제가 농촌사회 깊숙히 침투함에 따라 조세의 금납화과정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는 조세는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와 신분제의 추이, 농업생산력과 교환경제의 발전 수준을 전제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토지·농민지배관계의 화폐화, 재정구조의 화폐화, 농민층의 소상품생산자화 등을 수반하는 조세금납화는 이 시기 봉건국가권력의 해체와 신분제 이완, 봉건적 유통기구의 해체, 봉건적 생산관계의 해체와 농민층분해 등 제반 체제적 변동과 상호 긴밀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고, 또한 그것을 촉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 조세금납의 역사적 의의는 이러한 데 있었다.1073) 조세금납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장국종,<우리나라 봉건말기의 전세금납에 대하여>(≪역사과학≫1957년 6호).
宋贊植, 앞의 책.
方基中, 앞의 글(1984·1986·1990).
李揆大,<軍布의 代錢納과 鄕村社會의 變化>(≪韓國史論≫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조세금납은 동전유통과 함께 봉건정부의 유통정책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세금납은 그것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사회경제적 배경하에 성립하였다. 동전유통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16세기 이래의 유통경제적 조건과 17세기 수취제도의 현실이 그것이었다. 다만 조세금납은 농민층이나 봉건적 유통기구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조세수취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화폐유통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17세기 수취제도의 모순이 조세금납 성립에 보다 직접적인 계기를 부여하였다.

 조세금납을 위해서는 많건 적건 화폐구득을 위한 조세부담자·농민층의 상품생산과 유통이 전제되고 그 교환관계를 위한 시장형성이 필요한데,1074) 여기에서 말하는 조세금납은 금납에 대한 봉건정부의 法認과 조세부담자 자신의 화폐 지불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될 경우에 한한다. 향촌의 수취기구가 법인되지 않은 현물조세를 동전으로 징수하고 중간에 현물로 바꾸어 상납하거나, 반대로 금납이 허용된 조세를 현물로 징수하고 중간에 換錢하여 상납하는 防納행위는 금납과 구별하여 후술한다. 16·17세기 농촌시장인 장시의 발달과 추포의 광범한 유통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적 기반이 되었다. 더불어 농민층은 소액 명목화폐인 추포를 조세지불수단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사실상 조세금납을 준비하는 역사적 경험도 축적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봉건정부는 재정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수취체계로부터 추포를 구축시키고 양포수탈을 강화하였다. 이는 布納租稅의 극대화를 수반한「國家綿布收取體系」의 전면적 확립이었다.

 면포수탈의 강화는 17세기 전기간을 통해 이루어진 수취제도의 개편과정, 즉 전세제도에서의 永定法 실시, 공납제도에서의 大同法 실시, 軍役制(軍保制)의 확립 등 이른바「三政」가운데 중앙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전결세와 군역세제도의 정비와 함께 제도적으로 추진되고 확립되었다.1075) 17세기 조세제도 개편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方基中, 앞의 글(1984).
―――,<朝鮮後期收取制度·民亂硏究의 現況과「국사」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39, 1986).
정연식,<조선후기 부세제도 연구현황>(≪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下, 한울, 1987).
韓榮國,<朝鮮後期 收取制度와 그 硏究>(≪朝鮮後期 社會經濟史硏究入門≫, 民族文化社, 1991).
이 시기 전결세 개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山郡은 면포로 上納하고 沿邑은 쌀로 상납한다는 징세 원칙의 채택이었다. 각 군현을 미납지대와 포납지대로 구분한 전국적 규모의 徵稅地帶 편성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삼남지방을 대상으로 한 광범한「山郡作木地帶」곧 布納地帶가 형성되었다.1076) 군현별 징세지대 구분은 方基中, 앞의 글(1984), 123∼128쪽 참조. 군역세의 경우에는 군역제 정비를 통해 50만 명에 이르는 대량의 군역민이 창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80%가 넘는 대부분의 군역민이 면포 납부자인 軍布保였고, 20% 미만이 미곡 납부자인 軍米保였다. 물론 군역세도 미보는 연읍에, 포보는 산군에 배정한다는 징세지대 편성 원칙을 적용하였지만, 이러한 군역민 구성에 의해 군역세에서의 지불수단별 지대 편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군포보는 산군·연읍을 막론하고 광범하게 분포되어 면포 납부를 강요받았다.1077) 方基中, 위의 글, 131∼134쪽.

 봉건정부의 징세지대 편성,「산군작목지대」의 설정은 중앙으로의 대규모 미곡 운송을 船運에 의존하고 있는 당시의 운송조건과 관련할 때 불가피한 조처였다. 산군에서 미곡을 징수할 경우에는 조세부담자의 책임 아래 稅穀을 조창이나 연안포구까지 陸運해야 하는데 이에 따르는 加斂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산군에서의 미곡징수는 조세부담자나 봉건정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았다. 더욱이 재정 악화에 직면한 봉건정부 입장에서는 화폐형태의 재부수탈이 요구되었고, 당시 國幣는 면포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국가면포수취체계의 확립은 조세부담자·농민층에게 새로운 형태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것은 당시 綿作·綿業조건과 관련해서였다. 16세기 이래 면업은 괄목하게 발전하여 17세기 이앙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농업생산력 증대와 상품유통을 주도하였다.1078) 澤村東平,≪棉作綿業の生成と發展≫(朝鮮纖維協會, 1941).
方基中, 위의 글, 147∼151쪽.
金容燮,≪朝鮮後期農學史硏究≫(一潮閣, 1988), 103∼110쪽.
봉건정부가 양포수탈을 전면화하고 제도적으로 국가면포수취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던 생산력 기반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면작은 토양·기후 등 재배조건이 까다로와 보통 산군에서 발달하였다. 주요 면화생산지, 면작전업지대는 남해안의 일부 연읍을 제외하고 대개 산군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 농가경제의 보조수단으로 적지 않은 산군에서 자급적 면작경영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산군작목지대」설정은 일정하게 면작조건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면업의 지역적 특성에도 불구하고「산군작목지대」설정이 면작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많은 산군은 비면작지대였고, 자급지대라 하더라도 까다로운 생산조건은 늘 안정된 자급을 어렵게 하였다.1079) 이 시기 면작지대 구성에 대해서는 方基中, 위의 글 참조.

 그리하여 면포를 자급하지 못하는 비면작지대나 자급이 불안정한 자급적 면작지대의 조세부담자·농민층은 면포구득을 위해 항상적으로 농촌시장·화폐경제에 강제 편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田結稅는 산군에서만 문제되는 것이었으나, 농민층에게 집중되고 있는 군포 부담은 산군과 연읍 어디에나 광범하게 존재하였기 떄문에 군역민의 시장편입도는 더욱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에의 편입은

이곳은 木花가 나지 않는 지역으로 매번 상납독촉에 當하여 곡식으로 면포를 사서 준비하는데, 1필 구입에 곡식 數石이 소비되니 만약 한 집에 부자·형제가 같이 軍役을 지면 일시에 납부하는 양이 적으면 8, 9필 많으면 10여 필에 이르니 그 소요되는 곡식을 당하려면 몇 석이 있어야 하겠습니까(權絿,≪灘村遺稿≫권 6, 雜著 民弊上疏).

라는 탄식과 같이, 대부분의 소농민을 이른바「窮迫販賣」로 몰아 넣었고, 급기야 고리대에 얽어매어 파산시키고 있었다. 이 시기 국가면포수취체계의 확립, 면포수탈의 극대화가 농민층을 몰락시켜 가는 논리는 이러하였다. 여기에 또한 봉건정부·중간관리들의 양포수탈을 위한「點退」가 성행하여 농민부담은 날로 증가하였다.

 포납조세·면포수탈의 극대화가 야기하는 문제는 이러한 측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면업의 발전 자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특히 면직업은 선초부터 官營手工業과는 무관하게 농민층이 주체가 된 私的 農村手工業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면포생산의 증대와 그 상품화과정은 농민의 소상품생산자화를 촉진하고 농촌시장과의 관련을 긴밀하게 하였다.1080) 澤村東平, 앞의 책, 83쪽.
方基中, 위의 글, 149쪽.
이러한 가운데 면작전업지대가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면업지대나 군역민에 대한 면포수탈의 집중은 농촌시장과 연결된 면업의 부농적 발전을 저해하였고, 면포유통으로부터 발생하는 상업이윤은 봉건정부나 특권상인에게 흡수되었다.

 수취제도 모순은 米納租稅에도 존재하였다. 그것은 전세와 대동세의 지대 편성이 서로 통일되지 않고 일관성을 결여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였다. 즉 산군이면서도 전세는 쌀로 상납해야 하는「田稅作米山郡」의 설정이 그것이었다.1081) 方基中, 위의 글, 125·136∼138쪽.
「전세작미산군」에 편성된 군현은 호서 11읍, 호남 22읍, 영남 12읍 등 총 45개 읍에 이르렀다.
봉건정부가 다수의「전세작미산군」을 설정하게 된 것은 재정구조의 자급성 때문이었다. 전세곡은 관료·군병의 봉급으로 지출되는「食資」였기 때문에 호조는 매해 필요한 일정량의 미곡을 반드시 현물로 수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연읍의 전세곡만으로는 수요량이 충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봉건정부는 전세제도 개편시 일부 산군을 그대로 미납지대로 잔존시켰고, 漕運制度를 통해 이 지역의 미곡수송을 처리하였다.

 17세기 수취제도의 모순은 이와 같이「국가면포수취체계」의 확립에 따른 면포수탈의 극대화와 농민층의 부담 증대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 유통경제의 성장과 관련하여 농민층을 몰락케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농민화폐인 추포의 조세지불수단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유통경제적 조건 속에서 조세 부담을 조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불형태가 요구되었다.1082) 17세기초 이래 동전유통론이 대개 양포수탈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된 바와 같이 봉건관료들 역시 이러한 국가면포수취체계의 모순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동법 주관자였던 金堉이 山郡에서조차 면포구득 실태를 시장구입으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用錢과 금납 도입을 주장한 것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金堉,≪潛谷遺稿≫권 4, 疏箚 請令湖西山邑鑄錢箚).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봉건정부 입장에서 조세금납은 처음부터 지나친 면포수탈에 따른 농민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부세경감 수단이라는 일반적 관념하에 성립되고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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