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 금속화폐의 보급과 조세금납화
  • 2) 조세금납화와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
  • (2) 17세기말∼19세기 중엽 조세금납의 전개

가. 17세기말∼18세기초 조세금납의 성립

 동전유통 시행과 함께 봉건정부는 숙종 5년(1679) 동전유통정책의 일환으로서 조세의「作錢收捧」, 즉 금납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관한 기본 시행원칙을 정하였다.1083)≪備邊司謄錄≫35책, 숙종 5년 4월 9일. 시행 초기의 것이지만 조세금납에 임하는 봉건정부의 입장과 그 운영 방향은 이「作錢規定」을 통해 기본적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그 주요한 시행원칙은, ① 금납은 포납조세에 한정하여 미납조세에서는 허용하지 않고, ② 면포의 作錢價는 흉풍·시가에 따라 加減하는 「從市價」 원칙에 따르며, ③ 금납비율=作錢率은 현물재정 운영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한다는 것 등 크게 세 가지였다. 이러한 시행원칙은 봉건정부가 면포수탈의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 재정 화폐화를 수용하면서도 금납을 현물재정구조의 유지를 전제로 한 재정보전의 한 방편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종시가」규정에 잘 나타나는 바 성립기의 조세금납은 정액금납조세가 아니라 代錢納조세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봉건정부의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조세금납은 숙종 10∼20년대 동전유통이 정착되고 유통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 증대하였다. 특히 면포수탈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삼남지방에서 그러하였다. 이러한 금납 경향을 반영하여 이 시기 중앙에 상납되는 대동목과 군포에서는 면포와 동전을 반반씩 내게 하는「錢木參半」수취방식(1/2 작전율)이 관행으로서 정착되었다. 그리고 조세금납이 증대함에 따라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도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조세부담의 실제 내용을 결정하게 되는 작전가와 작전율을 둘러싼 봉건정부와 조세부담자·농민층 사이의 대립이었다. 동전유통 초기 화폐가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물가변동이 심하였기 때문에 금납이 정착되면서 조세부담자·농민층은 작전가를 시가 이하로 낮추고 작전율을 확대시키고자 한 반면, 봉건정부는 지속적으로 면포시가에 따라 작전가를 개정하고 작전율도 되도록「전목참반」에 고정시키고자 하였다.1084) 方基中, 앞의 글(1984), 160∼163쪽.

 봉건정부가 매해 작전가를 면포시가에 따라 결정하고 또한 작전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자 한 것은 봉건적 재정구조와 그 운영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정부는 조세수취를 통해 관료·군사조직의 재정을 충당하고, 국가재정과 연결된 서울의 봉건적 유통기구(貢·市人)를 운영해 나갔다. 그런데 그 재정의「應捧·應下」는 자급적 재정운영 원리인「量入爲出」에 입각하여 운영되었다.1085) 方基中, 위의 글, 137∼138쪽.
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一潮閣, 1988), 46∼47쪽.
조선의 재정 운영은 조세 수취과정과 그 소비과정 등 크게 두 체계로 나뉘어지는데, 전자를 應捧 또는 收捧이라 하고, 후자를 應下 또는 上下〔차하〕라고 한다.
이 원리에 의해 작전가와 작전율의 동향은 재정에 의존한 제반 봉건기구(특히 공·시인, 군병 등)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응하가와 동전지불 비율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작전가와 면포시가 사이의 차이를 최대한 줄이고 현물재정구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금납 비율을 조정하여 봉건적 재정구조·유통구조를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것이 금납을 둘러싼 봉건정부와 조세부담자 간의 기본적인 대항관계의 구조였다.

 조세금납이 증대하고 이를 둘러싼 갈등이 심해짐에 따라 숙종 30년대 봉건정부는 금납 운영을 제도적으로 정비해 나갔다.1086) 方基中, 위의 글, 164∼166쪽. 그 1차 조치는 숙종 31년(1705) 良役變通과 관련하여 마련된<軍布均役節目>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부는 군역 종류에 따라 차이가 많았던 군포부담량과 면포품질을 1인당 2필, 木品 6승 35척으로 균일화하는 한편 금납의「작전규정」도 조정하였다. 우선 役種에 따라 차이가 있던 각종 군포의 작전가를 1필에 2냥 5전으로 획일화하였고, 대동목은 2냥 3전으로 정하였다. 또한 그동안 관행되던「전목참반」 작전율을 강제규정으로 법제화함으로써 정부의 동전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더 이상의 금납 증대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재정운영에서도「전목참반」차하가 법제화되어 조선 후기 전기간을 통해 적용되었던 「응봉·응하」의「전목참반」체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치에 이어 숙종 32∼34년에는 금납 운영의 관건이었던「從市價」원칙에 대해서도 변통론이 제기되었다. 이 때에는 심각한「綿荒」에 의해 면포가격이 급등하여 정부에서는 일시 대동목·군포의 純錢 상납을 허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인·군병들의 반발이 심하여 자연「종시가」규정에 의한 작전가 증액이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논의는「종시가」가 불가하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이 논의를 거친 뒤 訓練都監 砲保木 등 목품이 높게 관행되던 5개 역종을 제외한 모든 군포와 대동목의 작전가가 1필당 2냥으로 조정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5개 역종도 숙종 42년 1필당 2냥으로 고정됨으로써 모든 포납조세의 금납은「전목참반」의 한계 내에서 작전가를 1필당 2냥으로 하는 정액금납조세으로 전환하였다.1087) 1필 2냥式은≪續大典≫영조 20년(1744)에 명문화되어 개항 이전까지 법정 작전가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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