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4. 대외무역의 전개
  • 1) 청과의 무역
  • (1) 17세기 부연역관의 청·일 간 중계무역

(1) 17세기 부연역관의 청·일 간 중계무역

 淸과의 무역은 매년 수 차례씩 北京(燕京)을 왕래한 赴燕使行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譯官들이었다. 부연사행은 정기사행과 임시사행으로 구분된다. 정기사행은 청나라가 북경을 장악한 뒤에 정례화된 ‘三節年貢行’과 ‘皇曆咨行’이다. 삼절연공행은 청이 胡亂 직후 瀋陽(盛京)에 파견하던 冬至·聖節·正朝 등 三節行과 年貢行을 연경에 천도한 이듬해인 인조 23년(1645)부터 통합한 것이며 대부분의 史書에는 冬至行으로 기록되어 있다.1118)≪通文館志≫권 3, 事大 赴京使行.
≪同文彙考≫補編 권 7, 使行錄.
동지행은 매년 음력 11월에 출발하여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황력뇌자행은, 황력을 호란 직후에는 正朝行이 가지고 왔고 인조 25년부터는 鷹連行이 가지고 왔던 것을 현종 원년(1660) 鷹貢制가 혁파된 뒤 皇曆咨官(譯官)을 별도로 파견함으로써 정례화되었다. 황력뇌자행은 약칭하여 ‘曆行’이라 하였고, 매년 음력 8월에 출국, 10월에 연경에 도착하여 청의 時憲曆을 받아 왔다.1119)≪通文館志≫권 3, 事大 賚咨行.
≪同文彙考≫原編 권 42, 曆書.

 임시사행으로는 謝恩行을 비롯하여 進賀行, 進奏行, 奏請行, 陳慰·進香行, 告訃行, 問安行, 參覈行, 鷹連行, 護行行, 奏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임시사행은 사건의 비중과 파견 시기에 따라 정기사행편에 관계문서와 方物을 부송하는 ‘兼行’制가 적용되었고 때로는 비중이 높은 임시사행편에 겸행토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1120) 柳承宙,<朝鮮後期 對淸貿易 小考>(≪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219쪽<표 1>참조.

 정기 또는 임시사행은 正使·副使·書狀官 등 3使臣과 역관 등의 正官들과 馬夫·奴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호란 직후 조·청 양국정부는 3사신을 구비한 사행의 경우 정식관원수를 3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부연사행의 정관수는 증가해갔고, 이 때문에 청은 정관의 수를 제한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현종 9년에 3사신과 역관, 灣上軍官을 합쳐 30명으로 제한하였고 畵員을 삭감하였으며, 사신으로 하여금 정관의 성명을 일일이 기록·보고하게 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도록 규정하였다.1121)≪謄錄類抄≫현종 9년 3월 7일. 그러나 3사신과 역관들 외에도 寫字官·醫員·화원·軍官 등이 수행하여 동지행의 정관수는 35명이었고, 사은·주청·진하·卞誣·진위·진향행의 정관은 34명이었다. 그 밖에 고부행은 20명, 문안행은 15∼17명, 참핵행은 10∼20명으로 정관수가 적었으며, 임시사행으로서의 略使인 뇌자·뇌주행과 정기사행인 역행은 정관이 2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부연사행은 주로 3사신을 구비한 동지·사은·진하·진위행과 뇌자행, 역행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고부·문안·참핵행은 드물었다. 3사신을 구비한 동지행 등에는 부연사행의 정관과 마부·노자 등이 220여 명에, 말 또한 200여 필이었고, 牛家庄 또는 심양에서 回還하는 貢物運送刷馬 또한 250여 필에 달하였다. 그러나 약사는 뇌자관·小通事와 馬頭 2명, 노자 2명, 驅人 9명 등 15명과 驛馬 2필, 쇄마 6필에 불과하였다.1122) 이상 부연사행의 정관수 등에 대해서는 柳承宙, 앞의 글, 220쪽 참조.

 부연사행의 人馬가 압록강을 건너 柵門-鳳凰城-遼東을 거쳐 심양에 이르기까지는 540리였고, 다시 심양에서 廣寧-山海關-通州를 거쳐 연경까지는 1,509리였다. 결국 사행은 압록강을 건너 책문까지는 110리, 심양까지는 540리, 연경까지는 2,049리였다.1123)≪通文館志≫권 3, 事大 中原進貢路程. 사행절차는 다음과 같다.

 사행은 義州에서 인마수를 기록한 ‘渡江狀’을 정부에 보고한 뒤 압록강을 건너 110리 길인 책문으로 향하였다. 入柵 하루 전에 사행의 목적과 정관의 명단 및 인마수를 기록한 ‘入柵報單’을 淸譯을 시켜 守門人으로 하여금 鳳凰城將에게 전달하면, 다음날 봉황성장이 책문 밖으로 나와 영접하고 보단 중의 인마를 점검한 뒤 들여보냈다. 책문에서부터는 迎送官 1명과 衙譯 1명1124) 淸 禮部의 通官들은 胡亂 때 포로가 된 조선인 역관들로서 大通官이 6명, 次通官이 8명이었다. 이들 중 차통관 2명은 鳳凰城에서 부연사행을 북경까지 護行하였고 북경에서의 각종 使事나 會同館 무역에도 참여하여 使行員役이나 상고들의 무역을 원활하게 하였다(≪譯官上言謄錄≫현종 3년 8월 21일;≪通文館志≫권 3, 事大 入京).이 북경까지 사행을 안내하였으며, 동시에 伏兵將 1명이 甲軍을 거느리고 護行하여 요동에서 교체, 심양까지 갔다. 이러한 절차는 광녕·錦州衛·산해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행이 심양에 도착하면, 정사·부사는 성밖에서 駕驕에서 내려 말을 타고 館所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당해 종사관으로 하여금 禮部咨文에 수록된 품목수에 맞추어 幣物을 奉天府의 戶部에 분납하였고, 연경에 가지고 갈 歲幣방물은 청의 押車章京에게 교부하여 북경으로 운반하였다. 따라서 세폐와 방물을 싣고 왔던 인마는 모두 團練使가 이끌고 귀국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會同館에 머물면서 ‘表咨文呈納’, ‘鴻臚寺演儀’, ‘朝參’, ‘方物歲幣呈納’, ‘下馬宴’, ‘頒賞’, ‘上馬宴’ 등의 제반절차를 끝낸 뒤 회동관 開市에서 무역을 한 뒤 ‘辭朝’하고 귀환하였다. 회동관에서 머무르는 날짜는 明代에는 40일이었지만 청대에는 일정한 기한이 없었다.

 회동관 개시는 상마연이 끝나고 예부가 상품의 불공정거래자 및 潛賣者와 史書, 黑·黃·紫造大花, 西藩蓮緞匹 그리고 兵器·焰硝·銅鐵·牛角 등 禁物 매매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告示한 뒤 시작되었다. 고시 후 북경의 상인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監市官의 감시하에 조선의 역관·상인들과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길에 오를 때 堂上譯官이 무역품의 包數를 기록하여 아문에 제출하면 아문에서 이를 일일이 대조한 뒤 예부에 보고하여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 沿途貿易을 防禁토록 하였다.1125)≪通文館志≫권 3, 事大 入柵報單·瀋陽交付分納·入京·表咨文呈納·鴻臚寺演儀·朝參·方物歲幣呈納·下馬宴·頒賞·上馬宴·告示·辭朝.

 연경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들이었다. 당시 역관들은 부연사행의 정관인 首堂上譯官, 堂上譯官, 別啓請堂上, 上通事, 次上通事, 質問從事官, 加定押物官, 押物·押幣·押米從事官, 淸學新遞兒, 偶語別差 등의 職名을 띠고 사신을 수행하였다.1126)≪通文館志≫권 3, 事大 赴京使行. 사행의 정관 중 정사·부사는「使事」만을 수행하였고 서장관은 臺官의 임무를 띠고 使行員役의 위법행위를 규찰하였다. 수당상역관은 3사신을 제외한 모든 원역들을 통솔하고 行中의 公私업무를 총괄하였다. 상통사는 수당상역관을 보좌하여 行中事에도 관여하였지만 청의 각 關門에 납부하는 禮單을 관장하고 尙衣院의 御供貿易을 담당하였으며, 차상통사는 內醫院의 무역을 담당하였다.1127)≪通文館志≫권 1, 沿革 等第. 압물관은 세폐·방물·歲米 등 각종 조공품의 관리와 운송을 담당하였으며, 그 밖의 각 역관들도 나름대로 사사나 행중사의 갖가지 임무를 띠고 있었다.1128)≪通文館志≫권 3, 事大 先文·渡江狀. 3사신과 역관들은 이처럼 사사나 행중사를 수행할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그들의 직품에 따라 마부·驅人·騎驛馬·卜刷馬 등을 배정하였고 사비로 노자·마두 및 私持馬를 거느리는 것도 허용하였다.

 3사신과 역관 중 사행무역의 주체였던 역관들에게 지급된 人馬는 상당수에 달하였다. 당상역관·상통사·압물관에게는 모두 乘用의 기역마 1필을, 또 私物의 운반용으로서 당상역관과 상통사에게는 구인 1명과 복쇄마 1필씩을, 압물관에게는 구인 1명과 복쇄마 2隻을 지급하였으며 당상역관과 상통사에게는 노자 1명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 가운데 사무역품을 운반하는 말은 복쇄마 1필 또는 2척에 불과하지만, 청 世祖가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는 정부가 역관에게 자비로 마두 1명과 사지마(元私持馬) 1필을 갖도록 허락하였고 인조말∼효종초에는 다시 마두 1명과 별사지마 1필을 추가로 허용하였다. 이처럼 17세기 중엽에 역관들은 기역마·복쇄마·원사지마·별사지마 등 4∼5필의 말을 이용하여 다량의 무역품을 수송할 수 있었다.1129)≪通文館志≫권 3, 事大 渡江狀.

 정부는 역관들에게 연경무역을 허가하는 동시에 사무역자금의 정액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호란 직후 조선사행이 심양을 내왕하던 시기에는 정부가 정관들에게 盤纏 명목으로 南草 50斤씩을 지급하였는데 인조 22년(1644)에 청이 연경으로 천도하면서부터는 남초가를 근당 銀 1냥으로 환산하여 은 50냥을 가져가게 하였다.1130)≪備邊司謄錄≫8책, 인조 22년 11월 23일. 그러나 은 50냥은 반전으로 소비될 뿐 무역자금이 될 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행의 정관들은 명말의 부경사행시에 人蔘 80근을 무역정액으로 허가했던 전례를 들어 양국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효종 4년(1653)에는 부연원역 중 ‘口傳啓下’된 30명의 정관에게만 인삼 80근을 무역자금정액으로 허락하였다. 이 때 인삼 80근을 20근씩 나누어 포장하였으므로 4包가 되었는데 4포제는 곧 8포제로 바뀌어 10근씩 포장되었다. 양국정부는 30명의 정관 한 사람당 80근씩 도합 2,400근의 정액 외에는 휴대를 엄금하였고 貂皮·靑黍皮·水獺皮 등 皮雜物의 휴대도 철저히 규제하였다.1131) 柳承宙, 앞의 글, 225쪽.

 그러나 包蔘制가 실시되면서 청·일과의 중계무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동시에 倭銀의 수입량이 증가함에 따라 왜은이 청으로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효종 10년(1659)에 義州府尹으로 하여금 철저히 수색하여 은화의 유출을 방지토록 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은 유출은 증가되어 현종 4년(1663)에는 搜銀法을 강조해야 할 만큼 청으로의 은 유출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1132)≪備邊司謄錄≫23책, 현종 4년 3월 8일. 이러한 추세에 따라 정부에서는 마침내 현종 11년경 인삼 1근을 은 25냥으로 환산하여 8포 인삼 80근 대신 은 2,000냥을 8포정액으로 책정하고, 당상관원에게는 특별히 1,000냥을 더하여 3,000냥을 8포정액으로 규정하였다.1133)≪通文館志≫권 3, 事大 八包定額.
≪備邊司謄錄≫33책, 숙종 3년 8월 24일 및 40책, 숙종 12년 정월 6일 및 45책, 숙종 17년 10월 17일.
≪承政院日記≫289책, 숙종 8년 4월 13일.
당상·당하역관들은 각기 주어진 3,000냥 또는 2,000냥의 은으로 청의 물화를 대량 수입할 수 있었다. 한편 역관들은 자기 몫의 8포 외에도 상통사가 상의원, 차상통사가 내의원의 8포무역을 담당하는 등 사행정관의 8포와 구분한 각 관아의「別包貿易」도 대행하였다.1134)≪萬機要覽≫財用編 5, 燕行八包.
≪備邊司謄錄≫122책, 영조 27년 정월 6일 및 155책, 영조 47년 4월 23일.

 부연역관들이 연경에서 수입한 물화 즉 ‘燕貨’는 白絲와 匹緞 등이었다. 필단으로는 白色緞·三升方絲紬·錦緞·紗緞 등이 주로 수입되었다.1135) 柳承宙, 앞의 글, 229쪽. 부연역관들이 연경에서 수입한 연화는 동료역관들인 訓導와 別差가 주관하던 倭館開市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그 중 백사무역은 현종 11년 현재 100근당 수입가가 은 60냥인데 비해 왜관에서의 수출가는 160냥으로서 거의 2.7배에 달하였다.1136)≪顯宗改修實錄≫권 22, 현종 11년 3월 경신. 백사와 필단은 청의 蘇州·杭州産으로서 淸商이 직접 일본의 長崎(나가사키)로 수출하게 되는 숙종 39년(1713)경까지 계속 수입되었다.1137)≪通文館志≫권 5, 交隣 倭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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