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4. 대외무역의 전개
  • 1) 청과의 무역
  • (3)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연상무역의 발전과 산업부문 침투

(3)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연상무역의 발전과 산업부문 침투

 정부는 영조 30년에 만상에게만 연복무역 곧 책문후시를 허가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국내의 사상들에게도 대청무역로를 열어준 셈이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청상과의 무역을 실현해왔던 서울·개성·평양·安州·義州 등지의 사상들, 이른바 ‘燕商’들의 직·간접적인 대청무역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연상들은 수출이 허가된 皮物·紙地·紬·苧·포·면 등의 국내상품을 만상에게 판매하고 동시에 만상이 수입한 淸貨를 사서 국내에 팔았다. 연상들은 책문후시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만상에게 수출상품을 독점판매하고 또 국내의 수요를 감안하여 청화를 선택·수입토록 함으로써 사실상 만상을 조종하고 있었다. 만상의 책문후시가 공인됨에 따라 18세기 후반에는 피물·지지·주·저·포·면류의 생산이 활기를 띠게 되고 송상을 위시한 연상들의 매점매석 행위가 두드러졌으며, 반대로 봉건적 특권을 누려 왔던 貢·市人들의 상업활동은 위축되고 있었다.

 이를 일일이 예시할 필요도 없지만 피물의 경우만 해도 우선 牛皮는 18세기 후반부터 청과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되던 상품이었다. 소위 비합법적인 도살행위가 만연하였고 연상들은 懸房이나 昌廛市民들을 따돌리고 우피를 매점하여 만상에게 판매하였으며,1192) 姜萬吉,≪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高麗大 出版部, 1973), 116·122쪽
宋贊植,<懸房考(上·下)>(≪韓國學論叢≫6·7, 國民大 韓國學硏究所, 1984).
金東哲,<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韓國文化硏究≫, 釜山大, 1993), 415∼419쪽.
狗皮契貢人들만이 독점 납품하던 水獺皮도 연상들이 사냥꾼에게 先金을 지불, 매점하여 만상에게 팔았다.1193) 姜萬吉, 위의 책, 116∼117쪽. 紙地도 종래 紙契貢人과 紙廛市人들이 독점 수매하던 삼남의 方物紙와 別壯紙·雪花紙 등을 연상들이 제지사찰의 僧徒와 짜고 예매하여 만상에게 전매하였다.1194)≪備邊司謄錄≫172책, 정조 12년 정월 8일. 苧産 7읍의 저포도 연상들이 서울의 苧布廛市人을 따돌리고 사 갔으며1195) 劉元東,≪韓國近代經濟史硏究≫(一志社, 1977), 228∼229쪽. 포·목 또한 매점매석하였다.1196)≪備邊司謄錄≫206책, 순조 17년 11월 11일.

 연상들은 이 시기에 정부가 공인한 수출품목을 매점하여 만상들에게 전매할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정부가 禁輸品으로 규정한 인삼과 은의 수출로를 타개하고 있었다. 그 중 인삼은 곧 山蔘으로서 약효가 뛰어나 소량으로도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삼은 국내는 물론 청과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무절제하게 대량으로 채취해왔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거의 멸종상태를 면치 못할 만큼 품귀현상을 빚게 되었다.1197)≪英祖實錄≫권 49, 영조 15년 4월 기해.
≪備邊司謄錄≫124책, 영조 28년 6월 10일.

 貢蔘의 조달마저 어렵게 되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蔘戶들은 파산·流離하였으며 蔘價는 날로 폭등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 28년(1752)에 정부는 使行八包에 지지·피물·면포·海蔘·海帶 등의 雜物을 충당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어 같은 왕 30년에는 灣包의 무역을 허가하면서 인삼을 은과 함께 금물로 지정하였다.1198) 金鍾圓,≪朝淸交涉史硏究≫(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83), 104쪽.

 이처럼 蔘貴현상이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에 전라도 同福縣의 한 여인이 산삼의 인공재배법을 개발하였다.1199) 姜萬吉, 앞의 책, 123쪽. 인삼재배법은 급속도로 湖南과 嶺南에 파급되었고 18세기말에는 이미 家蔘의 매매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정조 21년(1797) 2월에<華城府內新接富實戶蔘帽已劃節目>을 제정하면서 尾蔘契를 조직, 전국의 가삼을 독점수매하여 赴燕員役의 8포삼을 조달토록 하였으며1200)≪備邊司謄錄≫185책, 정조 21년 2월 22일. 그 해 6월부터는 사행8포에 은과 함께 인삼을 채워갈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러나 가삼이 인삼과 달리 약효가 덜하고 장거리 수송시에 상할 우려가 많아 紅蔘製造法이 개발되었으며 같은 해 부연역관들의 주관하에 홍삼제조장인 蒸包所가 한강변에 설치되었다.1201)≪增補文獻備考≫권 151, 田賦考 정조 21년.

 이처럼 인삼재배농과 홍삼제조업이 성장하고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상리에 밝은 개성의 연상들이 자본을 투입하여 蔘圃를 경영, 홍삼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개성유수를 움직여 순조 10년(1810)에는 京江의 증포소를 혁파하여 개성으로 옮기고, 包蔘의 전매권을 확보하였다.1202) 姜萬吉, 앞의 책, 125쪽. 또 종래의 삼계가 혁파되었고 만상이 포삼의 무역업무를 장악하였다.

 개성의 연상들이 포삼의 전매권를 장악하고 의주의 만상들이 포삼의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개성의 삼포는 더욱 확장되어 갔으며 홍삼의 생산량도 급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역관·상인들의 영리욕과 관아의 수세욕이 맞물려 포삼허가액 또한 날로 증가하여 정조 21년에 120斤에 불과하던 것이 수차의 증액을 거듭한 끝에 철종 2년(1851)에는 40,000근에 달하였다. 그리고 개성의 연상들은 사행8포의 포삼을 전매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만상들과 결탁하여 다량의 홍삼을 밀조·밀수하였다.1203) 姜萬吉, 위의 책, 127∼130쪽.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조 30년에 만상의 책문후시가 공인되었지만 인삼뿐 아니라 은화마저 금물로 규정되었다. 雜貨는 부피와 중량에 비하여 단가가 낮고 差益이 적었으며 수송이 불편하고 그 비용도 과다하게 소요되었다. 따라서 만상은 물론 만상을 통하여 대청무역을 실현하던 연상들은 인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화의 수출로를 타개하려 하였다. 은은 대청무역의 결제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상품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17세기 이래 역관과 연상들은 국내의 鑛銀과 倭銀으로 淸貨를 수입해왔다. 그러나 1730년대에 이르러 청·일 간의 直交易이 활발해지고 왜은의 국내 수입이 두절되었으며1204)≪備邊司謄錄≫134책, 영조 34년 정월 5일.
≪日省錄≫정조 5년 6월 21일.
≪正祖實錄≫권 36, 정조 16년 10월 신미.
더욱이 영조 16년에 정부가「經稟設店法」을 제정하여 은광개발을 규제하였기 때문에 국내의 은생산은 크게 위축되어 갔다.1205) 柳承宙,≪朝鮮時代 鑛業史 硏究≫(고려대 출판부, 1993), 295∼302쪽.

 왜은의 수입이 중단되고 국내의 은생산이 위축되자 정부는 대청외교 및 무역에 절실한 은화를 확보하기 위해 영조 28년(1752)에 사행8포의 ‘雜物充包’를 강요하였고, 같은 왕 30년에는 灣包를 허가하면서도 인삼과 은의 ‘충포’를 엄금하였다. 따라서 연상과 만상 등은 국내의 은광개발을 촉구하고 광산 종사자들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품설점법은 “호조와 각 軍門 및 각 營·邑을 막론하고 왕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銀·鉛店을 新設할 경우 道臣 이상은 罷職하고 守令 이하는 拿問한다”1206)≪承政院日記≫705책, 영조 10년 정월 20일.
≪續大典≫戶典 雜役.
고 규정하고 있었다. 국가의 재정아문인 호조는 간혹 대청외교·무역은을 구실로 허가를 받아「設店收稅」하기도 하였지만 각 도의 감영에서는 허가를 얻을 명분이 없었다.

 광산 종사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광산이 발견되면 호조는 왕의 허가를 받아 別將을 현지에 파견, 설점수세업무를 대행케 하였다. 별장은 대개 서울의 富商大賈들이었고 호조의 설점수세업무를 대행한 대가로 당해 은점의 총생산량 중 2/3를 착복하던 일종의 수세청부업자들이었다. 호조의 자금으로 店所가 설치되었고 은점의 실질적인 경영주는 광산 종사자의 우두머리격인 ‘頭目’이었다. 두목은 店匠과 銀軍을 고용하여 은광업을 영위하였으며 관청선대제적 민영광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1207) 柳承宙, 앞의 책, 302∼311쪽.

 어떻든 경품설점법이 제정된 이후 각 도의 영·읍에서는 은점의 설점수세가 불가능해졌고 호조 소관 은점에 대한 잡세수취권도 박탈되고 말았다. 하물며 호조의 은점이 관내에 설치될 경우 영·읍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데다 오히려 이농민의 증가와 각종의 소요사태를 우려해야 하였다. 때문에 각 도의 감사와 수령들은 호조의 설점을 방해하고 별장의 파견을 거부하였다.1208) 柳承宙, 위의 책, 295∼302쪽. 결국 호조의 은광개발은 영·읍의 방해를 받아 침체해갔고 은가는 폭등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광산 종사자들은 은광이 소재한 도의 감사나 수령과 결탁하여 潛採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광산 종사자들이 그들의 잠채광업을 장기간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감사나 수령과 결탁해야 할 뿐 아니라 광산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광산 종사자들은 관료들과 결탁할 능력도, 경영자금을 조달할 재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결국 광산 종사자들은 감사나 수령과 결탁할 수 있는 능력과 경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재력을 지닌 자를 물색하여 物主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송상을 비롯한 연상들이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1209) 이하 상인들에 의한 광산경영에 대해서는 본서에 수록되어 있는 柳承宙,<광업의 발달>참조.

 연상들은 일찍부터 전국의 은점에서 생산한 은을 수매하여 대청무역의 자금으로 사용해왔을 뿐 아니라 때로는 광산 종사자들과 결탁하여 금광을 잠채·수출하였다. 결국 연상들은 광산 종사자들의 물주로 참여하여 감사나 수령과 결탁, 장기적인 잠채를 실현하였고, 광산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투입하였다. 물주제하의 잠채광업이 보편화되면서, 호조에서도 굳이 자금을 들여 설점하지 않아도 되고 말썽 많은 별장제를 고집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영조 51년에는 소관하의 은점별장들을 축출하고 당해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물주로부터 店稅를 수취·상납토록 조치하였다. 이리하여 은점의 별장제는 사라지고 물주제가 지배적인 은점의 경영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물주는 정식으로 설점허가를 따내고 실질적인 경영자인「穴主」에게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그 대가로 원리금에 상당하는 鑛銀을 수취할 뿐만 아니라 당해 은점에서 생산한 은을 싼 값으로 매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연상들이 광은을 장악하면서부터 대청무역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정부가 영조 30년에 만상의 책문후시를 허가했을 때는 만상으로 하여금 피물·紙地 등의 잡화로만 만포를 충당케 하였고 또 山海關 동쪽의 물화만을 수입토록 하였다. 그러나 은점에 물주제가 성립된 후부터는 만포 속에 은화를 숨겨가기 시작하였고 청상과 결탁하여 북경의 물화를 책문으로 끌어들여 교역하였으며 무역액도 급증하여 정조 10년(1786)경에는 40,000∼50,000냥에 달했다.1210)≪日省錄≫정조 10년 정월 6일. 이처럼 연상과 만상이 결탁하여 국내의 광은이 사사로이 유출되고 청화가 대량으로 수입됨에 따라 부연역관들은 8포은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그들이 수입한 청화의 판로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정부는 역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정조 11년(1787) 만상의 책문후시를 혁파하였으나 후시 재개를 요구하는 집단의 저항이 거세지자 같은 왕 17년에 다시 책문후시를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1211)≪備邊司謄錄≫177책, 정조 14년 7월 25일.
≪萬機要覽≫財用編 5, 柵門後市.
다만 부연역관에게는 전술하였듯이 같은 왕 21년에 이르러 은과 함께 인삼의 충포를 허가하였다.1212) 姜萬吉, 앞의 책, 127∼130쪽.

 그런데 연상들은 국내 은점의 별장제를 물주제로 전환시키고 만상과 결탁하여 은을 유출시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금의 수요를 유발하고 금광개발을 자극하였다. 은점에 물주제가 성립된 직후에 광산종사자들은 평안도 慈山과 成川의 沙金産地를 개발하였고, 연상들은 감사와 수령의 비호하에 사금을 모두 수매하여 청나라로 유출하고 있었다.1213)≪增補文獻備考≫권 160, 財用考 7, 附金銀銅.
≪備邊司謄錄≫161책, 정조 4년 10월 19일 및 162책, 정조 5년 3월 15일.
≪日省錄≫정조 4년 11월 18일 및 정조 10년 정월 22일.
사금은 강이나 하천의 모래 속에서 간단한 도구로 채취할 수가 있어 가족단위의 소년·소녀까지 동원되었다. 그리고 청상들이 生金을 선호했기 때문에 제련할 필요가 없어 호조나 물주가 자금을 투입하여 설점할 필요도 없었다. 사금산지에는 각처의 이농민들이 수없이 몰려들었고 곳곳에 잠채가 만연하게 되자 정부는 정조 4년에 호조의 計士를 파견, 金軍들을 관리·수세하기 위한 점소를 설치하고 금군들로부터 매일 일정액의 세금을 수취하기 시작하였다.1214)≪備邊司謄錄≫188책, 정조 22년 7월 27일.

 이러한 사금광산의 계사제도 점차 별장제와 유사한 폐단이 야기되었고 또 사금광개발이 전국에 확대되면서 채광여건도 변하여 운영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연상들이 파고 들어 순조 6년(1806)에는 은점과 같이 물주제하의 수령수세제가 금광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1215) 柳承宙, 앞의 책, 353∼365쪽.

<柳承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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