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4. 대외무역의 전개
  • 2) 일본과의 무역
  • (2) 상인

(2) 상인

 흔히 일본과의 무역에서 상인이라고 하면 사무역 상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 대신에, 밀무역을 단속할 책임이 주어졌고, 또 일정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형태의 상인을 東萊商人이나 東萊商賈 또는 줄여서 萊商으로 불렀다. 동래상고의 선정 기준은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서울에 근거를 둔 京商이나 서울과 지방의 실력자, 즉 ‘富實者’들이었다. 따라서 동래상인이란 동래 출신 상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동래의 倭館을 무대로 하여 대일무역에 종사한 상인들을 가리킨다.1218) 金東哲,≪朝鮮後期 貢人硏究≫(韓國硏究院, 1993), 34∼36쪽.

 일본과의 사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동래상인들은 처음에는 수의 제한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동래상고의 수가 크게 늘어 그 폐단이 심해지자, 비변사는 호조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지참한 사람만 왜관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가 숙종 4년(1678) 윤3월이었다.1219)≪邊例集要≫권 9, 開市 무오 윤3월.
한편 조선정부는 같은 해 윤3월 왜관을 豆毛浦에서 草梁으로 옮겼는데, 새로 옮긴 왜관에서 무역 질서를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 조선정부의 방침이었을 것이다(≪邊例集要≫권 11, 館宇 무오 윤3월).
그런데 그 해 6월 동래부가 狀啓를 올려 왜관무역에 출입하는 상인의 숫자를 정할 것을 요청한 것을 보면,1220)≪春官志≫권 3, 開市 무오 6월. 실제로 특권상인의 수를 제한하는 이른바 商賈定額制가 실시된 것은 6월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1221)≪備邊司謄錄≫45책, 숙종 17년 7월 16일.

 그 뒤 무역상인의 수는 여러 차례 증감을 보였다. 숙종 17년에는 상고의 수가 30명이었는데,1222)≪邊例集要≫권 9, 開市 신미 윤 7월. 나중에는 그 수가 20명으로 줄어든 적도 있었다. 또 숙종 34년에는 상고정액제를 완전히 혁파하여 인원수의 제한을 없애기도 했다.1223)≪春官志≫권 3, 開市. 그러다가 다시 15명의 상고가 선정되었으나 순조 2년(1802) 무렵에는 5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1224)≪增正交隣志≫권 4, 開市.

 이와 같이 일본과의 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했던 동래상인들은 무역의 성쇠와 함께 그들의 운명을 같이해야만 했다. 18세기 중반 이후 여러 가지 사무역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발생하여 왜관을 중심으로 한 중개무역적 성격이 희박해지자 사무역도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역활동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19세기 중엽에는 동래상인들 중 다수가 동래부의 각종 武任職이나 鄕吏職을 겸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1225) 金東哲,<『東萊府商賈案』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東萊商人-『東萊武任先生案』과의 비교->(≪韓日關係史硏究≫창간호, 1993), 134∼138쪽.

 다음의<표 1>은 일본측의 왜관 기록을 토대로 하여 헌종 10∼15년(1844∼1849) 사이에 일본과의 사무역에 참가한 조선의 상인들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都中이란 사무역에 참가하는 동래상고들이 결성한 조합을 가리키는데, 이 기간 동안 해마다 5명에서 7명 사이의 都中商賈들이 사무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五元(朴昌壽)과 乃維(崔周翰)의 연령이 50대에서 60대 중반인 것으로 보아, 일반 상인들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에 있었던 도중들은 당시로서는 노장층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그들은 수출입품의 구입과 판매를 직접 담당했다기보다는 다른 상인들과 여러 가지 형태로 협력 관계를 맺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또 내유와 子範의 거래 실적이 함께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동업자였을 것으로 보인다.1226) 乃維는 崔周翰으로 밝혀졌고(≪동래기영회140년사≫, 동래기영회, 1984), 子範은 允中 鄭五衛將의 아들인 것으로 드러났으므로(≪一代官每日記≫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846년 6월 23일;≪一代官每日記≫對馬歷史民俗資料館 宗家文庫 日記類 1817년 11월 7일·12월 28일), 이들은 친자나 형제 관계는 아닐 것이다.

      연도
都中(字)
헌종 10년 헌종 11년 헌종 12년 헌종 13년 헌종 14년 헌종 15년
1 乃維           1 (2)
乃維·子範         2
3 子範   5 (6)
4 聖愚(聖祐)   5
5 五元   5
6 汝心     4
7 宜汝     4
8 沖謙         2
9 汝行       3
10 永緝     4
11 子五(子伍)         2
12 子權           1
13 子雄         2
14 玉汝           1
   6  7  7  7  7 7  
연령
(세)
五元(朴昌壽) 64 65 66 67 68    
乃維(崔周翰) 49 50          

<표 1>開市에 참가한 都中(헌종 10년∼15년)

전거:
 ≪一代官每日記≫(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동래기영회140년사≫(동래기영회, 1984).
* 비고:
 ○ 표시는 왜관 출입과 거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
 ◎ 표시는 무역액이 공동 명의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한편 사무역에 참가하는 상인별로 무역규모가 달랐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예컨대 자범처럼 거의 매년 무역에 참여하는 상인들이 그렇지 못한 상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무역활동이 활발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도중들 중에서는 자범의 무역규모가 가장 컸다. 그는 동래와 全州·大邱(丘)·서울 등지를 오가면서 매우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폈던 것 같다.1227) 자범의 아버지인 允中도 약 30년 전에 도중으로서 대일무역에 참여했는데, 윤중도 당시 거래 실적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일본측은 파악하고 있었다(≪一代官每日記≫國史編纂委員會 所藏 對馬島宗家文書記錄類 1846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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