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1.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 1) 양반인구의 증가

1) 양반인구의 증가

 조선 후기사회는 有役下層民의 신분의 상향이동이 심화되었고, 그에 따라 양반·중인·상민·천인으로 구성된 신분구조에도 수치의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양반인구의 급증, 중인인구의 점진적 증가, 상민인구의 감소, 노비인구의 급감현상이 帳籍을 통한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된 점에서 확인된다. 여기에서는 장적상에 나타나는 양반인구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증가하고 있었으며, 수적 증가현상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후기사회의 신분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자료는 장적이다. 장적에 기재된 호주의 職役과 그 가족의 신분표시(처의 호칭, 率子의 직역)와 4祖직역, 그리고 그 가계 등은 군역의 유무, 신분 世傳의 유무, 身分內婚의 유무 등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신분을 판별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장적기록의 신뢰도에 관한 것이다. 즉 직역 및 부녀자의 호칭이 의도적으로 冒錄되거나 漏戶·漏口된 호구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록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착오가 아니라면 그 자체가 중세 해체기 사회변동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누호·누구된 한계가 있더라도 국가가 파악한 직역을 통해 당시 사회구성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양반인구의 증가현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조선 후기의 양반은 柳馨遠이 정의하였듯이, 문무반의 正職에 참여할 수 있는 大夫·士의 자손과 족당을 지칭하고 있다.001)柳馨遠,≪磻溪隨錄≫권 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 또한 양반은 士族의 존칭으로서002)朴趾源,≪燕巖集≫권 8, 別集 兩班傳. 사족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은 「관직에와 접근」과 「家系의 위신」에 의해 그 신분이 결정되거나 유지될 수 있었다.003)池承鍾,<身分槪念定立을 위한 試論>(≪한국고·중세사회의 구조와 변동≫,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11, 1988). 양반층의 일부는 과거나 蔭敍·代加의 혜택을 입어 實職 또는 散職을 얻음으로써 관직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無職·無蔭의 양반자손으로서 가계의 위신을 바탕으로 한 신분내혼이나 학행 및 재산(토지와 노비)을 겸함으로써 양반으로서의 품격을 지켜 나가기도 하였다. 장적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군역을 면제받아야 하고, 선후세대간에 양반신분을 세습이동해야 하며, 양반상호간에 신분내혼이 이루어져야 하는 등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양반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조건을 갖춘 양반의 직역은 前·現職官 및 帶品職者(가계 및 가족의 신분표시가 양반신분인 자), 進士, 生員, 及第,(士族)出身, 幼學, 忠義衛(18세기 중반까지), 業儒·業武(숙종 22년 이전) 등으로 파악되며, 부녀자에 있어서는 姓에 「氏」가 붙여진 경우가 양반으로 간주된다.004)李俊九,<朝鮮後期 兩班身分移動에 관한 硏究(上·下)>(≪歷史學報≫96·97, 1982·1983;≪朝鮮後期身分職役變動硏究≫, 一潮閣, 1993). 이러한 직역과 「씨」의 호칭을 가진 양반호주의 구성비는<표 1>의 단성현의 경우와 같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시기

지역
1678

 
1684
1690
 
1711
1717
 
1729
1732
 
1747

 
1759

 
1765

 
1783
1786
1789
1795
1798
 
1804

 
1825

 
1858
1861
 
1867

 
大 丘 府
大 丘 府
蔚 山 府
丹 城 縣
丹 城 縣
彦 陽 縣
彦 陽 縣



13.6


 
9.2
19.4




 



19.1

12.4
19.5
18.7

26.3



 

21.5




 



24.4


 


41.0



 
37.5


31.4


 

31.0



53.1
57.6


53.5



 




39.3

 
70.3




80.2
80.4

42.5
65.5



 

<표 1>각 지역별·시기별 양반호의 구성비 (단위:%)

*단 양반호주의 비율은 각 지역의 전체 호수에 대비한 것임.

 위의<표 1>에서 확인되는 바,005)이 표는 다음의 연구성과를 참조하여 만들었다.
四方博,<李朝人口に關する身分階級別的觀察>(≪朝鮮經濟の硏究≫3, 1938), 388∼389쪽.
金泳謨,<朝鮮後期의 身分構造와 그 變動>(≪東方學志≫26, 1981),<표 5>.
鄭奭鍾,<朝鮮後期 社會身分制의 崩壞>(≪大東文化硏究≫9, 1972),<도표 I>.
李俊九, 앞의 글(下),<표 14>.
井上和枝,<李朝後期慶尙道丹城縣の社會變動>(≪學習院史學≫23, 1985),<표 9>.
金錫禧,<18·19세기 戶口의 實態와 身分變動-新例 彦陽縣 戶籍大帳을 중심으로->(≪人文論叢 26, 釜山大, 1984),<표 Ⅳ>.
朴容淑≪朝鮮後期鄕村社會硏究≫(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86),<표 Ⅲ-5>.
양반호의 구성비는 각 지역과 연구자의 분류기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후대로 올수록 한결같이 증가하고 있다. 대구부의 경우 府內의 상이한 지역과 시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그 결과 전자는 숙종 16년(1690)부터 168년이 지난 철종 9년(1858)까지 61.1%(9.2%∼70.3%)가, 후자는 숙종 10년부터 183년이 지난 고종 4년(1867)까지 23.1%(19.4%∼42.5%)가 증가한 것으로 각각 파악하였다. 울산부의 경우에는 영조5년(1729)부터 138년이 지난 고종 4년까지 39.2%(26.3%∼65.5%)가 증가하였고, 단성현의 경우에는 숙종 4년부터 147년이 지난 순조 25년(1825)까지 25.7%(13.6%∼39.3%)가 증가하였다. 언양현의 경우 동일한 지역과 시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지만 양반신분을 분류하는 기준의 차이로 인하여 숙종 37년부터 150년이 지난 철종 12년까지 전자는 67.8%(12.4%∼80.2%)가, 후자는 60.9%(19.5%∼80.4%)가 증가한 것으로 각각 파악하였다. 이처럼 양반호는 후대로 올수록 한결같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양반호의 구성비는 대체로 17세기 후반에는 9∼19%, 18세기 전반에는 12∼26%, 18세기 후반에는 24∼57%, 19세기에는 39∼80% 정도의 분포를 보였던 것으로 단순화시켜 정리해 볼 수 있다.

  시기

지역
1678

 
1690

 
1717

 
1729
1732
 
1759

 
1765

 
1783
1786
1789
1804

 
1825

 
1858

 
1867

 
大 丘 府
蔚 山 府
丹 城 縣
丹 城 縣
丹 城 縣
鎭 海 縣


7.3


 
7.4




 


13.8
12.8

 
14.8
19.4



 


23.1


 

32.1



 
31.9

27.2
23.4

 

43.7



 




28.5
32.6
48.6




 

67.1



 

<표 2>각 지역별·시기별 양반인구의 구성비 (단위:%)

 한편 양반인구의 구성비를 보면 앞의<표 2>와 같다.<표 2>에서 확인되는 바,006)이 표 역시 四方博(위의 글, 411쪽), 鄭奭鍾(위의 글,<도표 Ⅲ>), 朴性植(<18세기 丹城地方의 社會構造>,≪大丘史學≫15·16, 1978,<표 3>), 朴容淑(위의 글,<표 Ⅲ-4>), 井上和枝(위의 글,<표 9>), 武田幸男(<19世紀鎭海縣の社會構造とその變動>,≪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學習院大 東洋文化硏究所, 1976,<표 5>)의 연구를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양반인구의 구성비도 각 지역과 연구자의 분류기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나타난 수치가 후대로 올수록 한결같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양반호의 경우보다 낮은 것은 전체 인구파악에서 率居奴婢의 개별 인신에 대한 파악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양반인구의 구성비는 대체로 17세기 후반에는 7%, 18세기 전반에는 13∼19%, 18세기 후반에는 23∼32%, 19세기에는 29∼67% 정도의 분포를 보였다.

시 기\직 역 帶品職 生進及
第出身
幼 學 忠義衛 業 儒
業 武
寡 婦
(氏)

(戶主數)
숙종 4년(1678)
숙종 43년(1717)
영조 35년(1759)
정조 10년(1786)
9.2
8.8
3.9
0.6
3.9
0.6
1.2
0.6
41.5
78.4
87.7
94.5
7.8
5.5

 
13.5


 
24.1
6.7
7.1
4.2
100(282)
100(477)
99.9(661)
99.9(953)

<표 3>단성지역 양반호주의 직역별 구성비 (단위:%)

 이러한 양반층의 급증현상은 유학의 수적 급증에 의한 것이었다. 위의<표 3>의 단성지역에서 확인되는 바,007)李俊九, 앞의 글(下),<표 18>참조. 양반호주의 직역별 구성비를 보면 숙종 4년부터 정조 10년(1786)까지 100여년 동안에 대품직(9.2∼0.6%), 생원·진사·급제·(士族)출신(3.9∼0.6%), 과부(24.1∼4.2%) 등은 감소한 반면에 유학(41.5%→ 78.4% → 87.7% → 94.5%)은 후대로 올수록 급증하고 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유학이 양반층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양반층내에서 유학호가 차지하는 이같은 점유율은 다음의<표 4>에서 확인되는 바,008)이 표는 四方博(앞의 글,<職役別列擧綜合表>), 李俊九(앞의 글,<표 18>, 井上和枝(앞의 글,<표 6>), 金錫禧(앞의 글, 377쪽), 朴容淑(앞의 글, 19쪽)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양반층의 급증은 유학의 급증에 의한 것임이 확인된다.

  시기

지역
1678

 
1690

 
1711

 
1717

 
1729
1732
 
1759

 
1783
1786
1789
1798

 
1825

 
1858

 
1861

 
大 丘 府
丹 城 縣
丹 城 縣
彦 陽 縣
彦 陽 縣

41.5


 
41.4



 



79.9
54.6

78.4


 
61.5



 

87.7


 
74.7
94.5


 



93.2
86.4


98.8

 
89.8



 



98.5
98.4

<표 4>각 지역별·시기별 전체 양반호 가운데 유학호의 점유율 (단위:%)

 18세기 이후부터 양반층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유학이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게 된 데에는 다양한 신분계층의 유학 호칭에서 비롯되었다. 즉 양반의 유학 재생산, 「忠義衛」에서 「유학」으로의 직역이동, 中人層(庶孼의 후손·吏族의 儒業者·額內校生·技術職中人·面任 등)의 「유학」 호칭, 그리고 유역 하층민의 冒稱幼學 등이 유학 급증현상의 주요 요인으로 주목된다.

 우선 양반의 유학 재생산에 의한 증가가 유학 급증현상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8·19세기에는 사족의 자손이 출생할 경우 「유학」 이외에는 달리 사용할 직역이 없었으며, 실제로 유학은 조선 말기까지도 사족 未入仕者의 직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유학은 양반지배층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직역이었다. 따라서 양반사족층은 유학을 재생산하고 있었으며, 장적상의 가계사례에서 확인된다.≪丹城鄕案≫과≪丹城縣戶籍大帳≫에서 확인되듯이 단성지역의 재지사족인 權金錫가계의 시기별 호주직역을 보면 숙종 4년에는 유학이 6호였는데 108년이 지난 정조 10년에는 42호로 증가하였다.009)李俊九,<朝鮮後期의 幼學과 그 地位>(≪民族文化論叢≫12, 1991;앞의 책, 148쪽),<표 5-6>참조. 이는 숙종 4년을 기준으로 할 때 정조 10년에는 700% 즉 7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양반의 유학 재생산에 의한 증가는 班村의 직역변동에서도 확인된다. 즉 大丘府月背面의 반촌인 上仁里의 경우, 유학호 점유율은 17세기 말에 16.7%, 18세기에 50% 안팎, 19세기 중반에 93.6%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으며, 丹陽禹 氏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였다.010)崔承熙,<朝鮮後期 幼學·學生의 身分史的 意味>(≪國史館論叢≫1, 國史編纂委員會, 1989), 95∼96쪽. 이러한 사례를 가지고 후대로 올수록 급증하였던 유학 증가현상이 마치 양반의 유학 재생산에 의해서만 증가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단성지역과 대구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재지사족의 사례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유학 재생산에 의한 증가도 유학 급증현상의 한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충의위에서 유학으로의 직역이동도 유학 급증현상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정훈공신 후손의 충의위는 면역할 수 있는 限代규정이 9대까지였다.011)≪續大典≫권 4, 兵典 免役.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훈공신인 興安君 李濟의 4세손인 李晁의 가계에서 흥안군의 9세손 34명 가운데 충의위는 단 1명뿐이고 27명이 역의 부담이 없는 유학으로 직역을 이동시키고 있다. 역시 흥안군의 5세손 李賀生의 가계에서 흥안군의 7세손 3명은 모두 충의위였다. 그러나 8세손은 8명 가운데 通德郎이 3명, 충의위가 1명, 유학이 4명이었으며, 9세손은 11명 모두 유학이었다.012)李俊九, 앞의 글(下), 23쪽,<표 30>및 앞의 책, 150쪽,<표 5-7>참조. 따라서 정훈공신 후손들이 충의위에서 유학으로 직역을 이동시켜 유학을 재생산함으로써 유학의 수적 증가에 보탬이 되었다.

 유학 급증현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얼 후손의 「유학」 호칭이다. 17세기 말 업유·업무가 서얼의 문·무를 지칭하게 된 이후 서얼의 후손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왕명에 의하여 「유학」 호칭이 합법화되었다.013)李俊九,<朝鮮後期의 業儒·業武와 그 地位>(≪震檀學報≫60, 1985). 즉 숙종 34년(1708)의 傳敎에는 “자신이 서얼인 자(親庶孼)만 업유·업무라 칭하고 업유·업무의 아들이나 손자는 유학으로 기록하여도 무방하겠다”고 하였다.014)≪新補受敎輯錄≫, 戶典 戶籍. 이로 인해 친서얼이 아닌 서얼의 후손은 유학 호칭이 가능하였다. 이는 장적에 반영된 가계사례에서 명확히 확인되는데,≪단성현호적대장≫에서 산견되는 몇 건을 참고하기로 한다. 즉 업유·업무의 서얼 직역화 이전인 숙종 4년 장적에서 충의위 李蓍國의 良妾子인 李胤元은 서얼이기 때문에 ‘許通免講’을 직역 대신에 기록하였으나 영조 5년(1729) 이후에 그의 후손들은 모두 직역을 「유학」으로 기록하였고, 學生 權克益의 庶子 ‘許通校生’權鋈과 權錃의 후손들도 숙종 43년 이후에 직역을 모두 「유학」으로 기록하였으며, 숙종 43년 장적에서 유학 權德亨의 서자 大均과 賤妾子 大得은 양반의 「親庶孼」이기 때문에 직역을 업유로 기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영조 26년 이후 직역을 모두 「유학」으로 기록하고 있었다.015)李俊九, 앞의 책,<표 7-3>·<표 7-4>·<표 5-8>참조. 이처럼 18세기 전반부터는 서얼 후손들이 합법적으로 유학을 호칭하게 되었고, 이들 유학들이 유학을 재생산함으로써 유학의 수적 증가를 가져온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8세기 이후부터 서얼 후손의 유학 호칭은 물론이고, 지역에 따라서는 吏族의 儒業者들도 유학을 호칭하였다. 즉 영조 5년에는 경상도관찰사 朴文秀에 의해 향리자손들도 「유학」의 칭호를 써도 좋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 뒤 영조 26년에는 유학의 칭호문제가 다시 거론되었으나, 부사 元景淳에 의해 또한 유학으로 쓰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016)≪安東鄕孫事蹟通錄≫附錄 참조.
李勛相,≪朝鮮後期의 鄕吏≫(一潮閣, 1990), 90∼91쪽.
이로써 안동의 鄕孫儒業者는 유학을 호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에는 액내교생과 기술직 중인, 면임도 유학을 호칭함으로써 유학의 수적 증가에 보탬이 되었다. 교생의 경우, 헌종 9년(1843)의<求禮鄕校 西齋案>序文에 명시된 바에 의하면, 향교의 서재유생인 교생은 신분적으로는 중인으로 처신하였지만 장적에서는 유학으로 기재하였다.017)全羅南道 編,≪全南의 鄕校≫(1987), 121쪽.
任敏赫,<朝鮮後期의 幼學>(≪淸溪史學≫8, 1991), 141쪽.
기술직중인의 경우, 철종 2년(1851)에 일어난 기술직 중인의 通淸운동자료인<辛亥閏八月十八日 景陵幸行時上言草>에 의하면, 이 상소운동에는 유학 金允洙 등 1,872명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018)韓永愚,<조선후기 ‘中人’에 대하여 -哲宗朝 中人通淸運動 자료를 중심으로->(≪韓國學報≫45, 一志社, 1986), 69∼70쪽. 그들 기술직 중인들은 스스로 「유학」을 칭하고 있었다. 면임의 경우, 고종 6년(1869) 8월 16일의 경상도 固城縣 春元面에서 幼學錢 收捧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을 때 관련된 「執綱幼學 金鍾律」도 면임으로서 유학을 호칭하였다.019)鄭奭鍾,≪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244쪽.
≪慶尙監營啓錄≫, 고종 8년 12월 참조.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17세기 말에도 확인되지만, 18세기를 거쳐 19세기로 오면서 유학층 증가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모칭유학이 증가하게 된 데에는 신분직역제를 바탕으로 운영된 군역제의 동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조선 후기 양역화된 군역은 유역 하층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가중하게 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천한 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곧 유역 하층민이 군역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避役현상을 유발케 하였고, 피역하는 최선의 방법은 신분을 변동시키는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無役閑遊하는 「유학」을 모칭하여 양반신분으로 변동시키는 것이었다. 영조 즉위년에 尹會는, 軍保子支로서 조금 형편이 좋고 재력이 있으면 璿派·勳族을 모칭하거나 공신후예로 투속하거나 式年戶籍에 유학을 모칭하는 것은 모두 천한 역을 모면하고자 한 것임을 지적하였으며,020)≪承政院日記≫575책, 영조 즉위년 10월 3일. 정조 10년(1786)에 柳漢坤은 민호 가운데 조금 富實한 무리들이 奸吏와 결탁해서 유학을 모록하고 양역을 벗어나고 꾀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021)鄭奭鍾, 앞의 글, 291쪽.
≪正祖丙午所懷謄錄≫참조.
이는 곧 유역 하층민이 경제적 부력만 조금 있으면 籍吏와 결탁하여 장적상에서 직역을 유학으로 변동시키고, 그 결과 천시하는 군역도 탈피하고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모칭유학은 얼마간이나마 경제적 부력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진행된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장적에 반영된 가계사레에서도 명확히 확인된다. 즉 다음<표 5>의 가계사례에 의하면022)≪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上(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79쪽. 第1統 5戶의 호주인 ‘砲保 朴白日’과 그 후손들을 이 대장 상·하에서 조사하여 만든 가계사례이다. 숙종 4년 식년호적에는 호주 朴白日과 그의 부·조·증조가 모두 軍保(砲保·水軍·步兵)를 직역으로 한 유역 하층민이었으나, 숙종 43년 신년호적에는 호주 順哲·善發과 그들의 부가 모두 납속품계(納折衝將軍·納通政大夫·納嘉善大夫)로 직역을 변동시켰다. 이는 납속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경제력은 그들 후손의 신분직역을 상승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교생·업무 등 중인직역과 양반직역인 유학을 왕복하면서 지위의 격상·격하를 거듭한 것은 적리와의 作奸 여부에 따라 좌우되었다. 이러한 가계사례에서 본 직역변동 추세는 상민직역에서 납속할 수 있는 경제적 부력을 바탕으로 적리와의 결탁에 의해 가능하였으며, 중인직역을 거쳐 유학으로 상승이동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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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冒錄幼學 家系事例(密陽朴氏)
<표 5>冒錄幼學 家系事例(密陽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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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양역변통 논의의 맨 나중 형태인 均役法이 시행되던 18세기 중반부터는 군포부담이 상민층에만 한정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양반층과 중인층은 합법적인 면역층이 된 반면에 상민층은 「천한 역」으로 인식된 군역을 전담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원래 良役價를 줄이고 歇役으로의 투속으로 인한 役弊를 제거하려던 균역법은 결국 그 의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민의 부담만 늘리고 있었다.023)鄭演植,<17·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韓國史論≫13, 서울大 國史學科, 1985), 180쪽. 그리하여 유역 하층민의 과중한 군포부담은 피역을 도모하려는 「모칭유학」을 더욱 유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장적의 법제와 사회기강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정조 22년에는 기강이 무너져 군역이 「덫(擭)」과 「함정(穽)」에 비유됨으로써 백방으로 뇌물을 바쳐 피역을 시도하였는데 모칭유학이 피역의 한 방편이 되었다.024)≪備邊司謄錄≫188책, 정조 22년 11월 30일. 이러한 기강의 문란은 군역제의 동요와 더불어 사회신분제의 동요를 가속화하였고, 이에 따라 모칭유학의 증가도 더욱 확대되어 갔다. 정조 21년에는 농사꾼이나 軍丁의 자식들과 면천한 奴들도 유학을 칭하며 외람되이 科場에 나왔다고 한 것이나,025)≪正祖實錄≫권 47, 정조 21년 10월 정미.정조 22년에 비변사에서 왕에게 “군정을 뽑는데 빈 이름만 실리는 폐단은 진실로 장적의 가호에 유학이 많고 良人이 적기 때문임”을 아뢰고 있는 것을 보면,026)≪備邊司謄錄≫188책, 정조 22년 10월 10일. 18세기 말에는 모칭유학의 수적 증가와 함께 장적상에서 유학층 점유율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도 군역을 「무서운 질병(악질)」과 같이 여기고 軍籍을 「귀신대장(귀부)」처럼 봄으로써027)≪純祖實錄≫권 17, 순조 14년 2월 무오. 군역 도피자가 속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학모칭자를 색출하여 군역에 충정하려는 일련의 조처들이 고종년간까지도 계속되었다.028)≪備邊司謄錄≫256책, 고종 12년 12월 23일. 이는 결국 모칭유학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엽이 되면 유학을 모칭하여 면역을 도모하는 것이 통용되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되었으며029)≪備邊司謄錄≫243책, 철종 7년 정월 16일. 군사대장이 빈 문서가 될 정도로030)≪高宗實錄≫권 12, 고종 12년 12월 21일. 모칭유학의 수적 확대가 크게 진행되어 갔다. 19세기 장적상에서 유학 점유율이 높은 것은 곧 이러한 사정이 장적에 반영된 것이며, 특히 이 시기 대구부 월배면의 상민촌인 월배리의 유학호 점유율의 변화(22.2% → 66.7% → 83.3%)는031)崔承熙, 앞의 글, 97쪽. 곧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19세기의 장적상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점유하고 있었을까. 이는 순조 32년(1832)의≪晋州鄕校修理時物財收集記≫에 보이는 儒戶(유학호)의 구성비와 19세기의 장적에 보이는 유학호의 구성비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유호인 元儒와 別儒는 모두 「유학」을 직역으로 하고 있었으므로032)≪晋州鄕校修理時物財收集記≫(奎章閣圖書 No. 7156)의 都合 집계에서 元儒의 경우 “已上 幼學 2,076戶”, 別儒의 경우 “已上 幼學 2,746戶”라는 기재 사실에서 확인된다. 유학의 자체 구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수집기≫는 진주향교 수리를 목적으로, 府內 거주호에게 일정한 부과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인데 유호의 점유율은 23.8%, 그 가운데 원유호와 별유호는 각각 11.5%, 12.3%로 집계되었다. 원유는 토착·전통적인 지배신분층, 별유는 신분상승 혹은 後來移住로 지배신분층 하부에 첨입된 유호로 각각 파악되었다.033)李海濬,<朝鮮後期 晋州地方 儒戶의 實態>(≪震檀學報≫60, 1985), 93쪽. 이로 볼 때 유학 호칭이 합법화되었던 서얼 후손을 비롯한 중인층의 유학 호칭자들은 별유로 구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당시 사료에서 산견되는 ‘庶孼儒生’·‘西齋儒生’이란 표현에서도 방증된다. 그리고 이≪수집기≫에는 유호 23.8% 외에는 모두 민호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원유호와 별유호를 합쳐 양반으로 간주되는 유호가 23.8%에 불과하다면, 19세기 같은 시기 장적상의 유학호의 점유율이 40%∼70% 정도와 대비할 때 「모칭유학」이 될 나머지 16.2%∼46.2%가 현실적으로 유호나 양반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034)李泰鎭,<朝鮮後期 兩班社會의 變化-신분제와 향촌사회 운영구조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165쪽. 그렇다면 19세기 전반 장적상의 유학호의 절반 내지 그 이상은 모칭유학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9세기 전반 향촌사회에서 실제 양반층으로 간주되는 양반은 대체로 23% 안팎으로 이해되며,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16%∼46%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들 모칭유학을 국가는 良丁확보와 관련하여 모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향촌사회에서도 원유·별유와 같은 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군역징발의 기본대상이라 할 수 있는 관찬문서인 장적에서 기존의 양반사족층과 직역명을 동일하게 함으로써 관이 묵인하는 실질적인 면역층이 되었으며, 조금의 경제적 부력을 바탕으로 적리와 결탁할 수 있을 정도의 처지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후반 戶布에 대한 규정 이후에는 모칭유학들이 곧장 儒鄕子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이와 처지가 비슷한 벗으로 교제하려고 할035)≪高宗實錄≫권 20, 고종 20년 10월 4일. 정도의 지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양반인구의 증가는 유학의 수적 증가에 의한 것이었고, 유학이 수적으로 증가하게 된 데에는 양반사족의 유학 재생산, 충의위에서 유학으로의 직역이동, 종래 중인층의 유학 호칭, 그리고 모칭유학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특히 서얼 후손의 합법적인 유학 호칭과 비합법적인 모칭유학이 주요 변수였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양반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학에는 원래의 양반신분도 있고 중인·상민신분도 있게 되어 신분의 혼효현상을 초래하였다. 합법 및 비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유학의 수적 증가는 아직도 신분제적 장치나 관념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036)李泰鎭, 앞의 글, 165쪽. 신분적 특권이 배제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중세적 속성이 강했던 것으로도 이해된다.037)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構造의 변동>(≪丁茶山과 그 時代≫, 民音社, 1986), 79쪽. 그러나 한편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유학층 내부의 신분혼효와 더불어 반·상간의 신분적 격차를 좁히고 있었으며 신분과 직역이 일치하지 않게 됨으로써 신분직역제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기 유학의 수적 증가가 지닌 이러한 양면성은 곧 중세 해체기 사회변동의 실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사발전의 계기적 측면에서 볼패, 사회경제적·법제적 변동에 편승한 유학의 수적 증가는 신분직역이 상향조정되면서 상향 평등화의 방향으로 신분직역제가 해체되어 가던 사회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중세 몰락의 주요 징표의 하나가 중세적 신분질서의 해체라고 한다면 바로 유학층의 신분혼효 및 신분직역의 상향 조정은 신분상승을 통한 신분직역제의 해체로 연결되며, 동시에 중세 불평등사회에서 근대 평등사회로 이행하는 중세 해체기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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