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1. 양반층의 증가와 분화
  • 2) 면역인구의 증가

2) 면역인구의 증가

 조선 후기의 군역은 전기와는 달리 양반층이 군역편제에서 빠져나감으로써 특정한 신분층에게만 그 역을 부과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역의 유무는 반상을 구분하는 주요한 징표의 하나였다. 반상으로 구분할 때 양반층은 역의 부담이 면제되고 상민은 역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역은 상민(양민)층이 담당하는 신역으로서의 良役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역이 없이 한유하던 신분층은 양반층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중인층이 형성되면서 중인층도 일시적인 면역 및 헐역으로 한유하고 있었다. 헐역의 경우도 직역에 따라서는 신분상승의 통로로 이용되었고 實役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며, 규정 외에 免軍者 또는 遊戶 내지 無役閑遊者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면역층은 양반과 중인신분층을 포괄하고 있으며, 양반층과 중인층 인구의 증가는 곧 면역인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양반층과 중인층의 직역을 통해 면역인구의 증가현상을 추정하기로 한다.

 양반층은 조선 후기의 양역화된 군역편제에서 빠져 나감으로써 屬處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면역의 특권을 누리면서 한유하는 것이 인정되고 있었다. 양반층의 군역 기피현상은 軍籍收布制가 실시되던 16세기 후반부터 일반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布納化 이후 군역부담에서 수반되는 여러 특권과 권리가 상실되고 납포의 의무만 남게 된 군역 자체의 질적 저하에 있었다.038)陸士 韓國軍事硏究室,≪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後期篇(陸軍本部, 1968), 3∼18·88∼132쪽 참조. 역제 자체의 질적 저하는 양반층의 군역이탈을 유도하게 되었고, 군역이탈로 인해 양반층은 속처가 없어 무역으로 한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조 2년(1624)에 崔鳴吉이 “백성들은 모두 속처가 있는데 중간에 양반이라 칭하는 자들이 무역으로 한유”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나,039)≪仁祖實錄≫권 6, 인조 2년 5월 임오. 철종 13년(1862)에 三政釐整廳이 “中外의 士庶가 5衛 안에 소속되었으나 5위가 혁파되고 5軍營이 설치되면서 士族은 군영에 예속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040)≪增補文獻備考≫권 110, 兵考 2-20. 등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양역화된 군역편제에 소속하지 않음으로써 무역으로 한유하게 되었던 양반층은 “글을 알지 못하는 자라도 모두 幼學이라 일컬어서 일생을 한유한다”거나,041)≪英祖實錄≫권 56, 영조 18년 9월 경진. “百代가 지나도 군역에 충정될 걱정이 없다”042)丁若鏞,≪與猶堂全書≫1, 詩文集(1집 14권), 跋顧亭林生員論.고 할 정도로 그들의 면역의 특권이 양반 모두에게 세습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그들의 절대 다수가 「유학」을 호칭하면서 면역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층의 면역은 중인층에까지 피역현상을 유발케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예컨대, 현종 5년(1664)에 전현감 池遇龍이 “근년 이래로부터는 忠順·忠翊·忠贊·定虜·武學 등 諸衛의 역이 終年토록 한유하고 겨우 正木 2疋만 들이니 水·陸·砲保의 실역에 비하면 한가롭고 헐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였지만, 사족자제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고 중인·서얼에 이르러서도 또한 다 싫어하고 기피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中人輩에 있어서는 과분한 직역임”을 언급한 기사나,043)≪承政院日記≫186책, 현종 5년 11월 8일. 영조 원년(1725)에 원주유학 李藎芳이 “武學·軍官·旗牌官의 三廳은 대개 中庶人들에게 상당하는 역이었지만 중년 이래로 평민의 부호자가 모속함으로써 중서인은 점차 빠져 나와 한유하였다”는 기사044)≪承政院日記≫588책, 영조 원년 3월 12일. 등에서 확인되는 바, 사족은 물론이고 중인도 실역과 달리 한헐하던 제위와 무학·군관·기패관 등 중인층의 직역을 기피하여 빠져 나감으로써 소속된 바가 없어져 무역으로 한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한유하고 있던 중인층의 범위는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더욱 두터워지고 복잡해져 갔다. 17세기 중엽의 실학자 유형원이 ‘得參官序’와 ‘校生之類’를 ‘俗稱中人’또는 ‘閑散方外’045)柳馨遠,≪磻溪隨錄≫권 9, 敎選之制 上 鄕約事目條 참조.라고 지적하였듯이, 중인은 종래 중앙의 고급 기술관원을 의미하는 용어에서 이제 ‘한산방외’곧 지방의 한유자도 포함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한산은 17세기 중엽에 이미 반상의 중간존재인 중인신분층으로서의 집단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8세기 전반기의 실학자 李重煥도 ‘方外閑散人’을 서얼·장교·역관·산원·의관과 함께 중인층으로 분류하였다.046)李重煥,≪擇里志≫, 總論. 이들 중인층의 직역은 중앙의 고급 기술관원과, 일시적인 면역 또는 헐역으로 한유하던 반상의 중간계층 직역자 즉 庶族의 유직자 또는 한산층으로 간주되는 충찬·충순·충익·충장·정로 등 제위(17세기 중반 이후)와 교생·무학·(常)출신·군관·한량·기괘관과 충의위(18세기 후반 이후), 업무·업유(숙종 22년 이후) 등의 다양한 직역을 포괄하고 있다.047)李俊九, 앞의 책, 32쪽,<身分別 職役의 分類 基準表>참조. 이러한 직역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中庶로 표현되는 중인층에게는 「과분」하거나 「상당」하는 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들 직역은 일시적 면역 또는 헐역으로 한유하였기 때문에 유역 하층민들의 피역과 아울러 신분상승을 도모하기 위한 사다리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인층은 사회의 진전에 따라 점차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상민층의 신분향상자(欲爲中人者)로서의 한유자층048)鄭萬祚,<均役法의 選武軍官>(≪韓國史硏究≫18, 1977).이 증가하면서 중인층 범위가 더욱 두터워지고 복잡해져 갔다.

 이들 중인층의 직역자들은 규정 외의 면군자, 일시적 면역자, 漏籍된 한유자 등으로 존재하면서 한유하고 있었다. 충익·충장·업무·업유·무학 등은 인조 6년(1618)에 규정 외의 면군자로,049)≪仁祖實錄≫권 19, 인조 6년 12월 신묘. 효종년간에도 한량·출신·업무·무학 등은 모두 신역이 없는 자로 인식되었다.050)≪備邊司謄錄≫18책, 효종 7년 9월 2일.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 현종년간에도 충순·충익·충찬·정로·무학 등 제위의 역이 종년토록 한유하였다. 이들 제위는 국가가 왕실족친 및 국가에 공적이 있는 공신·관료·戰亡人 등 유공·유음의 자손들에게 공로에 보답하는 의미로 설립하여 그 성분에 따라 소속시킨 宿衛兵種이었다. 따라서 제위속들은 일정한 특권을 보장받으면서 궐내외 分番入直을 주임무로 하였는데, 입속할 수 있는 代數와 代盡 이후 정역을 규정함으로써 면역할 수 있는 대수가 3∼9대로 한정된 일시적 면역자로 존재하였다.051)李俊九,<朝鮮後期의 諸衛屬과 그 地位變動>(≪朝鮮史硏究≫1, 伏賢朝鮮史硏究會, 1992;앞의 책) 참조. 그리고 조선 후기에 한산이란 용어는 다양하게 쓰였는데, 무역무직의 한유자로서의 한산은 軍案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입적하지 않은 한량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으며 속처가 없이 적에서 빠진 한유자로 존재하였다.052)李俊九,<朝鮮後期의 閑良과 그 地位>(≪國史館論叢≫5, 1989;위의 책) 참조. 이들 한산은 숙종 16년(1690)에 서얼과 함께,053)≪備邊司謄錄≫44책, 숙종 16년 3월 21일. 숙종 37년에는 사족·품관·군관·교생과 함께 한유하는 무리임이 지적되고 있다.054)≪肅宗實錄≫권 50, 숙종 37년 8월 갑술.

 이러한 제반 한유자는 양역변통론의 전개 당시 遊戶布論의 대상자인 「유호」로 파악되고 있었다. 숙종 40년에 宋相琦는 각 읍의 호를 役戶와 遊戶로 나누고, 유호는 곧 사부·유생·제반 무역한유자로서 그 명목이 많아 위로는 朝官으로부터 아래로는 土品·校生·軍官까지를 유호의 범위로 하고 있다.055)≪肅宗實錄≫권 55, 숙종 40년 9월 계해. 이는 양반은 물론이고 교생·군관 등 제반 무역한유자를 모두 포괄하고 있어 증인층의 직역도 면역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역변통 논의의 최종 형태인 균역법을 시행할 때에는 중인충의 합법적인 면역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056)金盛祐,<17·18세기 前半 閑遊者層의 증가와 정부의 대책>(≪民族文化硏究≫25, 1992) 참조. 選武軍官은 전체 한유자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산 즉 한량 가운데에서도 그 일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한량은 양반·중서·양민 등의 신분을 포괄하고 있는데,057)李俊九, 앞의 책, 124쪽. 선무군관의 대상을 한량 가운데에도 軍保로 하기에는 아까운 존재058)≪萬機要覽≫財用篇 3, 軍官布.로 제한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바, 중인층의 직역은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의 면역층은 양반과 중인 신분층을 포괄하고 있다. 양반층은 양역화된 군역편제에서 빠져 나감으로써 면역의 특권을 누리면서 한유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이들의 면역은 중서로 표현되는 중인층에까지 피역현상을 유발케 하였다. 중인층은 그들에게 「과분」하거나 「상당」하는 직역에서 이탈하여 속처 없이 누적시켜 한유하거나 중인직역을 유지함으로써 일시적 면역 내지 헐역으로 한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반 한유자는 양역변통론의 전개 당시 유호포론의 대상자인 「유호」로 파악되기도 하여 면역층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18세기 중엽 균역법 시행 이후부터는 중인층의 직역자까지도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는 존재로 합법화되었다.

 양반층은 물론이고 중인층도 면역층이 됨에 따라 군역은 상민층만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군역은 부세로서의 측면이 강화되었으므로 상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과중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천한 역」으로 인식되면서 상민의 피역현상을 유발케 하였다. 상민이 피역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영조 즉위년에 윤회가 지적한 바, 유역 하층민이 천한 역으로 인식된 군역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을 보면 “軍保子支로서 조금 형편이 좋고 재력이 있으면 혹은 國姓支派를 칭하고, 혹은 名賢子孫을 칭하고, 혹은 姓字를 따라서 오래된 공신의 후예로 투속하여 忠義帖을 얻기를 바라고, 혹은 式年戶籍에서 그 4祖의 이름과 役名을 고쳐서 유학을 모칭하니 이는 모두 천시하는 군역을 모면하고자 하는 꾀”임을 밝히고 있다.059)≪承政院日記≫575책, 영조 즉위년 10월 3일. 또한 영조 10년에 李濟가 良丁을 얻기 어려운 이유로서 지적한 피역처는 “첫째는 감·병영의 牙兵·守堞 등 군관, 둘째는 영장·수령의 액외군관, 셋째는 향교의 교생과 서원의 募入, 넷째는 각읍 향청·관속의 差備, 다섯째는 대왕·공신자손으로 冒屬, 여섯째는 유학·업유를 모칭, 일곱째는 私賤을 가칭하거나 양반집에 투속, 여덟째는 누적하여 한유” 등이었다.060)≪承政院日記≫791책, 영조 10년 12월 10일. 이처럼 유역 하층민은 선파·훈족을 모칭하거나 호적에 모록하기도 하고 각급 관청의 私募屬에 투속하기도 하여 유학·업유·충의위·교생·군관 등을 모칭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함께 피역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며, 호적에서 빠져 나가 한유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분을 격하시켜 사천이 됨으로써 피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각종 재원확보를 위해 시행하였던 納粟政策에 따라 납속품직을 취득한 유역 하층민의 납속수첩자들도 피역하고 있었다. 숙종 30년(1704)에 이조판서 李濡는 賣爵募粟의 경우 수첩자 본인만 한유하게 하여 원래 군역을 면제하는 일이 없었는데, 병진(숙종 2년)년간에 군역을 면제하는 예가 처음 시행되었으나 지금 그 폐단이 없지 않으므로 군역을 부담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061)≪增補文獻備考≫권 121-124, 兵考 13-16. 영조 5년(1729)에 특진관 李森은 納粟加資한 무리들이 호적에 「납속」의 두 자를 붙이지 않고 품계만을 기록함으로써 피역을 조장하는 폐단을 이야기하였다.062)≪備邊司謄錄≫8책, 영조 5년 5월 7일. 이로 보면 납속수첩자는 면역의 혜택이 자손에게까지 근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수첩자 본인만 한유하거나 호적에 납속이란 단서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피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수첩자 본인에게 한정되었더라도 납속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유역 하층민의 납속수첩자는 품직을 취득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피역을 도모하였고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간에 실제 피역하여 한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역 하층민은 사모속과 契房을 통해서도 고역을 피하여 헐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사모속은 각 관청의 운영경비 염출을 위한 재정적인 이유에서 운영되었는데, 유역 하층민들은 苦役·疊役·賦役 등을 피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와 제한된 부분에서나마 부농층에 의해서 신분상승의 통로로 이용하려 했던 사회적인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모속에 투속하였다. 사모속의 역종 가운데 대부분은 고역 등을 기피하여 헐역에 투속하고 있지만, 중앙의 군영과 지방의 각 감·병영, 향교나 서원 등에 투속하고 있는 초관·기패관·군관·교생·원생 등 일부는 부농층에 의해서 신분상승의 통로로도 이용되었다.063)金友哲,<均役法 施行 前後의 私募屬 硏究>(≪忠北史學≫4, 1991) 참조. 그리고 18세기 초 민과 지방관청의 결탁으로 설치된 계방도 사모속이 성행되었던 상황 속에서 조금이나마 역의 부담을 덜기 위한 피역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촌락 전체가 사적으로 지방관청에 사속하는 계방촌은 18세기 중반 균역법의 실시 이후 급속하게 늘어났다.064)19세기 삼남지방에서 계방가입촌의 비율은 지역에 따라 27.0% ∼ 57.8%에 이르렀다고 한다(金炯基,<조선후기 契房의 운영과 부세수취>,≪韓國史硏究≫82, 1993).

 이처럼 상민층이 군역으로부터 탈출하여 피역하는 현상은 적극적인 방법으로서의 신분상승과 소극적이지만 헐역처인 각 기관에 투속하는 방법이었다.065)金容燮,<軍役制의 動搖와 軍役田>(≪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一湖閣, 1975).
鄭演植, 앞의 글.
金炯基, 위의 글.
이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간에 부력만 있으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전자는 군역제가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므로 피역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후자의 경우도 사모속의 일부는 부농층에 의해서 신분상승의 통로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사모속의 대부분은 그들의 역가가 헐하고 역명이 천하지 않았으므로 그 수적 증가를 초래하였지만 계방촌과 더불어 유역 하층민의 신분변동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신분변동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던 사모속의 대부분과 계방촌과는 달리 중인직역에 투속하거나 양반직역을 모칭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함께 피역을 도모하였던 유역 하층민의 모속·모칭자는 어느 정도 되었는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해 가고 있던 이들 모속·모칭자의 수는 당시 사료에 나타난 산발적인 언급들에서 많은 수가 확인된다. 유학의 경우, 숙종 10년(1684)에 湖南道臣이 備局에 보고한 장계에 의하면, 중인·얼속·군보자지 등 잡류의 모칭 유학자가 5,9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066)≪肅宗實錄≫권 15, 숙종 10년 7월 정묘. 이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경상도지역의 장적에서도 상당수의 모록유학이 확인되고 있어 거의 전국에 걸쳐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교·원생의 경우, 숙종 21년에 배천〔白川〕지방의 액외교생수가 450명이나 되었으며,067)≪備邊司謄錄≫49책, 숙종 21년 11월 22일. 숙종 37년에 羅州지방의 교생 원액은 90명에 불과했으나 액외교생이 5,000명을 넘는다고 했으며, 定州지방의 액외교생이 거의 10,000명에 이른다고 했고,068)≪備邊司謄錄≫63책, 숙종 37년 10월 28일. 숙종 45년에는 각 읍의 교생·원생에 모속하여 한유하는 자가 많을 경우 한 고을에 4∼500명에 이른다고도 했다.069)≪肅宗實錄≫권 64, 숙종 45년 8월 병진. 이처럼 교·원생의 액외에 모속한 자가 고을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 심지어 10,0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군관·장교의 경우, 남한산성의 수첩군관은 숙종 18년 당시 4,500명 정도였는데, 숙종 30년에는 5,590명으로 불어났고, 이 때 군제개편과정에서 2,861명이나 감축시켰지만, 그 뒤로도 모속자는 계속 이어져 영조 18년(1742) 壬戌査正 때에 적발해 낸 모속자는 1,370명에 이르렀다. 외방의 군관들 중에는 숙종 16년에 平安道都事에게 소속된 收布군관이 600여 명이나 되었고, 숙종 39년에 木 1필을 바치는 除番군관을 새로 만들어 내어 대읍에는 수천 명의 제번군관이 있었다.070)鄭演植, 앞의 글, 129∼134쪽. 숙종 37년에는 황해도의 경우 1필역의 감영군관 등의 명색이 7만여 명을 넘는다고 하였다.071)≪備邊司謄錄≫62책, 숙종 37년 5월 20일. 이 밖에도 사모속에 투속하고 있는 在家군관·假率군관·閑良군관·轉餉군관 등 다양한 명색의 군관들이 있다. 그리고 河東府에서는 避役將官이 56명, 都訓導가 30명이나 되었으며,072)金容燮, 앞의 책, 222쪽. 각 읍 기패관·把摠官·군관의 무리가 한번 이름을 얻으면 종신토록 한유하므로 사실 피역양정의 소굴이 되었다.073)≪備邊司謄錄≫154책, 영조 46년 윤 5월 23일. 제위의 경우도 충의위·충익위·충장위 등이 유역 하층민의 피역하는 소굴로 지적되고 있으며,074)≪備邊司謄錄≫52책, 숙종 28년 3월 17일 및 79책, 영조 2년 5월 5일.
≪正祖實錄≫권 5, 정조 2년 정월 신미.
무과출신자의 경우 숙종 2년 萬科 시행으로 한꺼번에 14,000여 명이 배출되어075)≪肅宗實錄≫권 5, 숙종 2년 4월 을축. 한유하고 있었다.

 납속수첩자의 경우, 숙종 16년에는 정부에서 진휼곡 모집을 위하여 2만 장의 공명첩을 발부하여 8도에 나누어 許賣076)≪肅宗實錄≫권 32, 숙종 16년 11월 정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조 7년(1731)에는 8,000장, 이듬해에는 6,100장, 영조 38년과 39년에는 12,300장을 각 도에 분송·발매하였고,077)徐漢敎,<17·18세기 納粟策의 實施와 그 成果>(≪歷史敎育論集≫15, 1990) 참조. 영조 5년에는 납속가자의 무리가 호적 중에 납속 두 자를 붙이지 않고 품계만을 기록함으로써 응역하지 않은 까닭으로 한 洞으로 말하면 수백 호 가운데 출역자는 10여 호에 불과한 것078)≪備邊司謄錄≫8책, 영조 5년 5월 7일. 등에서 많은 수의 피역한유자가 존재하였음이 짐작된다.

 이처럼 다양한 피역현상은 양정의 부족을 초래했고, 이는 제반 역폐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교생의 考講, 군관의 試才, 호적嚴査 등을 통해 모속자를 양역에 충정시켰으며, 또 한편으로는 장기간에 걸쳐 대대적인 규모로 모속자를 조사하여 드러내기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책은 항상 임시적인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079)鄭萬祚, 앞의 글.
鄭演植, 앞의 글.
金盛祐, 앞의 글.
경제력이 우세한 富實者는 호적에 양반신분을 나타내는 유학을 모록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양반과 상민의 중간존재인 중인이라 하여 상민과 구별짓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피역하고 있는 閑丁이 아니라 중서와 같은 한산으로서 양반이나 중서가 면역되고 있는 실정에서 당연히 그들도 면역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080)鄭萬祚, 위의 글, 87쪽.

 조선 후기에는 군보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한 신분상승과 피역은 전혀 불가능하였으며, 피역하고 있는 한정들도 합법적인 면역은 불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권내의 양반 및 중인 직역에 투속함으로써 신분상승과 아울러 합법적인 면역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군역징발의 기본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적상에서 기존의 양반 및 중인들과 직역명을 같이함으로써 관이 묵인하는 실제적 면역층이 될 수 있었다. 장적에서 확인되는 면역층은 전현직관·생원·진사·출신·유학·제위속·업유·업무·교생·원생·군관·기패관·도훈도·호장·기관·납속수첩자 등 직역자들을 포괄하고 있는데, 이들이 곧 양반 및 중인층의 직역이며 이들의 수적 증가는 곧 관이 묵인하는 실제적 면역인구의 증가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면역인구는 제도권내의 양반과 중인 직역자를 대상으로≪丹城帳籍≫을 통해 그것의 증가현상을 파악하기로 한다. 장적을 이용한 파악은 그것이 호구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역의 유무를 반영하고 있는 직역을 통해 국가가 파악한 면역인구를 산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신분\시기 숙종 4(1678) 숙종 43(1717) 영조 26(1750) 정조 10(1786) 순조 25(1825)
양반직역 13.1(277) 18.6(466) 26.1(638) 31.1(946) 39.3(1,207)
중인직역 4.4(94) 8.6(216) 6.8(167) 15.4(470) 17.8(547)

(면역호)
17.5(371) 27.2(682) 32.9(805) 46.5(1,416) 57.1(1,754)

<표 6>각 시기별 전체 호수에 대비한 면역호의 점유율 (%:호수)

*비율은 각 시기별 총 호수인 2,116호(1678년), 2,511호(1717년), 2,441호(1750년), 3,045호(1786년), 3,070호(1825년)에 대비한 것임.

 조선 후기의 면역호는<표 6>081)李俊九, 앞의 책,<표 7-1·7-2>참조.
순조 25년(1825) 호적은 井上和枝의 앞의 글,<표 9>참조.
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숙종 4년부터 순조 25년까지 147년 동안 양반호는 26.2%(13.1%∼39.3%)가 증가하였고, 중인호는 13.4%(4.4%∼17.8%)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양반호와 중인호를 포함한 면역호는 그간에 39.6%(17.5%∼57.1%)가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대구부의 경우도 숙종 10년부터 183년이 지난 고종 4년(1867)까지 면역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준양반·중인 등이 36.7%(22.4%∼59.1%)나 증가하고 있다.082)金泳謨, 앞의 글,<표 4>와<표 6>참조. 그리고 19세기의 중반 이후에는 앞의<표 2>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양반인구만 보아도 48%∼67%나 되는 지역도 있으며, 앞의<표 1>에서와 같이 양반호만 보아도 70∼80%나 되는 지역도 있다. 이러한 면역호의 증가가 곧 면역인구의 증가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자 총수에 대비할 경우 면역호에 상당하는 면역인구의 증가로 보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역인구의 증가는 국가로 하여금 새로운 군역 조달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그에 따라 「양역실총」과 양역 균일화정책으로서의 균역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면역인구의 증가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대원군의 집권이후 양반층에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戶布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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